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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미와 우리안의 공포

by 격암(강국진) 2018. 2. 25.

몇일 지난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를 봤다. 이번 방송의 시작에서 강유미는 국회법사위원장인 권성동의원을 포함한 국회의원들을 찾아갔다. 그들은 강원랜드 취업청탁의혹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강유미는 그들에게 꽃을 들고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묻는다. "얼마나 꽂아주셨나요?"


이러한 강유미의 행동은 그걸 시킨 김어준은 물론이고 같이 방송을 진행하는 다른 사람들조차 어쩔줄 모르게 만든다. 고백하자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역시 그저 보통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그랬을까? 왜 그들에게 직설적인 질문을 한다는 것이 나에게도 심지어 김어준같은 사람에게도 그렇게 어색하고 조마조마한 일이었을까. 


우리의 반응은 강유미의 행동 그 자체때문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같은 행동을 자기 나라의 정치인에게 하는 외국 코미디언을 보게 된다면 그것이 설사 트럼프같은 고위직이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저 미소짓는 정도의 반응을 보였을 뿐일 것이다. 외국까지 갈 것도 없다. 우리는 한국의 기자들이 노무현이나 문재인 같은 사람들에게 질문을 던질 때는 그들이 전두환, 이명박, 박근혜 같은 사람들 앞에서 질문할 때와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제왕적 대통령제 운운하지만 사람들은 노무현이나 문재인 같은 대통령에게는 무례하고 직설적인 질문을 던져도 처벌받지 않으며 보복당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제로 노무현에게 공개장소에서 학벌따지던 검사도 잘먹고 잘살았다. 그러므로 기자들은 한가하게 문재인대통령에게 가서 자기 기사에 달리는 댓글 좀 처리해 달라는 말을 대통령에게 하는 질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온 세상이 이명박이나 박근혜나 이재용에 대한 의혹으로 가득 차 있어도 그들을 만나러 가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간혹 만나도 질문도 못던지는 기자들이 말이다. 


이 모든 것은 공포때문이다. 강유미의 행동과 우리의 반응은 여전히 우리 안에 권위주의에 대한 공포가 뿌리깊게 남아있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알려준다 권성동의원같은 사람을 포함한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법을 무시하면서 공포통치를 해왔고 어느 정도는 지금도 그렇다. 정권이 바뀌었다지만 사실 지금도 한국사회는 상당부분 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삼성 이재용재판이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박근혜 정권때 존재하던 블랙리스트는 사실 지금도 다 없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의 눈밖에 나면 알게 모르게 차별받을 거라는 생각은 우리 사회에 여전히 있다. 그리고 별거 아닌 차별도 개인적으로는 큰 상처를 남긴다. 어떤 연예인은 그냥 댓글 하나 썼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서 전성기를 허송세월로 보내야 했다. 나쁜 사람으로 찍혀서 고생했던 공무원이 길고 긴 세월 후에 명예회복된다고 해도 그 인생이 다 보상될리가 없다. 이 세상에 자기도 이유를 모르고 허무한 이유로 취업에 실패하거나 지원이 끊긴 사람들은 얼마나 많겠는가. 반면에 세상 사람들이 경악하도록 삼성에 유리한 판결을 내렸던 판사들은 지금도 잘먹고 잘살고 있다. 양승태 전대법원장도 그런 경우였다고 한다. 


박근혜나 전두환이나 이명박이 무례하건 예의 바르건 질문 자체를 거의 받지 않는 한가지 이유는 분명히 공포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예의에 맞아야하고 사람들은 그들을 존중하는 선을 넘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공포의 아우라를 가진 공주는 감옥에 있는 지금도 아직 공포를 뿜어내고 있다. 최순실이 자기도 그럴 수 있다고 착각한 것은 자연스럽다. 다만 그녀는 자기가 비선실세여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모른다는 것을 잊었을 뿐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멱살을 잡혔던 교수는 어리둥절했고 그녀의 딸이 받는 특혜에 이화여대학생들은 더욱 어이가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거를 말할 때 지금은 다른 것처럼 말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몸속에 공포를 가진다. 다만 우리의 일상생활속에서 종종 그 공포를 직시하지 못할 뿐이다. 물속에 있는 물고기가 물을 잊어버릴 수 있듯이, 우리가 언제나 호흡을 하지만 숨쉰다는 행위를 잊어버릴 수 있듯이 우리는 권위주의의 압제 아래에서 태어나고 자라고 살아왔기 때문에 우리 안의 공포를 직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공포를 직시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그저 약간의 노력이면 충분한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왜 특정인들에게만 특별대우가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또는 강유미의 행동같은 것을 보고 스스로 어쩔 줄 몰라하다가 내가 왜 그랬을까하고 한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면 충분하다. 왜 우리에게는 어떤 금기들이 있을까?


