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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에 대한 오해

by 격암(강국진) 2018. 2. 13.

경제적 현실이 인간의 정신을 결정한다고 사람들에게 설득하는데 처음 성공한 사람은 아마도 마르크스였을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 이래 개혁을 물리적 현실의 개선으로 여기는 사람이 많아졌다. 다시말해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나쁜 관습과 사고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절대 개선되어 질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물리적 현실이 우리의 정신을 결정하기 때문에 우리는 무엇보다 임금을 바꾸고 시장에서 지배적 권력을 발휘하는 주체를 바꾸고 삶의 물리적 형식을 바꿔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정신도 바뀌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단순화를 포함하는 유물론 혹은 단순화된 유물론이라고 부른후에 이것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보자. 단순화된 유물론이란 이런 것이다. 어떤 방에 물건이 몇개가 있다고 하자. 의자는 여기, 탁자는 저기, 옷걸이는 이쪽에 있는 식이다. 그런데 그 물건들을 다시 재배치 한다. 의자는 이쪽으로 탁자는 저쪽으로 옷걸이는 또 이쪽으로 하는 식이다. 그 물건들의 위치 혹은 배치에 따라 우리는 그 방이 상태 1에 있다거나 상태 2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방은 우리 사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단순화된 유물론을 믿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말하자면 중간과정이 어찌되건 그 방안에 있는 물건들의 위치가 우리의 현실의 전부이며 결국은 우리의 정신도 결정한다고 믿는 것이다. 의자를 저기에서 여기로 옮기는 과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과정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다. 물질의 이런저런 분포는 이러저러하게 세상을 정의한다. 우리가 개혁을 원한다면 우리가 해야할 것은 세상의 상태를 바꾸는 것 즉 물질을 재배치 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우리로 하여금 개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말아도 좋다는 유혹에 빠지게 하는 의미가 잠재되어 있다. 


단순화된 유물론에는 단순화라는 한가지 요소도 꼭 필요하다. 여기 두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이 두사람은 현실적으로 똑같은 물질적 상태에 있다. 여기서 현실적으로라는 말은 애매하지만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누구나 완전히 똑같은 물질적 상태에 있을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대충 비슷한 물질적 상태에 있으면 행복이나 사고방식같은 관념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비슷한 상태에 이르게 된다고 말하고 싶어한다. 그것이 사회적 현실의 이론적 설명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이다. 만약 원자 하나라도 다르면 두 사람의 행복감은 전혀 다르다라고 말한다면 그건 실질적으로는 물질적 상태가 안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화를 사용한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의 연봉은 그 사람의 정신을 지배한다라고 판단해서 연봉이 비슷한 사람은 사고방식이나 행복감도 비슷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단순화없이는 어떤 이론도 사회적 수준에서 만들어 질 수 없다. 


단순화된 유물론은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종종 오해되고 과장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물론 즉각적으로 개혁에 있어서 과정도 중요하다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어떤 법이나 시스템이 안착되기만 한다면 그걸 실시하게 되는 과정에 있어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결국에는 괜찮아지는 것은 아니다. 세계에는 여러나라가 있으며 어떤 나라의 시스템은 그 나라의 문화와 역사속에서는 잘 작동하는 것같은데 다른 나라에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것은 결국 시간의 문제이며 사람들의 불만을 무시하고 계속 그 시스템을 강요하다보면 어느 나라 사람이나 다 똑같이 살게 된다고 주장할 수 있다. 자기들 역사기준으로 세계를 보면서 자기들이 진보한 사회라고 자처했던 서양사람들도 이런 주장을 곧잘한다. 예를 들어 동양의 어떤 사회는 서구의 역사를 기준으로 했을 때 근대화 이전이므로 후진적이라고 파악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관점에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착각에 빠져서 공산주의 혁명을 하거나 파시즘을 지지했던 것이 아닌가? 


게다가 더 본질적으로 중요한 부분도 있다. 우리가 기계가 아니라 인간인 이유의 핵심에는 자유의지가 있지 않은가? 따라서 객관적 환경이 우리를 완전히 결정한다고 우리가 인정해 버리면 버릴 수록 우리는 인본주의를 파괴하게 된다. 우리는 배부른 것을 좋아하는 인간이 아니라 배를 부르게 만들면 반드시 행복감을 느껴야 하는 인형이나 돼지가 되고 만다. 따라서 단순화된 유물론의 일종인 어떤 이론에 따라서 인간에게 바람직한 시스템을 만들고 그 안에서 우리가 행복감을 느끼지 못할 때 그런 이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잘못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인간이라고 말하게 되기 쉽다. 인간이나 국민을 비하하는 것이다.  그 시스템 안에서 행복하지 못하는 인간을 저주하거나 개조해야 한다고 말하게 되기 쉽다. 독재나 이상주의가 비극을 일으키는 이유는 종종 이때문이다. 우리도 소위 국개론이라고 해서 국민이 개다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 멋대로 이상주의적 민주주의를 추구하다가 시민들에게 좌절한 사람은 이번에는 반대로 인간은 형편없으므로 독재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 것이다. 


