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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온도와 말의 감옥.

by 격암(강국진) 2018. 3. 19.

얼마전에 판결의 온도라는 프로그램을 봤다. 이 프로그램은 과거에 논란이 되었던 재판을 다시 논하는 것이었는데 그때 주제가 되었던 것은 2400원때문에 해직된 운전기사의 해고 무효소송이 패소된 사건이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나는 깊은 인상을 주었던 두가지 말들을 들었다. 몇일이 지났는데도 그것들은 마음에서 떠나지 않고 있다. 



첫째는 판사출신의 출연자들이 '법이란 본래 이런 것이다'라는 식으로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들에 따르면 판사는 중립을 지켜야 하고 재판은 검사와 변호사가 각자 주장을 펼쳐서 논리적으로 이기는 쪽이 이기는 것이다. 언뜻 들으면 이 말이 당연한 것같지만 사실 이런 태도는 재판에서 정의를 찾을 수 있기를 바라는 사람의 기대와는 크게 다른 것이다. 판사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말은 다시 말해서 판사가 자기 상식에 비춰서 기소된 사람이 무죄라는 것을 알아도 지금 변호인이 엉터리 변호를 하고 있으면 그것에만 따라서 변호를 해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점이 많이 있겠지만 나는 오늘 두번째 이야기를 더 하려고 하므로 한두가지만 지적하고 싶다. 첫째로 재판이나 법을 이런 것으로 여기는 태도는 결국 재판을 검사와 변호사의 말싸움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비싼 변호사를 살 수 있는 부자나 법인은 재판을 이길 것이고 법에 대해 잘 모르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길 재판도 질 것이다. 판사를 포함해서 누가 봐도 정의가 어디에 있는가가 거의 확실한 사안에서 말이다. 이걸 어쩔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보통 사람들이 판사에게 기대하는 것과 많이 다를 뿐더러 그냥 세상이 부자나 거대 법인의 천국이 되는 것이 어쩔 수 없으며 그게 법이라고 말하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둘째로 만약 판사가 미국에서 처럼 선거에 의해서 뽑히는 나라였으면 과연 판사가 저렇게 한가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사들은 2400원 핑계로 고용자를 해고하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상식적인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지 않는 판사들은 다음 선거에서 질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란 본래 그런 것이라고 나름 용감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법조인들이 일반 시민들과 분리되어 편안하게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그들은 그들의 궁극적 고용인이 국민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들은 뻔한 편파를 만들어 내는 기계적 중립을 위해서 판사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나는 법조인들이 '법이란 본래 이런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번 들은 적이 있다. 그들은 법이 그런거라고 배웠는지 모르고 일반대중이 무식해서 법이 뭔지 모른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내가 보기엔 무식한 것은 그들이다. 법은 정의를 위한 수단이지 정의가 법의 수단이 아니다. 즉 정의나 상식과 비교했을 때 법이 그와 다르다면 잘못되고 무식한 것은 법과 법조인이다. 본래 법이 이런게 아니다. 법이란 본래 이런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사고에 갇혀서 뭐가 중요한 건지를 잊은 것이 아닐까? 판사가 이 점을 잊는다면 그냥 인공지능이나 프로그램에게 재판을 맡기는 쪽이 더 정의로운 사회일 것이다. 


두번째로 나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2400원이건 2400억이건 횡령은 횡령이라고 말하는 한 출연자의 말이었다. 내가 첫번째로 이야기한 것도 대단히 중요한 것이지만 두번째 이야기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바로 이런 논리가 현대사회에 비극을 만드는 말도 안되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런 생각에 빠져있으며 심지어 재판에서 통용되기도 한다. 


어떤 행위가 횡령인가 아닌가를 따지는 것은 배중률에 근거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법이다. 이름이야 뭐가 되건 이것은 결국 세상을 이거고 저거고 하는 식으로 분류해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어떤 행위는 횡령이거나 횡령이 아니다. 어떤 집은 아파트거나 아파트가 아니다. 사람들중에는 재산에 따라 저소득층, 중산층, 부유층이 있다던가, 사람을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으로 구분한다던가 하는 모든 것들이 다 비슷한 방식이다. 편의상 이것을 여기서는 배중률 논리라고 하자.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이렇게 세상의 것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의 관계에 따라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을 합리적인 사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적어도 과학혁명이 있었던 17세기이래 부정되어 온 것이며 특히 현대사회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이다. 배중률 논리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것은 사물들이 정말로 잘 분류되어 그 구분이 애매한 점이 없을 뿐만 아니라 한가지의 종류로 분류된 것들이 정말로 한가지로 취급되어 질 수 있을때나 그렇다. 예를 들어 수소원자는 산소원자가 아니다. 그런데 적어도 현대사회는 많은 의미에서 이런 곳이 아니다. 


