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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발전에 대한 강박이라는 한국병

by 격암(강국진) 2018. 5. 23.

18.5.23

막내와 영어공부를 하다가 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것은 미국 사람들이 사람들의 건강에 대해서 20년전과 비교해서 생각할 때 지금이 과거보다 더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으며 특히 65세 미만의 젊은 사람들은 더더욱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막내와 잠깐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새삼 느끼게 된 일이 있다. 그것은 우리 시대에는 세상에 가짜 꿈만 가득하다는 것이다. 

 

꿈이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한다. 단순히 어려워서 꿈이 될 수는 없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꿈을 꾼다고 할 때 만약 이미 가슴속에서 그 꿈을 이루는 것도 쉽지는 않겠지만 설사 그 꿈을 이룬다고 해도 우리가 행복해 질 것같지 않다고 한다면 그것은 진짜 꿈일 수가 없다. 그것은 자신도 믿지 않는, 자기 자신도 설득하는데 실패한 가짜 꿈인 것이다. 내가 세상에 가짜 꿈만 가득하다고 말하는 이유는 신문 방송이나 많은 사람들이 미래의 꿈이라고 말하는 것이 종종 바로 이런 상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꿈을 스스로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막내는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스마트 폰을 가지고 시간을 보내는 일이 많다. 하지만 사실은 스마트 폰이 없던 과거가 부럽다고 말한다. 지금 시대에 자기만 스마트 폰이 없다면 지금보다도 더 심심하겠지만 만약 모두가 스마트 폰이 없다면 차라리 그게 더 재미있을 것같다는 것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더 좋은 핸드폰이 우리를 더 행복하게 만든다는 광고가 나오고 있을 것이고 사람들은 이왕이면 더 좋은 폰을 가지고 싶겠지만 사실 더 좋은 핸드폰에 대한 꿈은 이런 의미에서는 가짜꿈이다. 우리는 그것을 가지기 전부터 이미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그다지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가까운 시대에는 더 고해상도의 티비가 나온다던가 엄청나게 더 빠른 인터넷이 보급된다던가 하는 선전을 흔히 듣는다. 자율주행 기능을 가지고 큰 스마트 기기로 변할 전기 자동차의 이야기를 하거나 심지어 우주선을 쏴서 화성으로 간다는 이야기도 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그런 것은 아니라고 할지라도 이런 이야기들을 포함한 많은 꿈들이 사실은 이미 낡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들이 그 자체로는 나쁜 것은 아니라고 해도 거기에는 뭔가 핵심적인 것이 빠진 것처럼 보인다. 왜냐면 그런 것이 실현되는 세상이 온다고 해도 사람들이 더 행복해 질 것같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을 가진 진짜 사람같은 로봇이 나오면 정말 사람들은 더 행복해 질까? 얼마전에 구글에서는 듀플렉스라는 서비스를 보여주었다. 듀플렉스는 사람의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서 사람과 대화하고 예약을 할 수 있는 인공지능 서비스이다. 하지만 과학기술분야에서 일했던 나의 반응과는 달리 아내와 막내는 오히려 그런 서비스가 두렵다고 말한다. 

 

내가 어렸던 40년전에는 아이들은 흔히 장래에는 과학자가 되겠다거나 대통령이 되겠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다. 무엇이든 꿈이 될 수 있지만 그런 꿈은 대개 이 세상을 보다 좋은 곳으로 만들겠다거나 뭔가 근사한 것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어린 아이들도 마치 취준생같은 꿈을 꾸곤 한다. 아이들은 아직 어린데도 어떤 직업은 시험통과가 어렵다던가 어떤 직업은 안전성이 어떻고 수입이 나쁘고 같은 생각을 하면서 꿈을 꾸는 느낌을 준다. 꿈과 구직계획이 혼동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꿈은 자유다. 뭐든지 꿈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세부적인 현실적 제약에 상상력이 억압된 꿈은 진짜 꿈이 아니라 가짜 꿈일 가능성이 크다. 즉 우리는 그런 꿈이 이뤄진다고 해도 그것 만으로는 행복해 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것은 진짜 꿈이라기 보다는 불행을 막기 위한 최소 조건처럼 보수적이고 방어적인 계획이다. 

