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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결혼은 왜 인기가 없을까?

by 격암(강국진) 2019. 3. 28.

19.3.28

우리의 삶은 여러가지 것들로 구성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가족과 직장일 것이다. 요즘 세상에서 직장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예를 들어 나로 말하면 나는 대학교에 입학하고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래로 대개 과학을 전공한 학생이나 교수, 연구원들과 만나면서 살아왔다. 그런 과학공동체의 사람들도 어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름대로의 장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학문을 하는 사람과 그 문화속에서 살던 즐거움을 잊지는 못한다. 그러니까 그들과 함께 연구를 하고 과학자로 평가를 받고 동병상련의 대화를 하기도 하며 직업적이고 개인적인 정보를 나누던 일에 비하면 어떤 아파트에 사는가라던가 그 아파트의 구조가 어떻게 생겼는가 하는 것은 내 삶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작은 일이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많은 연구자들이 여러가지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과학자로의 삶을 계속하는 이유는 이런 면이 크게 작용하고 있을 것이다. 

 

과학공동체뿐만이 아니다. 회사원인 우리 형님들의 삶을 봐도 그 삶에서 직장은 아주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경제적인 부분을 떼어내 봐도 그렇다. 동료나 부하직원과의 관계 그리고 사내에서의 평가가 직장인의 삶을 크게 좌우한다. 우리는 이렇게 운명처럼 여러가지 직장을 선택하고 그 안에서 누군가와 같이 살아가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삶은 그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가에 크게 의존하게 된다. 때로 이런 면은 너무나 커서 심지어 가족보다 직장에서 만나는 사람이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을 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은 배우자보다 직장동료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기 때문이다. 

 

예외적인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가족은 핵가족으로 다시 아이도 없는 부부로 줄어들면서 단순해 져온 반면에 직장의 경우는 그 규모가 대개는 훨씬 크다. 우리는 직장동료가 수백에서 수천이 되는 경우를 쉽게 보지만 배우자가 수십명이고 가족이 수천명이 되는 경우는 없다. 큰 조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다양한 경험을 가질 기회를 가지게 해준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학창시절에 같은 반 친구들과 있었던 일을 잊지 못하고 직장속에서 화목한 분위기로 잘 지냈던 경우에는 그 사무실에서 있었던 일을 추억하고는 한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그 끊임없는 다양성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만 봐도 요즘 세상에서 인간이란 직장인으로 태어나서 자기 경력을 관리하다가 죽는 삶을 사는 것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태어나자마자 우리는 취준생이 되고 그리고는 직장인이 되었다가 직장인이 되기를 멈추면 생물학적으로는 살아 있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죽은 거나 다름없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인상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가를 떠나서 이런 인상을 받게 되는 것은 우리를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드는 이데올로기가 우리를 둘러 싸고 있다는 이유가 크다. 다시 말해 우리는 직장은 중요하고 가정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하다고 암시하는 메세지에 둘러 쌓여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결혼이 인기가 없어진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전통적으로 가정이 하던 기능을 직장이 흡수해 버리고 직장이 스스로의 즐거움을 선전함으로써 결혼을 상대적으로 더 재미없고 보람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고 있는 것에 있다. 즉 객관적인 사실 이상으로 정신적인 것에 이유가 있다. 

 

내가 자주 드는 예가 돈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이 가치의 척도라고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은데 그렇기 때문에 월급을 주는 직장은 자연히 가치 있는 일들을 하는 곳처럼 느껴지고 그렇지 않은 가정의 일은 무가치한 일처럼 느끼게 되는 일이 많은 것이다. 그래서 가정에 있으면 직장에서는 온갖 중요하고 재미있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데 그와는 반대로 가정과 가족의 일은 가치가 없고 재미없으며 그저 골치만 아픈 것이라고 느끼게 되는 일이 많다. 직장에서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푼돈에 기꺼이 머슴이나 하녀라도 된 듯이 성실하게 행동하던 사람도 가정에서는 사소한 일을 누가 하는 가를 가지고 억울하다고 느끼고 귀찮다고 느끼는 일도 많은 것이다. 돈을 받으면 일을 한다는 것은 자본주의의 논리다. 우리는 그것에 지나치게 세뇌되어 있다. 그래서 돈이 오고가지 않는 곳의 일은 억울하다거나 시시하다고 느낀다. 

