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생활의 발견

by 격암(강국진) 2018. 7. 22.

2018.7.22

부산에 사는 처제가 놀러와서 내가 파운드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보더니 빵만들기가 내 취미냐고 물었다. 나는 그 순간 약간 당황했는데 내가 답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그건 적절한 답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나는 베이커리를 열려고 빵만들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나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빵만들기는 내 취미다. 그런데 취미라고 말하려니까 뭔가가 아닌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만약 라면을 끓이고 있는데 처제가 나에게 라면끓이기가 취미냐고 물으면 내가 비슷하게 느낄 것같아서 그랬던 것같다. 나는 그냥 라면을 끓여먹을 뿐이다. 그건 직업도 아니지만 취미도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생활이다. 처제도 내가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면 그렇게 묻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처제가 보기에 빵을 만들어 먹는다는 것이 생활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그리고 반면에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내가 말한 상황에 대한 원인이 되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이것은 뻔한 현대생활의 한 측면에 대한 이야기다. 우리는 어느 새 생활의 많은 부분들을 잊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시장으로 내보냈다. 우리는 대개 채마밭에서 채소를 키워먹지 않으며 가정에서 만든 옷을 만들어 입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을 직접 가르치지 않으며 사실 많은 가족들은 집에서 같이 식사를 하기도 힘들다. 부모는 직장일로 바쁘고 아이들은 학교일로 바쁜 것이 보통이라서 그렇다. 물론 요즘 가족들은 3-40년전보다 더 많이 외식을 하고 휴가를 떠난다. 하지만 그것은 집에서 직접 음식을 하고 식탁을 차리고 먹는 음식이 아니다. 말하자면 엄마의 간식이 맥도널드 햄버거로 교체된 꼴이랄까.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쉽게 현대 생활이라고 말하지만 일본에서 10여년을 살았던 내 경험으로 보면 일본같이 잘사는 나라의 경우와도 또 다른 상황이다. 10년전 일본에 처음 갔을 때의 일이다. 아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신발을 집어넣을 신발주머니를 보내달라고 했다. 한국같으면 당연하게 다이소 제품 같은 것을 사서 보냈겠지만 일본에서는 대개 집에서 만들어서 보낸다. 같은 유치원에서는 아이들에게 부모가 주는 선물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는데 그게 직접 부모가 만든 봉제인형이었다. 

 

딸아이는 당시에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일본에서는 운동회나 수업참관일이 되면 부모가 안오면 아주 불쌍한 아이가 된다. 초등학교 운동회는 거의 동네 축제 수준의 행사고 수업참관일에 가보면 부모들이 너무 많이 와서 교실에 다들어 갈 수가 없다. 교실 뒷편이 모잘라서 복도가 넘쳐나는 상황이 된다. 한국에 귀국했을 때 수업참관일에 부모들이 너무 없어서 우리 부부는 당황했다. 

 

나는 이 예들을 일본을 찬양하기 위해서 쓰는 것이 아니다. 나는 다만 가난했을 때나 그렇게 살지 돈을 벌면 원래 지금의 한국처럼 되는게 당연하다라는 말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을 뿐이다. 그건 당연한게 아니고 한국 사람들이 선택한 것이다. 그리고 흑과 백처럼 선택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정도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간이 부유해 진 것은 확실히 우리가 많은 것을 분업화하고 시장에서 물건을 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자기 손으로 직접 뭔가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지나치게 낭만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그렇게 바람직하지는 않다. 직접 옷을 만들고 음식을 만들고 집수리를 하고 아이를 가르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다. 그것은 어느 정도 문명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라이터가 있는데 불을 직접 만들겠다면서 나무조각을 비벼대는 것을 찬양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닐까?

 