 

미래에 희망이 있는 이유는 우리가 미래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자신의 꿈에 대해 세부적이고 현실적인 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언뜻 듣기에 좋은 이야기같지만 사실은 우리 자신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생각, 우리의 지금 관점에 가두는 행위이기도 하다. 아직 데이트 한번 해보지 않은 꼬마가 마치 수십년 결혼 생활이라도 해본 것처럼 결혼은 뭐하러 하는가, 애는 뭐하러 낳는가, 나는 절대 결혼은 하지 않고 혼자서 살겠다는 식으로 계획을 세운다고 해보자. 그런 계획은 그 계획대로 되서는 안된다.  그건 한 인간이 스스로를 꼬마의 세계에 평생 가둬두는데 성공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따로 계획을 하지 않았는데도 누군가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와 연인이 되고 그러다가 배우자가 되고, 아이가 태어나 나의 가족이 되는 기적들이 일어나는 가운데 느끼게 되는 것이다. 나는 꼭 결혼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세세하게 생각한대로 일을 흘러가게 만드는 것은 오히려 꿈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는 불확실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으로 천년을 산다고 해도 그 천년이 지금 알고 보이는 대로만 흘러갈거라면 그 천년의 시간을 가지고 행복을 만들 방법은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이미 결말을 아는 드라마를 다시 보는 것과 같다. 그것은 우리는 결코 불행에 갇혀 있는 지금의 상태에서 탈출할 방법이 없을 거라는 깊은 좌절이다. 

 

지금 세상에 흘러 넘치는 가짜 꿈들은 사실은 20세기의 꿈들의 연장들인 경우가 많다. 20세기에는 사람들이 발전과 과학의 꿈을 꿨다. 크게 발전한 과학의 힘으로 좋은 세상이 오지 않을까? 길을 만들고 도시를 건설해서 모두가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거대한 댐이 모두를 행복하게 만들지 않을까? 그때는 사람들이 그런 것을 진심으로 믿었고 따라서 그 꿈은 진정한 꿈이었다. 

 

하지만 100년전과는 비할 수 없이 과학이 발전하고 많은 건물들이 세워진 지금 이제 사람들은 그런 꿈에 지친 것같다. 우리가 행복해 지기 위해서 결핍한 것은 이제 더 많은 기술과 건물들이 아닌 것같아 보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똑같은 꿈에 대해서만 줄창 떠든다. 어떤 과학자가 논문을 썼다고 하거나 한반도 평화 이야기가 나와도 결국 나오는 이야기는 돈뿐이다. 이런 것이 돈으로 따지면 얼마가 된다는 둥, 우리가 어느 정도의 돈을 벌 수 있다는 둥하고 떠든다. 그런데 사실 사람들은 알고 있다. 첫째로 이런 장미빛 미래는 현실화될 가능성이 적고 둘째로 그렇게 되어 크게 돈을 벌어도 그게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사람들이 막대한 돈이 생겼을 때 하고 싶은 일은 사실 지금 생활에서 뭔가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돈을 가지고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 시스템 바깥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직장 바깥으로, 가족바깥으로 나라 바깥으로 탈출을 꿈꾸지만 사실 어디로 갈지도 모른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로또 맞으면 하겠다는 것이 결국 나는 자연인이다 같은 프로그램에 나오는 사람들처럼 세상을 뜨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로또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 방법이 없다. 오늘날 자살률이 이렇게 높은 것은 외로움이 첫번째 이유일테지만 두번째 이유는 이런 좌절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현실을 우리는 어떻게 바꿀 수 있을까? 우리는 여기서 자연스럽게 그렇다면 올바른 꿈이란 어떤 것인가하고 새로운 비전을 찾으려고 한다. 새로운 건설계획, 새로운 연구주제를 찾아 헤맨다. 새로운 공동체를 건설한다던가 새로운 경제 모델을 만들고 그것을 작동하게 만드는 진보적인 꿈이 과학기술만능주의에 대한 해독이 될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새로운 로케트나 새로운 VR 기술이 아니라 비트코인을 만들어 낸 블록체인같은 기술이 새로운 세상을 가져올 것이라고 상상해 보기도 한다. 

 

그것도 좋은 방향이다. 애초에 어떤 것이 진짜 꿈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는 우리가 뭘 믿을 수 있는가하는 주관적인 문제라서 구체적으로 이게 진짜 꿈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만약 지금 우리가 잘 못된 길위에 서있다면 올바른 길은 지금 금기시되고 있는 방향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시대에 가장 금기시 되는 일은 바로 발전을 꿈꾸는 일 자체를 다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쪽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특히 한국에서 더 중요한 일이다. 바로 발전을 위해서도 말이다. 