 

또 우리는 거대한 직장들, 조직들의 선전에 둘러 쌓여 있다. 텔레비전 드라마를 보고 있으면 전국민의 3분의 1은 법조인이 아니면 의사인 것같다. 법정드라마나 의학드라마가 워낙 많다. 그게 아니더라도 멋진 사무실을 쓰는 직장인들이 많이 나오고 별로 좋지 않은 직장을 다루는 경우에도 과장이 많다. 예를 들어 얼마전에 나는 출판사에 대한 드라마를 본 적이 있는데 그 출판사의 사무실은 어찌나 멋진지 그 사무실에 일하는 사람들이 연예인들이라는 것을 제외해도 누구나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어할 것같아 보였다. 

 

이에 비하면 결혼이란 요즘 영 인기가 없다. 멋진 선전도 드물지만 인기가 없는 또다른 이유중의 하나는 분명히 섹스와 페미니즘이라고 생각된다. 프리섹스는 당연히 결혼을 인기없게 만든다. 인간의 성욕은 타고난 본성이다. 그런데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가 아니면 섹스는 공식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에서 요즘 사회는 그런 걸 잘 안따지는 분위기로 바뀌었다. 이것은 결혼이 가지는 의미를 많이 줄였다. 결혼이란 기본적으로 성관계와 출산을 의미하는 것이란 것이 요즘은 사실이 아닌 것이다. 요즘은 결혼을 해도 애도 낳지 않고 결혼을 하지 않아도 섹스는 할 수 있다. 모두가 이런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페미니즘이란 곧 프리섹스를 의미하며 여성이 직장에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문장은 어떤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들겠지만 여기에 일말의 진실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정직하지 않을 것이다. 페미니즘이란 결국 가정이란 테두리를 파괴하고 더 많은 노동력을 얻겠다는 자본의 의지를 포장한 것에 불과하다는 주장에 진실은 하나도 없을까? 나는 결코 과거의 남성우월적 사회가 좋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보자. 페미니즘이 프리섹스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결혼한 관계가 아니면 결코 섹스를 하지않겠다는 주장이 되지 못할 이유는 뭔가. 그런 주장은 남녀차별과는 상관이 없다. 결혼관계 자체가 취업과는 달리 여성억압적인 것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면 페미니즘은 그 자체가 가정파괴를 기본적 목표로 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그게 아니라서 페미니즘이 결혼 관계가 아니라면 결코 성적인 접촉을 하지 말자는 운동이 된다고 해보자. 이러니 저러니 말이 많아도 결혼과 가정의 가치는 훨씬 더 높게 평가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세상의 페미니즘은 그 논리가 뭐건 간에 항상 성해방을 말하면서 혼전섹스를 옹호하는 쪽이 많다. 그것이 해방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옳은 주장일 수도 있지만 그 이유가 뭐건 간에 결과적으로 결혼의 인기는 그 덕분에 줄어들었다. 그리고 가정문화의 파괴가 여성의 사회적 안전과 지위를 향상시키는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우리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여성들, 임신중절로 몸에 상처입는 여성들이 뭘 말해 주는가? 성에 개방적인 젊은 여성들이 늘어나는 것이 여성해방일까? 바람둥이 남자들의 희망사항이 아니고?