내가 빵을 만든다지만 사실 왠만하면 사먹는게 좋다. 시간도 들고 전문가를 당하기 힘들다. 다만 재료를 파는 것보다 풍성하게 쓸 수 있을 뿐이다. 맛있는 식빵은 베이커리에서 사도 싸다. 그런데 만들기는 어렵다. 반면에 스콘이나 파운드 케이크는 만들기는 매우 쉬운데 베이커리나 카페에 가면 무척 비싼 돈을 받는다. 흔하지 않고 식빵보다 재료가 비싸서 그렇다. 그러니까 스콘이나 파운드 케이크는 만들어 먹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시장의 중요성을 기억해야 하지만 동시에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가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인간은 아주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살았다. 이 전통적이라는 것은 수렵채집생활을 하던  원시인 생활 일 수도 있고 집에서 가족들이 자급자족하면서 살던 생활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전통 생활이란  아주 오랜간 반복되어지고 진화되어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런데 시장에 전적으로 의존해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은 그렇게 오래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왜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 진 음식이 위험하다고 할까? 기본적으로는 데이터가 없어서 그렇다. 그걸 평생 먹고 나아가 3대 4대로 걸쳐서 먹어서 문제가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본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눈수술의 하나인 라식수술 같은 것도 이제는 보편화되었지만 처음에는 같은 문제가 있었다. 그 수술을 하고 50년쯤 살아보니 한 보람이 있더라던가 오히려 해롭더라던가 같은 결과가 나온 적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소위 현대인의 삶이라는 것이 정말 당연한 것인지를 잘 모른다. 생활을 실종시키고 살아도 좋은 것인지를 논리적으로는 비판하기 힘들어도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라서 그 결과가 어떨지 모른다. 어떤 사람은 분초를 다투며 사는 시대에 이런 한가한 요구에 귀기울 일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주장할 수도 있고 사실 이런 요구는 무리한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는 개개인들이 선택해야 할 문제다. 

 

하지만 미국이며 일본을 돌아다니며 살아본 내 경험을 뒤돌아 보면 나는 묘한 것을 느끼게 된다. 내가 보기엔 부자이면 부자일 수록 전통적으로 산다. 곰곰히 생각해 보라. 여기에는 모순이 있다. 백년전에 미래인을 상상하면 기계가 발달해서 몸매가 형편없는 사람들을 상상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날 정말 그런가? 부자나라에 가면 티비에 중독되고 음식을 먹어대서 몸매가 망가진 것은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이다. 빌게이츠 같은 부자는 돈이 넘쳐나니까 그 돈으로 뭐든지 하면서 편하게 살까? 미국의 부자들은 오히려 아이들 학교통학을 직접 시켜주고 수업참관이나 생일파티에 참가하고 집에서 부모가 직접 만든 음식을 아이에게 주려고 한다.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문맥으로 말하자면 부자들은 생활의 실종이 좋지 않다고 판단한다. 아니면 반대로 생활을 쉽게 실종시키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힘든 건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동차가 있는데 왜 운동을 하는가? 왜냐면 건강에 나빠서 그렇다. 건강이 나빠지면 돈을 벌 수가 없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할 수 있다고 해서 생활에서 멀어지면 우리의 감각은 퇴화된다. 

 

망치질도 하고 산책도 하고, 휴가도 즐기고, 요리도 하는 생활들은 얼핏 낭비로 보일 수 있다. 베이커리에 가면 정말 맛있는 빵이 얼마 하지도 않는데 집에서 빵을 뭐하러 굽겠는가? 노동과 시간의 낭비다. 집을 꾸미는 일도 그렇다. 인테리어에 대해 생각하면 정말 별거 아닌 것도 생각할 것이 엄청 많다. 하다못해 벽에 선반을 하나 다는 일만 해도 어디에 달지, 어떤 모양의 것을 달지, 아니 애초에 달아야 하는 것인지 생각이 왔다갔다 한다. 하지만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이미 멋지게 꾸며놓은 방들의 사진들이 널려 있다. 뭐하러 고민을 하는가. 그냥 남의 것 보고 그대로 베끼지. 노동과 시간의 낭비다. 

 

한국인은 노동시간이 긴 걸로 유명하다. 그러니까 직장에서 노동한 걸로 충분하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문제는 하나의 직업은 대개 특정한 일만 반복시킨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직장근무시간이 긴 사람일 수록 해독을 위해서라도 직장일과는 다른 생활을 찾는 것이 바람직 할 수 있다. 시간이 없다거나 피곤하다는 이유로 굳어지면 그 직장일도 잘 못하게 될 수 있다. 앞에서 말한 퇴화때문이다. 감각의 퇴화고 감정의 퇴화다. 

 

그렇게 되면 직장일 말고 다른 일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질문하기 쉽다. 그걸 왜 해? 창업하려고 하나? 취미생활같은 건가? 요즘 분위기를 보면 한국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한국의 인건비가 오르면서 반대로 DIY가 늘어나는 것같다. 앞에서 말한 이유로 보람도 있고 경제적인 의미에서도 보람이 있다. 내가 빵굽기를 취미라고 부르는 것에 저항했던 이유는 그러면 너무 거창하기 때문이었다. 거창한 건 좋지 않다. 괜히 힘이 들어간다. 돈을 벌고 생활의 질을 올리기 위해 하고 있다기 보다는 무슨 사치생활을 하는 느낌도 든다. 그래서 나는 그걸 이렇게 부르는 것이 마음에 든다. 생활의 발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