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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도락 단상

by 격암(강국진) 2018. 2. 27.

얼마전 이틀정도 식사를 하지 않은 적이 있다. 명절에 과식을 한 탓이다. 그런데 그렇게 짧은 단식을 하다보니 새삼 드는 생각이 배가 고프다 안고프다는 문제를 떠나 먹는다는 것이 참 중요한 거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대개 사람이 먹는 것에 집착하면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 하지만 외식을 한다거나 뭔가 맛있는 것을 준비해서 먹는다거나 혼자서 혹은 아는 사람들과 술과 안주를 마련해서 먹고 마시는 것이야 말로 살면서 즐기는 여러 즐거움 중에서도 중요한 즐거움이 아닐까? 식문화라는 말도 있거니와 먹는 다는 것은 단순히 생존을 위한 것이 아니며 우리 삶의 중요한 한 부분인 것이다. 




이런 생각 자체야 아주 흔한 것이지만 나는 바로 '사람이 먹는것에 집착하면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다'라는 부분에서 껄끄러움을 느꼈다. 그건 왜 그럴까. 그건 당연한 것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면 세상은 이런 기준으로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비판을 가볍게 무시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런 비판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그 중간도 많을 것같지만 실은 중도파는 생각보다 적다. 이것은 먹는 즐거움을 높이 평가한다는 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즉 그것은 삶의 의미와 방식을 결정하는 문제이며 종류가 다른 삶의 즐거움들은 서로 충돌하는 경향이 있다. 


대체적으로 보편적 질서나 법칙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찾는 사람들은 금욕적인 경향이 있고 그 결과 미각을 포함한 다른 감각의 자극을 절제하는 경향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종교적인 사람들인데 그런 사람들은 인생의 의미를 신과 신이 이 세상에 만들어 낸 질서속에서 찾는다. 사실 이 말들은  '종교적'이라는 말의 정의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종교가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대개의 종교는 추상적인 교리를 가지고 있다. 계율을 지킨다던가, 세상의 법칙이 존재한다던가 하는 것이 다 추상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추상적인 관념에 집중하는 사람이 먹는 즐거움을 추구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온 몸의 감각을 제거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 종교인이 기도를 해도 금식후에 기도하는 것을 종종 보지 않는가. 참선은 온 몸의 감각을 제거하는 행위처럼 보인다. 이슬람 교도들은 매년 라마단이라는 금식기간을 가진다. 


이것은 종교의 문제만도 아니다. 과학이나 철학에 관심이 높은 사람들도 그렇다. 인간의 이성이란 상당 부분 문자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문자란 당연히 시각적 매체다. 어쩌면 그래서 일지도 모른다. 종교적 각성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달으려는 종교인 만큼이나 문자를 통해서 진리를 깨닫고자 하는 사람들은 시각과는 다른 감각에 집중하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걸 권장하는 경우가 적다. 유일한 예외라면 아마 클래식 음악 정도일 것이다. 나는 이것이 우리가 뇌의 어느 부분을 자극하고 쓰는가 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의 이성이나 학문이 얼마나 시각적인가를 알 수 있는 한가지 사실은 과학적으로 말했을 때 미각이란 환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점이다. 미각이나 후각이란 특정한 분자구조에 반응하는 수용기관이 신호를 보내는 능력을 말하고 촉각이란 온도와 압력에 반응하는 기관의 능력을 말한다. 분자단위로 가면 거기에 있는 것은 그저 입자의 움직임이다. 우리는 대체로 움직임을 시각적으로 느끼니 우리는 결국 대체로 시각적 개념만 남기고 다른 감각을 모두 환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았을 때 우리가 미각에 집중해서 인생의 진리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자연스레 허구처럼 느껴지게 된다. 만약 인간이 미각밖에 없는 생명체인데 학문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면 이것은 달랐을 것이다. 음식의 맛을 분별하지 못하는 인간은 몰상식하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인이나 과학자나 철학자는 비만인 사람이 없다는 말인가? 물론 그렇지는 않다. 무엇보다 단순히 많이 먹는다는 것은 먹는 것을 삶의 중요한 즐거움으로 여긴다는 것과는 다르다. 아주 많은 사람들은 실은 자기 학대의 방식으로 많이 먹는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것이 좋은 예일 테지만 맛도 모르면서, 맛이나 음식의 형식에 아무 관심도 없으면서 음식을 많이 먹는 사람도 많다.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이 폭식증에 걸려서 음식을 많이 먹을 때 그들은 식사를 즐기고 있다기 보다는 음식을 일종의 마취제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우울증환자에게 아이스크림은 약이지 삶의 즐거움을 주는 도구가 아니다. 진짜로 먹는 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낀다면 그들은 더이상 우울하기를 멈출 것이며 따라서 우울증때문에 먹는 것을 멈출 것이다. 안풀리는 문제때문에 괴로워서 술을 마시고 있는 대학원생이나 날마다 라면만 먹고 있는 교수는 지금 인생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있는게 아니다. 