 

내가 섹스를 따로 언급한 것은 그것이 인간의 본능이기 때문이다. 즉 문화 이전의 감정이고 욕망이다. 하지만 물론 인간의 문화적 동물이므로 그와 긴밀히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확실히 다른 문화의 문제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앞에서 직장이 주는 경험의 다양성을 강조한 바 있다. 우리가 뭔가를 할 때는 단순히 보수가 얼마다가 아니라 그 일이 주는 다양한 체험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거듭말하지만 결혼 생활이란 예전에는 성생활과 출산 그리고 육아를 의미했다. 오늘날 이런 관련성은 크게 흐려졌고 그 결과 결혼생활이 제공하는 체험의 다양성은 크게 줄었다. 연애하면서 섹스하는 일이 흔한 사회에서 결혼은 그저 속박으로 가는 길로만 보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는 곧잘 내가 최초로 우리 아이의 학교 운동회에 참석했던 날에 대해 이야기하고는 한다. 내 아이의 부모로서 운동회에 참석하면서 나는 새삼 아 내가 한 아이의 부모구나하는 것을 실감했으며 운동회를 처음 가본 것은 아니지만 운동회를 참석하는 새로운 경험을 한 것을 신기해 했던 것이다. 우리는 아이의 친구를 만나고 그 친구의 부모들과도 인사를 하고는 했다. 아이의 선생님도 학부형으로 만났다. 바로 이런 느낌이나 경험이 우리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해준다. 이런 것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세계다. 그런데 이제는 결혼을 해도 알기 힘든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나만 해도 7남매 8남매가 흔하던 예전의 가정의 분위기가 어땠는지는 상상하기 힘들다. 아이를 낳지 않고 둘 다 직장에 나가는 사람의 결합이 비판받을 일은 아니지만 전통적 의미의 가정이 주는 뭔가는 거기에 별로 없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결혼은 사교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오히려 꼭 해야 하는 것이며 젊어서 보다 나이가 들어서 더 중요해 지는 면이 있다. 취미건 오락이건 이런 저런 인간관계를 잘 이어가고 친구도 많은 사람이어야 만이 결혼하지 않고도 나이들어서까지 문제없이 살 수 있다. 그렇지 않고 비사교적인 사람이 혼자 살기 시작하면 그 사람은 직장의 부품처럼 되거나 고독사하기 쉬운 외로운 히키고모리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 또한 같은 사람의 사교성도 젊어서와 나이들어서가 다르다. 젊어서는 독신으로도 좋은 삶을 살기가 쉽지만 나이가 들면 앞에서 말한 것처럼 탁월한 사교성이 있지 않으면 독신으로 살기가 어려워 진다. 확실히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힘들지만 아이를 키우는 일은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와 우리를 연결시켜준다. 그리고 어느 정도 부모로서의 할 의무를 다했다면 대단한 효도를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나이가 들었을 때도 나와 강력한 관계를 가지고 이어진 존재를 가지게 해 준다. 즉 덜 외로운 노인이 되는 것이다. 노인복지의 첫째는 젊은 사람들과 인간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야 새로운 세상에서 생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고립되어 외로운 노인은 현대사회에서 매우 위험하고 무력하다. 세대간의 연결은 아이에게도 청년에게도 노인에게도 모두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정파괴는 그래서 사람들을 외롭게 만들고 있고, 말하자면 노후 대비를 포기하고 젊어서 즐기자는 주장과 비슷한 것이다. 

 

요즘 결혼이 인기가 없어지는 것은 뒤집어 말하면 요즘 사람들은 전보다 훨씬 더 사교적이 되어서 그렇다. 다시 말해서 혼자 살아도 심심하지 않을 것들이 세상에 늘어나니까 가정의 따스함없이도 살 수 있다고 사람들이 생각하게 된 것이다. 사실 직장도 그렇지만 결혼도 한다고 해서 무조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위험이 있고 노력이 있어야 결과가 나온다. 결혼만 한다고 해서 그 이득을 수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요즘의 핵가족에서는 배우자나 아이들과 지내는 시간도 짧고 화제의 다양성도 부족하며 그러다 보니 더더욱 서로간의 공통점을 찾기가 힘든 경우가 많다. 서로가 아는 이야기를 한다고 해도 새로운 이야기가 별로 없으며 서로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관심이 줄어드는 경우가 생기기도 쉽다. 부모는 자식에게 그저 돈주는 사람일 뿐이고 직장에서 돈벌어 오는 사람은 돈버는 사람, 가정일 하는 사람은 가정부나 다름없는 것처럼 되기 쉽다. 이건 꼭 돈이 없어서가 아니다. 이건 돈이 있으면 있을 수록 오히려 더 그렇다. 아쉬운 게 없으니 고마움이 오히려 더 줄어든다. 외식은 상상하기 힘들고 어느 날 고기라도 구우려고 하면 가족들이 모두 꼭 모여서 같이 식사를 하는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가족간의 정은 깊어진다. 가족이 모두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힘을 합치는 경험은 가족이 가족이기 위해 소중한 것이다.  