 

오늘날 우리는 발전을 하면 행복해 진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가정한다. 그래서 내년 이맘때쯤이면 지금과는 달라져 있기를 바라는 것이 보통이다. 10년 후의 나는 지금의 나와는 달라야만 한다. 이것은 한해 한해를 주기적인 것으로 바라보는  관점과는 많이 다르다. 이것은 올해 추석은 행복했다 내년도 올해정도만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어쩌면 우리가 불신에 빠져들고 행복해 지기란 불가능하다는 생각에 빠져드는 이유는 우리가 발전에 질려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요즘 아이들은 너무 일찍 어른의 세계에 편입 된다. 복고풍 드라마를 보면 느끼게 되지만 아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골목에서 다른 아이들이랑 놀던 시절에는 발전의 개념은 그렇게 강하지 않았다. 그냥 하루를 재미있게 보내면 또다른 하루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지 계획되어진 발전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할 것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사람들은 마치 경주를 하는 개나 말처럼 목표를 향해 뛰고 있다. 우리는 계속해서 현재를 부정하도록 요구받는다. 이대로 살아서는 안된다고 말해진다. 우리는 계속 스스로에게 당근과 채찍을 가한다. 핵심은 더 빨리 뛰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다가 응답하라같은 드라마를 보면 그렇게 빨리 뛰어서 우리가 행복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워졌는가에 대해서 확신이 서질 않는다. 아니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잃어버리고 행복에서 멀어진 것같다. 어떻게 된 것일까? 발전은 행복이고 우리는 발전을 향해 미친 듯이 뛰었는데 왜 행복에서 더 멀어졌는가?

 

우리는 바쁘고 현실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낭만과 여유가 없다. 세상이 어디로 가지 않으니 지금 하늘에 뜬 달을 보며 행복에 젖기 보다는 내일까지는, 다음 주까지는 끝마쳐야 할 일에 대해 생각하느라 낭만과 여유를 우리 마음속에서 지워버린다. 발전에 대한 강박은 낭만과 여유를 사치와 죄로 여기게 만든다. 

 

우리는 여기서 순환논리적인 모순에 빠져든다. 우리는 왜 그렇게 발전에 목을 매는가. 발전해서 출세해서 뭘 하고 싶은가? 그렇게 질문받으면 사람들은 그제서야 낭만과 여유를 말한다. 발전해서 낭만과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상태에 이르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낭만과 여유를 죄악시 하는 습관에 빠져들고 불행에 몸부림친다.  

 

우리는 사랑하는 것과 의무를 다하는 것의 차이를 곧잘 혼돈한다. 우리는 열심히 의무를 다할 수 있지만 열심히 사랑할 수는 없다. 그것은 마치 열심히 존재하겠다는 말처럼 이상하다. 사랑한다는 것은 어디론가 목표를 행해 나아가고 해야할 일을 하나 하나해나가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한다는 것은 그냥 어떤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학을 사랑한다는 것은 과학적 업적을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초조해 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건 그냥 과학을 좋아하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다. 만화나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재미있는 만화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앞에서 만화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주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그냥 아직 보지 않은 그 만화들을 즐길 것이다. 언제 이걸 다 보나하면서 한숨을 내쉬고 전력을 다해 만화를 읽어나가자고 다짐하는 것은 만화애호가의 자세가 아니다. 당연히 그런 독서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행복해 지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열심히 사는게 아니라 그냥 사는 일을 사랑하는 거 아닐까?

 

한국은 선진국의 발전을 따라잡는 일에 몰두해 왔다. 다시 말해서 뭐가 발전인지, 우리가 뭘 해야 하는지를 아는 상태에서 전력을 다해왔다. 그런 상태에서 발전에 집중하는 것은 마치 사법고시만 붙으면 좋은 삶을 살게 될거라는 생각을 하는 것과 같다. 나는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렸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나라가 나라답기 위해서 갖춰야 할 기본적인 것들이 이러저러한 것이 있다고 굳게 믿는다면 우리는 일단 그것에 집중할 수도 있다. 그걸 위한 발전에 몰두할 수도있다. 

