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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by 격암(강국진) 2019. 3. 17.

19.3.17

오랜만에 라디오를 틀어 놓으니 흔한 연애상담을 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그 상담내용을 듣다보니 나는 그 이야기를 나라면 좀 다르게 말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의 끝에서 결국에는 이런 문장을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일단 그렇게 되고 나니 나는 이와 짝이 되는 반대의 문장도 떠올릴 수 있었다. 그것은 이렇다.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것이고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우리는 흔히 많은 일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흔히 쓰는 감기약처럼 일종의 표준적인 사회 문제 해결책으로 여겨지므로 여기서는 이 문장을 감기약 문장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성인의 나이가 된 사람들은 서로 의견이 다를 때 종종 이 감기약 문장을 말하면서 그것으로 문제를 회피하려고 한다.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것이고 이것은 취향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나 실은 감기약 문장은 약이라면 그다지 잘 듣지 않는 약이다. 그 문장의 기본에 딸린 가정은 두 사람이 서로 독립적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 어른은 독립적인게 당연한가? 내 옆자리에 앉아서 떠드는 학급친구와 내가 어떻게 독립적인가. 떠들고 싶은 사람은 떠들고 조용히 하고 싶은 사람은 조용히 하면 공평할까? 부모와 자식이 어떻게 독립적인가? 부모는 자식을 키우기 위해 많은 일을 하는데다가 문제가 생기면 가족은 서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데 무슨 독립인가? 연애를 하거나 결혼을 한 두 사람이 말다툼을 하면서 우리는 기본적으로 서로 독립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면 그게 말이 될까? 그건 마치 같이 춤을 추는 사람이 각자 자기 취향대로 춤을 추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모순적인 이야기가 아닌가? 감기약 문장은 사람들은 좋건 싫건 서로 얽혀 있다는 현실을 지나치게 단순하게 무시해 버린다. 마치 그런 걸 지적하는 것이 구질구질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사실 상상이상으로 자주 그런 태도는 일종의 착취 구조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너는 너하고 싶은대로 조용히 해라 나는 나하고 싶은 대로 떠들 것이다는 식이 된다는 것이다. 

 

싸우기 좋아하는 미친 사람이라면 몰라도 누군가와 의견의 차이를 가지고 다투는 일이 있다는 것은 그 두 사람이 서로의 영향을 느끼고 있다는 뜻으로 이렇게 보면 그 다툼과 분쟁의 핵심은 바로 그 두사람이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게이 결혼에 반대한다고 할 때 그 의견이 옳은가 틀린가는 둘째로 치고 그 사람이 자신은 잘 알지도 못하는 게이의 결혼에 반대한다는 것은 그 결혼이 자신에게 어떻게든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만약 어떤 한국인이 조선은 일본에 정복당해야 마땅하며 한국인은 열등하다는 주장을 펼친다고 하자. 그걸 듣는 다른 한국인들은 화가 날 것이다. 그럴 때 그 사람이 이건 그저 취향의 차이며 우리는 그저 다른 것 뿐이니 서로를 인정하자고 하면 그 말에 그저 아 그렇구나 하고 그 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생각할 한국인이 얼마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감기약 문장을 남용하고 그것으로 문제를 회피하거나 심지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까지 생각하는 일이 많다. 이 일에는 한가지 관련된 태도가 있다. 그것은 인간은 마치 18살이나 20살이 되면 저절로 완성되는 것이라고 믿는 태도다. 아무래도 태어날 때 부터 인간이 완성되었다고 말하기는 힘이 든다. 그러니까 우리는 대개 3살먹은 아이가 편식하지 말라는 아빠에게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것이고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 라고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법적으로 성인이 되면 그때는 갑자기 우리는 모두를 완성된 존재처럼 취급하기 시작한다. 그때부터 우리는 지나치게 자주 우리는 그저 서로 다른 것이고 이것은 취향의 문제다라고 말하기 시작하며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사회는 이 감기약 문장을 거의 세뇌하다시피 반복해서 가르친다. 

 

이것은 아마도 권위주의나 전체주의에 대한 반감때문이라고 생각되며 따라서 어느 정도 정당화되는 것이기는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무슨 공식외듯이 어떤 문장을 외우게하고 사람들에게 그것을 세뇌를 시키는 것이 진정한 계몽으로 가는 길이고 진정 좋은 사회를 만드는 길이 될 수는 없다. 

