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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부러워하는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by 격암(강국진) 2018. 11. 5.

18.11.5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은 대개 작은 나를 단단히 하게 만들고 우리를 비참하게 느끼게 만든다. 우리는 그것이 공평하고 바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든 사람들을 같은 기준으로 비교하는 일이 많다. 그런 일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 세상은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수입은 얼마입니까? 당신의 체력이나 외모는 어떻습니까? 당신의 집은 얼마나 큽니까? 당신의 자식들은 어떤 성적을 가지고 있습니까? 당신의 사회적 지위는 어떠합니까? 세상은 자꾸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남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런 일은 어디나 있는 것이지만 내 경험으로는 특히 한국이 더한데 그래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다른 사람과 자신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비교하게 되고 그 결과 더욱 더 쉽게 작은 자기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설사 내 차가 경차라서 부끄러워 할 것도 없다고 생각하고 불편하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계속 옆에서 비싼 외제차를 가지고 감탄하고 경차를 보고는 비웃는 표정을 짓는 사람 속에 있다보면 자동차의 크기나 가격에 대해서 신경쓰게 되기 쉽다. 겉으로는 안그런척 해도 사실은 그런 것이 적어도 대부분의 인간의 현실이다. 내 옷에 내가 신경쓰지 않아도 내가 신경쓰고 사랑하는 딸이 내 옷때문에 부끄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세상에 섞여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내가 100미터를 10초에 달릴 수 있다고 해도 옆 사람과 보조를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다보면 우리는 세상에 젖어든다. 남과 똑같이 살다보면 남과 실제로 똑같아 진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작은 나란 무엇인가? 그 작은 나란 주로 여기 이 작은 공간속의 어느 특정한 지점에서 이 육체를 소유하고 있다고 믿어지는 나를 말한다. 물질적인 관점에서 보면 나란 바로 이 육체를 의미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은 나라는 생각속에 끊임없이 빠져든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은 나가 아니며 적어도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사실 설사 이 육체가 곧 나라고 해도 그것을 말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울해 할 것도 부러워 할 것도 없을 것이다. 세계 최고의 부자도 나도 결국 알몸으로는 같기 때문이다. 알몸으로의 나가 나의 전부라면 나는 나 이외의 모든 우주속의 물건을 다 치워버려도 나라는 뜻이다. 그런데 그런 텅빈 우주에서 도대체 학교성적이나 지위나 재산이란 게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우리가 가진 것은 이 몸과 기껏해야 머릿속의 기억 뿐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 기억도 대부분 의미를 잃을 것이다. 당신이 유명한 축구선수였다고 하자. 당신이 은퇴한 이후에도 그 기억은 의미가 좀 있을 것이다. 왜냐면 아직도 축구를 좋아하고 과거를 같이 기억해 주는 다른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구란게 세상에서 사라지고 그걸 기억하는 다른 사람도 모두 사라졌다면 축구선수였다는 기억은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 의미를 잃어버릴 것이 아닌가? 최고의 미녀도 소나 고릴라 사회에서 산다면 자기가 인간사회에서는 미녀였다는 기억이 별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는 다행히도 우리 주변에는 세상이 있고 타인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상과 소통하고 있으며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존재는 우리의 상상이상으로 그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모든 것의 의미는 그것이 놓여지고 관계되어지는 문맥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나라는 것이 고립되고 홀로 존재하는 이 육체라고 생각한다. 내가 그것을 홀로 독점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우정을 홀로 가질 수 있다거나 혼자서 반에서 1등을 할 수 있다는 것처럼 알고보면 기묘한 생각이다. 상대가 있어야 우정도 있는 것이고 2등이 있어야 1등이 있을 것아닌가. 위가 있어야 아래가 있듯 세상이 있어야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어떤 관계든 오래되면 우리는 종종 고마움이 없어지고 그것을 마치 자연의 법칙처럼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된다. 세상은 저기에 그대로 있고 나는 그저 이 작은 나라는 환상에 빠져든다. 아침마다 일어나면 식탁에 밥이 차려져 있고 학교에 가라고 깨워주시는 어머니가 있을 때 우리는 금새 어머니가 나를 사랑하셔서 식탁에 밥을 차려놓는다는 생각보다는 마치 저절로 식탁이 밥을 토해놓은 것처럼 느낀다. 물론 어머니도 인간이니 자식에게 바라는 것이 있고 의지하는 것이 있다. 나는 섯불리 어머니의 무한한 사랑따위를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나는 세상에는 관계가 존재하고 그 관계속에서 여러가지 소통과 도움이 오고간다는 당연한 사실을 우리는 쉽게 망각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나 사회라는 환경속에 내 자신이 놓여져 있고 그런 환경과 계속 소통하면서 나라는 것이 평가되고 정의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세상을 잊어버리고 나는 그냥 여기 나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 따르면 타인이 없어도 나는 그냥 나다. 