 

하지만 우리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가지게 된 후에는 발전에 대한 강박은 발전의 목표인 우리의 행복을 오히려 해칠 뿐만 아니라 발전 그자체에도 방해가 된다. 우리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얻고 난 후에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딱히 정해진 답이 없다. 굶으면 죽을테니 밥은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사는 이유가 밥을 먹는 것이 전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초중고 공부를 잘하는 것은 학자가 되기 위해 필요하지만 초중고 공부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학자의 능력을 오히려 성장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사랑하는 일과 의무를 다하는 일을 자꾸 혼동한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방식은 사랑하는 방식이고 존재하는 방식이어야하지 결코 의무를 다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된다. 특히 어디로 가야 할지가 정해져 있지도 않은 상황에서는 말이다. 과학자들을 군인들처럼 모아놓고는 그 앞에서 국가를 위해서 불철주야 연구에 매진해 줄 것을,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의 과학을 발전시켜 줄것을 요구하는 무식한 정치가는 큰 오해를 하고 있다. 그렇게 해서 발전할 수 있는 과학이란 후진국의 과학이다. 즉 선진국 교과서 번역해서 열심히 외우고 공부하는 걸 과학발전이라고 부를 때나 그렇게 해서 발전할 수 있다. 그런 무식한 정치가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더 강렬한 경쟁을 도입한다고 더 좋은 결과가 나오지도 않는다.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면 과학이 발전할 방법은 하나 뿐이다. 과학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강요나 경쟁이나 댓가에 대한 유혹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자연스럽게 내버려 둘 때 생겨나고 유지되는 것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이미 할리우드에서 만들어 지는 문화상품들보다도 경쟁력을 보이는 작품들을 만드는 예술가들 앞에 가서 수출량 증대를 위해 더 가열차게 작품을 만들라고 하는 것은 바로 한류를 꺼뜨리는 행위다. 이러니까 발전에 대한 강박은 오히려 발전을 해친다. 지금도 초등학교때부터 아니 유치원때부터 빨리 빨리 공부하라고 아이를 다그치는 부모는 많지만 그런 부모들이 만드는 세상은 참으로 교육시스템이 쓸모 없는 세상이다. 무의미한 평가만 수없이 많아서 그 평가를 잘 얻기 위해 어떤 아이들은 쉬지 않고 자기 취향을 무시한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는 아이들은 엉망인 점수로 끝없이 시스템으로 부터 너는 가망없는 학생이라는 부정적인 평가만 받게 된다. 언론이나 정부는 창의력이니 창업이니를 외치지만 교육시스템이 만들고 있는 것은 정확히 영혼없이 안정적 삶만 추구하는 공무원들이다. 

 

우리는 왜 가짜 꿈만 가지고 있을까? 그것은 우리가 경쟁에 지치고 발전하는데 지치며 그런 가짜 꿈에 여러번 속았기 때문이다. 그래봐야 사실은 행복해 지지 않았는데 더 많은 것만 스스로에게 요구해 왔기 때문이다. 가짜꿈은 결국 다른 사람의 꿈이다. 엄마가 자식이 법대가기를 원해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의 꿈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의 꿈은 대개 겉만 번지르르하다. 뭔가 선전하기 좋고 자랑하기 좋은 것이다. 꿈이란 그런 것이어야 한다는 선입견을 가진 상태에서 우리는 자신의 꿈을 발견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사실 꿈이란 없어도 된다. 정도의 문제는 있고 기초적 의무교육은 필요할 것이다. 다시 말해 아직 아무 것도 배우지 않은 아이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의무적이고 남이 준 목표를 향해 뛰어야 하는 교육도 필요할 것이다. 그런 걸 꿈으로 아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 함께 살자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것은 필요로 하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그냥 살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지 꿈을 가지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행복해 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발전에 대한 강박에 지쳐서 이젠 자기가 뭘 원하는지도 모르게 되어서는 곤란하다. 

 

이런 것은 어디나 있는 문제지만 한국같은 나라에서 유독 심하다. 우리는 너무 오랜동안 남들의 권위에 기대어 살았기 때문이다. 노벨상받는 것, 미국 유명대학의 교수가 뭐라고 하는 것같은 것에 우리는 너무 오랜동안 휘둘렸다.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 겠다. 우리는 그냥 행복해도 된다. 의무에 너무 강박관념을 느끼지 말자. 또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꿈이 있어서 그걸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그런 꿈이 없어도 된다. 꿈에 대한 강박은 결국 진짜 꿈을 찾는 것을 오히려 어렵게 한다. 한국은 이런 자세가 더 많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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