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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효율적이다.

by 격암(강국진) 2019. 3. 9.

19.3.9

우리는 우리가 어떤 말의 의미를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말에 속는다. 왜냐면 말들만 보고 있으면 다 옳은 말이라서 그 결론을 부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런 말에는 효율적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는 뭔가가 효율적이라고 하면 그저 그런가 한다. 

 

대개의 경우 최소의 노동을 투자하여 최대의 금전적 보상을 얻는 것을 효율적이라고 말하지만 여기에는 큰 함정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거래나 행동을 할 때 그 시작과 끝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가정이다. 예를 들어 내가 사과 하나를 판다고 하자. 사과를 파는 것에는 노동이 들고 더 비싸게 팔면 더 많은 보상을 얻는다. 다시 말해 너무 빨리 팔아버리면 사실은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기회를 버리는 것이 되고 너무 미적거리면 시간과 노동만 낭비하게 되므로 현명한 일이 못된다. 우리는 그래서 타인과 만나서 이 사과를 하나 사고 파는 것에 대해서 효율적인 판단이 어떤 것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거래에 대한 사고는 보편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첫째로 이 거래는 우리가 타인과 단 한번만 거래하는 것을 가정하고 있으며 둘째로 우리가 이 거래 이외에도 다른 인간관계를 이 타인과 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런 예를 생각해 보자. 당신은 지금 화성으로 떠날 예정이다. 그리고 지금 당신 앞에는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타인의 사과가 있다. 그렇다면 이 사과를 훔쳐먹고 화성으로 떠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사과를 훔친 것에 대해서 처벌받을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사과라는 소득은 확실하다. 

 

하지만 매사가 이렇다면 우리는 뭐하러 부모님이나 자식이나 친구나 배우자의 돈을 훔치지 않는가? 윤리를 따지기 이전에 그렇게 하는 것은 어떤 의미로 분명히 매우 비효율적이다. 우리는 주변 사람과의 관계속에서 많은 것을 얻고 있기 때문에 자잘한 이득에 눈이 멀어서 그런 신용을 깨는 것은 매우 어리석다. 결국 이런 생각을 다시 정리해 보면 우리는 한가지 자명한 결론에 이르게 된다. 어떤 것이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어떤 환경에 있는가 혹은 어떤 게임을 하고 있는가에 달려 있다. 

 

 

육면체로 된 보통 주사위를 던져서 1이 나올 확률이 1/6이라고 누가 말할 때 그 말은 옳은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을 누군가가 이렇게 했다고 하자. 1이 나올 확률은 1/6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육면체로 된 공평한 주사위를 던지는 게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자명한 사실로 여기고 언급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나서 1이 나올 확률은 1/6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사실 당신의 주사위가 정20면체였다면 어쩔 것인가. 그렇다면 1이 나올 확률은 1/20이 맞다. 1/6이 아니다.  

 

이런 예는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니다. 왜냐면 누군가가 경제학이든 철학이든 말할 때 머리속에서 구체적 모델로 생각하고 있는 게임은 실제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인생은 한판의 거래로 끝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장사를 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알 듯이 짧게 보고 이득을 너무 노리면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아서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그런데 어떤 게임이 이렇게 시작도 끝도 한없이 확장되게 되면 그것은 관념적 이해의 수준을 넘어가게 된다. 물리학같은 기초 과학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고립계라는 근사가 잘 성립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적 경제적 수준에서는 우리가 고립계를 가지는 경우는 정말 없다. 

 

주사위가 육면체인지 이십면체인지는 척보면 알지만 지금 우리가 어떤 경제적 게임을 하고 있는 것인지는 그걸 평생 하고 있는 사람도 잘 알지 못한다. 철학자도 당신에게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못하며 오히려 그런 걸 찾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 상황에서 효율적이라는 말이 분명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당연히 불가능하다. 

 

우리가 어떤 세계에 있는가에 대한 말은 정직하게 말할 경우 언제나 불명확하다. 왜냐면 거기에는 우리의 무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후배에게 연애에 대해서 조언을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사람이 연애란 이런 것이다라고 분명한 어조로 명확하게 연애를 정의한다면 그런 사람은 연애가 뭔지 모르거나 연애에 대해 큰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반대로 연애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으며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은 오히려 매우 조심스럽게 말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 도 있다는 둥 애매하게 말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단지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보다 이 사람이 더 연애에 대해서 모른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행히도 우리는 많은 경우 확신을 가지고 분명하게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그런 말에 넘어가서 효율적인게 뭔지도 좋은 연애가 뭔지도 확신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과연 이것이 효율적이야라고 분명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면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어느새 사상적으로 세뇌가 되어서 당연하지 않을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해 버리게 것이다우리는 세상이 흐릿하고 불명확해 보일 두려워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너무 확실하게 보일 두려워해야 한다. 그럴 우리는 가장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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