우리가 우리 안의 두려움을 직시하지 못하는 이유는 못하는게 아니라 안하는 것에도 있다. 그걸 직시하고 나면 불편하기 때문이다. 일단 공포를 직시하면 그 공포는 대개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게다가 공포를 직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마치 수술로 제거하기 힘든 담석같은 것이라서 단순히 직시한번 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치료를 포기하고 고개를 돌려 버린다. 생각을 멈추고 그냥 저절로 치유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 안의 이 공포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는 먼저 스스로의 공포를 치료해야 할 질병으로 여기는 것이 필요하다. 그것도 타고난 질병이 아니라 세상이 우리에게 준 질병으로 말이다. 한국 사람들은 아주 오랜동안 권위주의적 권력에 의해서 고문을 당해 왔다. 그것은 대부분 정신적 고문이지만 종종 육체적인 고문이기도 했다. 여성의 경우는 성추행의 형태로 나타나는 일도 있지만 남성의 경우에는 그냥 실제로 맞기도 한다. 나는 한국에서 여성의 삶이 쉽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남성의 삶이라고 해서 쉽다고 생각하면 정말 오해다. 왜냐면 남자가 더 다수 인지는 몰라도 여성도 사회적 강자가 많으며 대다수 한국남자는 대다수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사회적 약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권위주의적 시스템안에서 부속품으로 사용되기 위해서 여자이상으로 오랜동안 고문당하고 공포를 주입받았다





남자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남자다워지기를 요구받는데 그게 다 권위주의적 질서에 편입시키는 훈련이다. 그리고 남자들은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대량의 공포를 주입당한다. 군사훈련이나 군대생활동안에 주입되어지는 공포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남성들이 세상에는 이성이 통하지 않는 세상이 생생히 존재하며 그것을 두려워 할 것을 뼈속 깊게 배우게 되는 시간이 군대의 시간이다. 그리고 그 군대를 나오면 남자들은 알게 된다. 바깥 세상도 군대와 다를바가 없다는 것을. 물론 한국남자가 희생자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층층이 계급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누구도 희생자이기만 하지 않다. 미친 놈같던 병장의 권위를 혐오하던 사람도 자기가 병장이 되면 무례한 졸병에게 화를 내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가해자이면서 희생자가 되는 그 시스템에 편입당했을 뿐이고 만약 어떤 사람이 가해자이기를 거부하면 더 많은 가해가 그 사람에게 퍼부어질 뿐이다. 수당도 안주면서 야근하라고 해도 항의도 못하는 한국남자들은 이렇게 만들어져 왔다. 이런 교육때문에 한국남자는 오히려 여자보다도 항의를 더 못한다. 여성을 성적인 대상으로만 여기도록 강제당하고 매춘을 못하면 남자답지 못하다고 비웃음을 사기도 하는 일들도 권위주의적 한국 사회에서는 드문 일이 아니다. 나쁜 남자들은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이다. 


힘없는 사람들이 당해야 했던 모든 갑질이 바로 권위주의적 권력이 행하는 고문이다. 성추행을 당하거나 부당한 갑질을 당하는 것도 고문이지만 그런 것을 보면서 참아야 하는 것도 고문이다. 그런 일들을 보면서 아무 것도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들이 갑질과 추행을 목격하는 사람들에게 고의적으로 가하는 있는 정신적 고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많은 경우 일부러 다른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니들의 주제를 느끼면서 굴욕스러움을 견디라는 것이다. 성추행과 권위주의가 깊은 관계가 있는 것은 그것이 대부분 권력의 과시를 위한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번의 이재용 재판도 온 국민에게 가하는 고문이었다. 사법부는 보란듯이 봐라 삼성이면 다르다라고 세상에 발표했다. 니들이 불만있어도 일은 이렇게 흘러간다라고 하는 것이다. 부당한 재판이었던 한명숙재판을 했던 바로 그 판사가 보란듯이 이재용에게 무한히 관대한 재판을 한다. 그리고 재판후 언론사와 인터뷰를 하면서 이것이 사회가 성숙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게 고문이 아니면 뭔가. 사실 고문의 고통이 너무 커서 이정도면 잠시 공포도 잊어버릴 정도다. 


우리 안의 공포는 그런 고문이 만든 병이다. 우리는 인간이라 고문을 당하면 병이 든다. 그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다. 용감히 전쟁에 나가서 싸웠던 병사들도 정신적 후유증을 겪는다. 그 후유증은 겁쟁이라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직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안의 공포는 전투의 잔해다. 용감했고 부끄러운게 뭔지 알았기에 후유증이 남은 것이다. 진짜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기에 공포를 모르는 사람들이고, 수없이 많은 한국인들을 고문하여 병들게 한 사람들이다. 무식하고 능력도 없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자기 맘대로 부리려고 해서 문제를 만들어 냈던 사람들이다. 


우리 안의 공포는 결코 간단히 치유될 수는 없다. 개인으로서 우리는 누구나 약하다. 우리가 세상에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다. 게다가 고문은 끝난게 아니다. 지금도 고문과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 말하고 행동했는데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되고, 어느새 자신만 혼자 서있는 상황이 될 것같은 현실은 지금도 있다. 1+1이 때로 4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상황은 지금도 있다. 나만 미친 사람인 것같은 상황은 지금도 있다. 치료가 간단히 될 리가 없다. 


요즘 미투 운동으로 성추행을 당했던 과거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랬던 동료를 도와주지 못했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거라고 생각한다. 그럼 지금은 확실히 도와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재용은 그렇다치고 땅콩회항으로 유명해진 조현아도 계속해서 잘먹고 잘사는 것이 현실인데 오늘 이 시각 현재에서 우리는 과연 억울한 동료를 당연히 도와줄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는가? 정말로 그렇다면 그건 이미 우리 안에 공포가 하나도 없다는 증거다. 하지만 과거는 둘째 치고 지금 오늘이 정말 그런 세상인가? 우리 안의 공포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가?


병을 깊게하는 권위주의는 지금도 한국에 가득하다.  성추행과 갑질도 지금 이순간도 계속 일어나고 있다. 과거를 반성하는 것도 좋지만 지금 이 순간의 권위주의와 싸우지 않고 우리가 우리의 공포를 치료해 내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부끄럽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되도 또 반성만 하게 될 것이다. 강유미의 행동은 우리를 다시한번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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