대체로 감각적 행동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 사람들은 식사를 중요한 의식처럼 여긴다. 파스타를 먹거나 고기를 구워먹거나 해도 아무 것이나 아무렇게나 먹으려고 하지 않는다. 한국인이나 중국인은 전통적으로 이랬기 때문에 돈이 없어도 식사를 할 때 간단하게 하는 것을 무슨 큰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반찬도 없이 밥을 먹으면 안된다거나 국수를 먹는데 그냥 면과 국물 뿐이면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를 피우는 사람들도 있다. 이때문에 한식은 대개 준비하는데 시간이 아주 많이 걸린다. 식빵잘라서 땅콩버터 바른 것을 도시락이라고 생각하는 한국 사람은 별로 없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감각에 집중하는 사람들을 종종 그저 쾌락을 쫒는 사람으로 비하하고는 한다.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게 그렇지도 않다. 예를 들어 감각에 집중하는 것과 가족에게 집중하는 것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의 정이란 게 무엇보다 미각과 촉각과 후각의 문제이기 때문일까? 내가 시인이라면  분명히 그렇다고 할테지만 나는 과학도이므로 그렇게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개인주의자적인 성향이나 논리적인 사람이 정이 없어 보인다는 지적을 받는 것등은 사실은 지금까지 내가 말한 감각적 절제와 관련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다시 말해 감각기능과 깊은 연관이 있어 보인다는 것이다. 


정리해 보자면 우리는 타고난 재능때문에 혹은 후천적인 교육과 자신이 선택한 방식때문에 어떤 감각기관을 편애하는 경향이 있다. 말하자면 어떤 사람은 시각적이고 어떤 사람은 촉각적이며 어떤 사람은 청각적이다. 그런데 소리를 잘 듣고 싶으면 우리는 눈을 감거나 눈을 움직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어떤 감각기관에 집중하고 싶으면 다른 감각을 억제한다. 이것은 왜 우리가 어떤 종류의 삶의 즐거움을 추구할 때 그와는 다른 종류의 즐거움을 피하는 경향이 있는가를 설명해 준다. 


삶의 의미나 즐거움이 어떤 감각 능력과 연관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삶의 즐거움을 골고루 누리기 어렵게 만들고 특정한 감각들을 계속해서 억눌러야 한다고 느끼게 만든다. 당신이 철학책이나 종교적 서적안에서 진리를 찾아 헤맬때 당신은 당신의 미각이 둔해지면 둔해질 수록 집중하기 좋다고 느낀다. 당신이 독서에 집중하고 싶다면 당신은 자연스레 가족과 떨어져서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으려고 한다. 


단기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다. 즉 당신이 독서를 하거나 명상을 하려고 하면서 배우자의 몸을 더듬는 일을 동시에 하는 것은 바보같은 행위다.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동시에 스마트폰으로이메일을 계속 읽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문제는 우리가 우리의 행동을 습관으로 만들고 문화로 만들고 나아가 인생의 의미와 즐거움을 찾는 방식으로 구성할 때 나온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의 감각에 집중하고 다른 감각을 비난하기 쉽다. 그것은 마치 클래식음악만 듣는 사람이 팝음악이나 가요를 듣는 사람을 깔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어떤 것에 집중하건 그곳에는 평범한 인간인 우리에게는 평생 다 알 수 없는 무한한 세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결코 최종적 진리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그냥 갈 수 있는 만큼만 간다. 종교적 진리를 깨닫기 위해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을 등진다던가, 학문적 발견을 위해 평생 공부하는 것은 훌룡한 선택중의 하나일 수는 있지만 언젠가 그것이 끝나버리고 그 다음에 다른 일을 하게 되는 때는 오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인생의 즐거움이 반드시 더 깊이 있고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철학책을 읽는 것이 호떡을 잘 굽는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반드시 더 심오할 이유는 없다. 원칙적으로는 뭘하던 그걸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있다. 물론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문명을 발달시켜서 그렇고 그 문명속에서 추상적인 관념을 엄청나게 누적시켜 왔기 때문이다. 책을 읽고 학문을 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권장할 만한 것이기는 하다. 우리는 앞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길을 갈 수가 있다. 어쩌면 호떡을 잘 굽기 위해서도 커피를  잘 만들고 된장찌개를 잘 끓이기 위해서도 당신은 종교를 가지고 여행을 하고 철학책을 읽고 수학을 공부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남이 남겨 놓은 기록은 타인의 체험의 일부에 불과하다. 일찌기 장자는 천도편에서 이 점을 강조해 놓았다. 제나라 환공이 성인의 글을 읽고 있었는데 마루 아래에서 수레바퀴를 만들고 있던 윤편이 환공에게 뭘하냐고 묻는다. 환공이 죽은 성인의 글을 읽고 있다고 하자 윤편은 그렇다면 환공께서는 옛 사람의 찌거기를 읽고 있군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놀라는 환공에게 윤편이 말하기를 자기도 바퀴깍는 방법을 아들에게 가르치는데 그 비결을 알려줄 수 없어서 아직도 이렇게 직접 바퀴를 깍는다고 말한다. 그러니 성인이 글로 남긴 것도 찌꺼기가 아니겠냐는 것이다. 


청각과 미각과 촉각은 시각보다 더 직접적이다. 어쩌면 우리가 식도락을 폄하하는 것은 진짜 체험을 폄하하면서 타인의 찌꺼기를 자랑스러워 하는 것일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모든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니 책을 읽고 있는 것이 맛있는 청국장을 정성스럽게 만드는 것보다 반드시 더 고상한 일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부질없이 남의 이야기만 줄줄 외우면서 자기 몸을 학대하는 것보다는 가족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같이 하는 삶을 사는 것이 진짜 삶의 즐거움을 아는 것일 수 있다. 적어도 이런 가능성을 기억해야 우리는 부질없이 인생의 즐거움을 억누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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