 

감기약 문장의 문제는 우리로 하여금 완성되는 인간의 길을 잊게 한다는 것이다. 나는 반드시 어떤 인간이 다른 인간보다 완성되었다고 말할 객관적 기준이 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모든 젊은이들이 노인들을 본받고 따라하기를 권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런게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외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적으로 지금과는 다른 어떤 인간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내적으로는 변할 게 없고 거기에 단지 돈이나 명예나 지위를 얹는다는 식의 인식이 아니라 내적으로 우리를 바꾸고 싶다는 욕망을 우리는 적어도 조금씩은 누구나 가지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수도의 길을 완전히 잊어버리게 할 때 우리는 어린애 같은 사람들로 세상을 가득 채우게 되지 않을까? 왜냐면 세상이 지속적으로 너는 이미 내적으로 다 성장해서 다른 사람과 그저 다를 뿐이라고 말하니까 말이다. 

 

현대사회에는 형이상학적이고 가치관적인 것은 잊혀지고 물질적인 것만 남아 있다. 우리는 감기약 문장같은 것을 남용하면서 문제를 회피하지만 그 결과 문제는 누적되어 세상은 점점 선생님없는 유아원이나 초등학교 교실처럼 되어간다. 다들 멋대로 굴면서 싸움이 나면 감기약 문장을 말하고는 하는 것이다. 

 

인간은 정도의 문제가 있을 뿐 위선적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대개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어떤 의도를 가진다. 그것도 하나 이상의 의도를 말이다. 젊고 예쁜 여성에게 젊고 예쁘다는 말을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지만 정도 이상이 되면 그것도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예를 들어 대학원에서 어떤 여성이 박사과정에 있다고 하자. 남자들이 그 여성을 볼 때마다 그 미모에만 신경을 쓰게 되면 그 여성은 한 연구자로서의 정체성을 키우기가 힘들어 진다. 발표를 하거나 토론을 할 때 그런 이유로 너그러운 대접을 받는 것은 못생긴 외모때문에 차별을 받는 것 이상으로 나쁠 수도 있다. 그녀가 어떤 노력을 하고 어떤 결과를 뽑아도 사회는 그녀가 그것을 그 예쁜 얼굴로 만들었다고 믿고 종국에는 진짜 책임과 능력을 요구하는 자리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선입견을 가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쁜 여자 대학원생에게 예쁘다 예쁘다하고 너무 자주 말하거나 너는 여자가 화장도 안하고 얼굴이 그게 뭐냐고 말하는 것도 의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당신은 박사과정학생이 아니라 여자로 남으라는 의도다. 

 

생각해 보면 현실은 이런 미묘한 선택과 행동으로 가득 차 있다. 가진 걸 자랑하려는 행위, 지역감정으로 사람을 차별하려는 행위, 나이나 지위로 다른 사람을 억누르거나 이용해 먹으려는 행위, 자식에게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부모의 뜻을 전달하는 행위, 시어머니를 압박하여 더 많은 것을 얻어내려고 하는 행위등 무수한 행위들이 있는데 정도의 문제일 뿐 우리는 100% 순결하게 살 수는 없다.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숨겨진 의도들이 있다. 심지어 우리가 그걸 자각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감기약 문장을 거의 세뇌하듯 가르치는 시대에 그 말의 반대에 해당하는 말은 악마적인 금기어처럼 들리게 된다. 그것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분명 이 문장은 독선적이다. 따라서 이 문장도 감기약 문장 이상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장은 타인이상으로 스스로에게 한가지 메세지를 보낸다. 너는 스스로에게 성실했는가. 너는 정말 진지하게 배우고 성장하려고 하면서 살고 있는가. 너는 내적으로 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며 그렇게 되려고 하고 있는가. 그런 걸 모두 잊어버리고 그저 되는 대로 말하고 행동하면서 문제가 생길 때마다 감기약 문장을 남용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 모든 생각은 연애상담에서 시작되었다. 연애를 어떻게 하는가에 정답은 없다. 사람들의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연애의 규칙같은 것을 찾지만 연애에는 규칙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규칙일지 모른다. 그러니까 오늘 어떤 일을 허용했다고 해서 그 일을 허용하는 것은 규칙이라는 식으로 규칙에 따라서 하는 것이 연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규칙은 현실적 필요성이 분명히 있지만 때로 연애의 핵심은 바로 그 규칙을 깨는 순간에 있기도 하다. 규칙을 깨면서도 믿고, 규칙에 따르면 그럴 필요가 없는데도 더 많은 것을 하는 거 그게 연애가 아닌가? 그렇다고 규칙없이 뭐든지 믿어달라고 한다던가 언제나 더 많은 것을 규칙처럼 요구한다면 그게 연애가 될 수 있을까?

 

나는 맞고 너는 틀리다. 이런 문장을 때로 생각하면서 우리 조금 더 인간적이고 조금 더 성장한 진짜 어른이 되려고 하면서 살자. 성장하기를 포기한 순간은 어떤 의미에서 내적으로 죽는 순간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요즘은 그런 개념조차 희박한 것이 현실인 것같다.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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