 

이런 작은 나라는 착각이 가져오는 가장 불행한 결과는 우리가 관계를 잊고 외톨이가 된다는 것이다. 관계를 보지 못하니 외로워 지고 내 것이 있고 남의 것이 있다는 개념이 무한히 분명해 진다. 한국의 국가대표팀이 월드컵 경기에서 이기면 우리는 왜 그렇게 행복해 하고 기뻐하는가. 그건 남의 일이 아닌가? 나는 그냥 여기 있는데. 유명 축구선수들은 명성과 돈을 얻어서 기쁘겠지만 나는 그냥 여기 작은 방에서 티비나 보고 있을 뿐인데. 어떤 지식인들은 일부러 이런 점을 지적하면서 국가대표팀의 승리를 기뻐하는 모습에 비아냥을 보내기도 한다. 이게 다 국가주의라는 마약이고 세뇌라는 것이다. 그렇게 잘난 체하는 사람도 이 나라의 군대가 지켜주는 땅에서 보호받았으며 이 나라의 의료보험 시스템에 의존하고 이 나라의 교육 시스템에서 교육을 받았으면서 말이다. 

 

나는 어떤 관계도, 예를 들어 국가나 가족같은 관계도 절대시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파시즘으로부터의 탈출이 우리를 무한한 우주속에 고립된 외로운 존재로 파악하게 만드는 일을 의미하게 되어서는 안된다. 스스로를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제대로 비판적인 정신이 하는 일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이유로 그것도 내가 아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달로 가는 혁신적인 로켓을 만들어 우주여행시대를 열었다고 하자. 우리는 부러운 마음에 빠져들 수도 있다.

 

"야. 저 사람은 좋겠네. 명성도 얻고 부자도 되고 남들도 다 저 사람을 부러워 할테지."

 

여기서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인류가 우주여행시대를 열었다고 하는 관점이다. 즉 내가 여기 작은 내가 아니라 내가 곧 인류이며 내가 우주시대를 연 인류라는 관점이다. 그 일은 내 일이다. 나는 스스로가 워렌 버핏이나 엘론 머스크처럼 유명한 사람과 같다는 관점을 가지라는 말이 아니다. 축제를 즐기고 관계를 즐겨야 한다는 것이다. 왜 붉은악마 응원팀에 끼어들어서 축구축제를 즐기지 못하고 이게 다 세뇌고 억압이라는 외로운 생각만 하냐는 것이다. 

 

나는 자율운전이 가능한 자동차에 타보고 싶다. 그것을 내가 직접 만들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내가 촛불혁명의 영웅으로 유명해 지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촛불혁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을 보는 것은 기쁜 일이다. 인류가 뇌를 이해하는 일에서 어떤 혁명적 발전이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즐거운 파티다. 그런 일이 있을 때 누가 노벨상을 탈 것인가, 누가 돈을 얼마나 벌 것인가, 누가 어떤 지위에 올라 설 것인가에 신경쓰고 세상을 동강 동강내어서 니것 내것만 따지는 마음은 쓸쓸하고 외로운 마음이다.

 

우리는 하나의 흐름속에 있다. 바다에 사는 물고기는 어떤 의미에서 바다와 하나다. 우리의 피가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의 몸을 돌고 있듯이 바닷속에 사는 물고기는 끊임없이 바닷물을 자신에 몸에 통과시킨다. 우리가 산책하는 길도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고 우리가 쓰는 인터넷도 우리가 직접 만든 것이 아니다. 우리가 입는 옷도 먹는 밥도 그렇다. 우리는 세상이라는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들이며 너와 나라는 구분은 궁극적으로는 착각에 불과하다. 우리는 위가 아래를 만들 듯 서로가 서로를 만들고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세상에 부러운 것이 있다. 가지고 싶은 것이 있다. 내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 있다. 우리는 그런 걸 부끄러워 할 필요는 없다. 우리는 그저 유한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남을 부러워 하는 마음도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만 세상이 지나치게 우리를 찌들게 해서는 안된다. 세상이 우리를 평가하고 세상이 우리에게 매몰차게 구는 것때문에 지나치게 좀스럽고 작은 나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것은 생활의 즐거움을 모두 빼앗아 가버리고 우리를 쓸데없이 우울하게 만들 뿐이다. 작은 나에 빠지면 재미있는 것, 흥미를 가지는 것도 없어져서 오히려 점점 상황이 나빠지기만 한다. 세상의 수 많은 흥미로운 일들이 그저 남일이 되고 따라서 중요하지도 흥미롭지도 않게 된다. 나의 아픔, 나의 고독, 나의 고민에 너무 몰두하는 사람들은 그런 몰두의 결과 오히려 문제를 키운다. 오히려 세상의 아픔과 고독과 고민을 보며 자신을 잊는 사람은 정신차려보면 그런 문제가 해소된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다. 우리는 하나의 흐름속에 있다. 이 몸뚱아리가 내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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