 

그래서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일까 말아야 하는 것일까? 오늘날 한국인이 사는 모습은 정상일까 비정상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것같다. 하지만 이런 질문들은 대개 기준점 설정이 잘못되어 있다. 예를 들어 결혼은 해야 하는 것일까라고 묻는 것은 자신이 결혼이 뭔지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어떤 걸 결혼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둘 다 시간을 대부분 직장에서 보내고, 결혼해도 경제적으로는 분리되어 있으며, 서로 되도록 간섭하지 않고 자유를 주며, 아이따위는 낳지 않고 자유롭게 사는 것? 

 

우리는 우리가 뭘 원하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법적으로 유부남 유부녀가 되는 것이 목적은 아닐 것이다. 결혼이라는 계약으로 종신 노예 하나 만들자고 하는 것도 아닐 것이고 스스로 노예가 되고 싶지도 않을 것이다. 서양에는 동거하면서 아이까지 낳고 그 아이를 키우면서도 혼인신고는 안하는 부부도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결혼안한 사람이라고 부르겠지만 나는 어떤 관점에서는 그들이 다른 누구보다도 결혼한 부부라고 생각한다. 단어에 휘둘리면 본질은 다 빠지고 법규정 한줄에 매달리게 된다. 

 

오늘날 결혼이 인기가 없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생기면 결혼은 하는게 좋다. 그렇다. 이건 대박날 아이템이 있으면 사업은 하는게 좋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하지만 일반론적으로 직업이 우리를 구원하고 결혼이 우리를 지옥으로 떨어뜨릴 것이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직업도 직업나름이고 결혼도 결혼나름이다. 우리는 좋은 직장만 쳐다보고 거기에 들어가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한다. 그러면서 노력도 안하고 저절로 좋은 가정이 만들어 질거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안되면 실망하며 결혼 제도 자체가 문제라고 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나는 반드시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것은 개인의 선택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만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결혼을 그저 형식뿐인 것으로 만들고 그것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투자하고 노력하고 계획하는 일이 없다면 결혼도 우리에게 돌려 줄 것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 글의 문맥에서 개인적인 몇가지 조언으로 이 글을 마치자면 이렇다. 돈의 가치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과의 결혼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혼은 돈에 관련된 것의 반대에 있기 때문이다. 직장에서의 즐거움에 깊이 빠진 사람, 친구좋아하는 사람과의 결혼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은 앞으로 만들어질 가정안에서 즐거움을 만드는데 집중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적인 자극과 프리섹스 사상에 공감했던 사람과의 결혼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여러 다른 사람과의 성관계와 성적인 자극을 즐겼던 그 사람이 꼭 결혼후에 불륜을 저지를 것을 걱정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에게 있어서 결혼이란 이미 새로움과 신비성이 많이 없어진 상태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법적으로는 첫번째 결혼이라도 당신은 사실상 마흔두번째 신부나 남편일 수 있다. 투자와 노력은 힘든 것이지만 그런 것이 있어야 결과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결혼은 도장을 찍는 순간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둘이서 같이 짓는 집같은 것이다. 편한 길만 좋아하는 사람은 좋지가 않다. 창의적이고 비사교적이며 나에게 집중해 줄 수 있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그런 사람이어야 결혼생활을 오래 오래 즐거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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