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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다.

by 격암(강국진) 2019. 1. 18.

19.1.18

우리가 신처럼 무한대의 능력을 가졌다고 해보자. 그렇다면 많은 것이 의미가 없다. 내가 세상의 모든 회사를 다 사버릴 수 있는데 취직시험이 의미가 있을까? 세상의 여자는 모두 내 맘대로 할 수 있다면 연애라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그 말은 여자들이 나에게 있어서 로보트처럼 그저 명령을 따르는 존재라는 뜻인데? 우리는 로보트와 연애를 하게 되지는 않는다. 절대로 배가 고파지지 않으며 상상 할 수 없이 맛있는 것을 언제나 먹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있어서 식도락은 금새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결국 우리가 가진 능력의 한계가 모든 것에 의미를 준다. 모든 것이 어떤 문맥을 가지게 되는 이유는 우리가 우리 주변의 것들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있으며 그 환경과 싸워야 하고 그것에 영향을 받으며 때로는 그것에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때로 모르면서 개미를 밟아죽인다. 그 개미들이 존재하는 지도 모르기에 그런 일이 벌어진다. 통상 우리가 숨쉬는 공기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움직임과 판단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들의 존재를 잊게 된다. 우리가 주변에 존재하지만 가끔씩 그 존재를 잊어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그 사람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엇이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가치명제는 그것이 아무리 교묘하게 숨겨져 있다고 해도 언제나 누군가의 한계와 무지를 전제하고 있다. 가치 명제에는 주체가 있고 심지어 그 주체의 한계와 무지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좋다 나쁘다를 말하는 가치란 존재할 수가 없다.  과학적 지식이 혹은 사실명제들이 결코 가치 명제를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서울이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것은 사실명제다. 이것은 그것이 멀다거나 가깝다거나 혹은 서울이 100킬로미터 떨어져 있어서 좋다거나 나쁘다거나 하는 결론을 결코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런 결론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경험과 감각의 주체를 끼워넣어야 한다. 보통의 사람에게 걸어가자면 100킬로미터는 아주 먼 거리다. 비행기 여행을 해보겠다는 사람에게는 100킬로미터는 충분히 먼 곳이 아닐 수 있다. 

 

그러므로 느린 것, 모자란 것, 불편한 것은 우리를 존재하게 한다. 때로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몸이나 충분히 잘 돌아가지 못하는 머리가 원망스러울 때가 있다. 조금만 더 대단한 재능이 있었으면 좋았을텐데 말이다. 그러나 언제나 우리가 우리로 있을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딘가에 서있는 우리의 한계의 벽이다. 그렇기는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렁이가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생각이지만 의미가 별로 없다. 우리는 선택을 잘해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인간으로 던져져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인간으로 태어났다고 해도 다른 나라에서, 다른 시대에서, 다른 성별이나 다른 집안에 태어났을 수도 있었겠지만 우리는 하필이면 지금의 이 모습으로 이 장소에 태어났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에 감사한 마음도 있지만 사실 욕을 하게 될 때도 많다. 왜 이 집안은 고작 이 모양이꼴인건지, 왜 우리 회사는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지, 왜 저렇게 세상에는 욕심많고 철면피같은 인간이 많은 건지, 왜 우리나라는 이정도 밖에 되지 않는지. 부질없는 일인 것은 알지만 우리는 때로 불평하게 된다. 조금만 달랐더라면, 아주 많이도 아니고 조금만 달랐더라도 그 차이가 엄청났을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거만 없었더라면, 내가 조금만 더 능력이 있었더라면. 

 

하지만 인간은 무지와 부족함때문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가장 크게 욕을 하는 존재야 말로 우리를 존재하게 만들어 준다. 나라를 침략한 적이 없는데 독립운동가가 있을 수 없고, 범죄자가 없는데 경찰이 있을 수 없다. 입시생은 시험이 지긋지긋하겠지만 어떻게 보면 시험이 입시생에게 할 일을  준다. 물론 그 시험이 없어도 자신이 누군인지를 명확히 아는 사람에게는 그 시험이 불필요하겠지만 사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를 찾기 힘들어 한다. 그래서 그 틀에서 빠져나온 자퇴생이나 백수는 아무리 힘들어도 학교를 다니는 사람들이 부러울 수 있고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부러울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은퇴한 사람들이 정체성 위기를 겪지 않을 것이고 아이들을 키워서 내 보낸 부모들이 빈둥지 증후군을 겪지도 않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의 단점들도 고맙게 느끼게 된다. 예를 들어 투박한 내 외모도 고마운 일이다. 어떤 여자건 홀리고야 말정도의 대단한 외모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나는 가슴 두근거리는 첫사랑도 없었을 것이고 연애다운 연애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난한 집에 태어난 덕분에 나는 싸구려 만두나 참치캔에 사발면을 먹는 즐거움을 알게 된 것이 아닐까? 살다보면 보통사람은 직장일이나 가족들 문제로 밤을 새거나 추운 새벽에 밖에 나가야 할 때가 있다. 그런데 지나고 나면 그게 다 정든 기억처럼 느껴진다. 그게 다 내가 세상에 존재해도 된다는 증거를 내보인 순간처럼 느껴진다. 내가 글쓰기에 보람을 느끼는 이유도 대단한 글쓰는 솜씨를 타고나지 못한 덕분이다. 그렇지 않다면 나는 내가 쓴 글을 훨씬 덜 좋아했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여러 가난에 대해 고마워해야 한다. 그것들은 우리를 우리로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아주 오랜 친구같은 것이다. 내가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세상은 거지같을 것이며 나는 이것저것을 불평하게 될 것이다. 나는 절대로 천국에 살게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내가 정을 주고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이기도 하다.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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