누구는 비싼 위스키를 마시는데 나는 값싼 막걸리 밖에 마실 수 없다는 현실에 너무 집중하다보면 값싼 막걸리를 마시면서도 낭만을 즐기고 그 안에서 행복할 수 있는 능력은 무시되고 나는 비싼 위스키를 마실 수 없으므로 불행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기 쉽다. 게다가 누군가가 이 점을 지적하면 이번에는 그런 지적을 하는 사람을 막걸리를 마시던 사람은 계속 막걸리를 마시라는 반개혁주의자나 보수주의자로 비판하기 쉽다. 인간의 행복은 결국 비싼 위스키를 마셔야만 달성된다고 생각되기 쉽다. 


환경은 우리를 바꾸지만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환경의 단순한 노예가 아니다. 선행을 하는 것은 반드시 보상을 바라는 일이 아니지 않은가. 댓가 없는 선행을 할 수 있다는 것이야 말로 우리를 인간으로 만드는 능력이라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은가? 개혁이라는 것이 우리를 완전히 환경 혹은 조건 변수들의 노예로 파악하는 일이 되어서는 우리가 행복해 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을 망각하여 절망하게 만들지 않을까? 


단순화된 유물론이라는 이 사고방식은 널리 행해지는 것이기는 하지만  필연적으로 개혁의 좌절을 예견하게 만드는 것이다. 개혁이란 패러다임을 바꾸는 것이고 소수파가 주류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재의 패러다임은 현재의 시스템을 지켜내기 위해 권위주의적 질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사회적 압력이 인간을 결정해 버린다면 패러다임의 전복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드는 사회안에서 인간이 반드시 이기적으로 변한다면 그런 사회가 이기적으로 살기라는 패러다임을 극복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강고한 현재의 패러다임을 소수의 깨어난 사람들이 뒤집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하는 일은 기성의 관점으로 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오늘날의 사회는 복잡하다. 그리고 점점 더 복잡해 지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개혁을 단순화된 유물론적인 어떤 이론에 기초하여 사회를 새로운 상태로 바꾸는 일로 여기는 것은 더욱 불합리해 진다. 물론 우리는 물질적 상태의 개선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사실 그런 일은 기계가 더 잘한다. 지금 화제가 되고 있는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할수록 물질적 배치의 최적화는 자동화될 가능성이 크다. 목적지를 정하면 길을 가르쳐 주는 네비처럼 인공지능이 자동화할 수 있는 계획세우기를 알아서 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최적화하는 것이다. 그런 시대에 인간이 환경의 함수라면 인간은 무의미해진다. 시스템에 방해만 된다. 자율운전하는 자동차가 발달하면 운전하려고 하는 인간은 위험한 존재가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이렇게 보면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고 개인은 시스템앞에서 앞으로는 더더욱 무력할 것이다. 


그러나 테두리 없는 최적화는 기계가 할 수 없거나 인간보다도 못하는 것이다. 이미 인공지능이 바둑은 인간보다 더 잘두지만 그냥 잡담은 잘 못하는 이유는 잡담하기라는 게임에는 정확한 규칙이 없어서 그렇다. 주어진 테두리 안에서 최적의 답을 찾는게 아니라 테두리 그 자체를 설정하고 어떤 게임의 규칙이 바람직한가에 대해 직관을 발휘하는 일은 인간이 잘한다. 그 이유중 하나는 인간이 행복해 지는 것이 좋은 사회의 기준이라서 그렇다. 기계는 인간이 아니라서 그게 뭐가 좋다는 건지 알기 힘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개혁은 좋은 사회를 꿈꾸는 능력에 대한 것이 되었다. 21세기에는 정답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꿈을 꾸고 그것을 이룩하려고 하는 존재로 계속 남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어쩌면 좌절하거나 만족해 버리지 않고 꿈꾸는 능력이야 말로 포스트 휴먼시대에 있어서 인간의 본질일수 있다. 적어도 세상은 급격하게 빨리 그런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같다. 그것은 달의 무게를 정확히 재는 객관적 수치의 문제가 아니라 같은 난초를 수없이 그리면서도 좀 더 아름다운 난초를 그리려고 하는 예술가의 노력같은 것이다. 예술가는 자기를 잊지 않는다. 예술가는 아직도 만들어지지 않은 명작이 있다고 믿는다. 이걸 잊으면 우리는 다시 과거의 비극과 어리석음을 반복할 것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반개혁적인 사람이 될 것이다.  오늘날 전체주의자가 되지 않는 것에는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 좋은 답이 없어서가 아니라 좋은 답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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