좋은 예가 돈이다. 사람을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둘로 나눠본다고 하자. 그리고 사람들이 정말 가난하여 돈이 있는 사람은 거의 없고 있는 사람도 대개 동전하나 정도 밖에 없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동네가 있다고 하자. 그 동네에서는 돈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구분은 상당히 합리적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엄청난 돈을 가질 수 있을 때 500원이라도 있으면 돈이 있는 사람으로 분류를 한다면 그런 분류는 의미가 없을 것이다. 현대에 배중률논리가 더욱 쉽게 파산하는 이유는 많은 것들이 큰 스케일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있었던 롯데 재벌의 재판에서 그들이 삼성보다 가난해서 처벌받는다는 무전유죄의 말이 나왔다고 하지 않은가? 재벌재판을 보면 1억따위는 아무 가치도 없어 보인다. 그러다가 없는 사람 재판이 되면 빵훔쳐 먹은 것은 죽일 놈이 되는 식이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과학에서 내놓은 해결책은 이분법적 논리가 아니라 수치적 해결이었다. 즉 횡령이다 아니다의 논리에 집중하는게 아니라 2400원가져갔다, 2400억 가져갔다라는 수치에 집중하고 모든 수치의 차이를 다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저 산은 가깝다 멀다가 아니라 정확히 몇미터 떨어졌는지 측정하고 그 거리들을 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현대과학의 태도다. 가깝다 멀다같은 말을 잊어버리고 숫자를 보라는 것이다. 말이나 이름이 아니라 수치가 현실을 파악하는 제대로된 수단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횡령사건에서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숫자는 안보고 이름만 본다. 그리고 그 이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세상의 질서를 지키는 길이며 그 이름들이 현실이고 실상이라고 생각한다. 위에서 말한 프로그램 출연자도 2400원의 횡령도 횡령인데 그걸 처벌하지 않으면 2400억 횡령도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편다. 똑같은 논리를 펴자면 집앞의 슈퍼에 가는 것도 외출인데 그걸 하라고 하라고 한다고 나가서 두부를 사온다면 다음에는 지구반대편인 뉴욕에 가서 두부를 사오게 될테니 나는 집앞의 슈퍼에는 갈 수 없다는 논리가 된다. 사실 달까지의 거리도 38만킬로미터다. 2400원은 2400억의 1억분의 일인데 달까지의 거리의 1억분의 1은 3.8미터밖에 안된다. 3.8미터 외출과 달까지 여행하는 것이 같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데 돈에 대해서 말할 때는 그보다 훨씬 더 심한 일도 횡령은 횡령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나도 여기서는 어쩔 수 없이 말을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말이 아니다. 횡령이라는 말이 실상이 아니다. 실상에 더 가까운 것은 2400원과 2400억이다. 10억을 벌 수 있다면 기꺼이 감옥에 가겠다는 사람이 있고 몸안의 장기라도 뽑아서 팔겠다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천원을 준다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진짜 중요한 것이 숫자라는 것을 실생활속에서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도 편안한 곳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배중률 사고에 빠져서 이건 이거고 저건 저거고 하는 식으로 판단하고 그건 어쩔 수 없다고 까지 말한다. 학칙을 어긴 건 어긴 것이고 훔친 건 훔친 것이다. 자신이 그런 사고의 피해자가 되기전까지는 말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이런 사고가 비현실적이 된지는 오래 되었다. 삼성이나 현대는 모두 법인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법인같은 것을 가지게 되었을까? 여러가지 설명들이 가능하겠지만 결국 거대한 사업체를 어떤 개인의 이름을 걸고 운영하여 그 사업체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개인에게 물면 누구도 무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건 키가 10킬로미터쯤 되는 거대공룡이 서울 도심을 걸어다니면서 교통신호도 어겨서는 안된다고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미 그 시스템에 적응해서 삼성 제품이 고장난채로 배달되도 이재용이나 이건희씨에게 개인적으로 화를 내지 않는다. 욕을 먹어야 하는 것은 삼성이라는 법인이고 시스템이다. 동네에서 제빵사가 직접 운영하는 빵집에서 산 케익이 불량이면 그 빵집 주인을 욕할 거면서 말이다. 


다시 말해 배중률적 사고가 만드는 문제로부터 이미 거대한 자본이나 부자들은 보호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도 배중률적 사고로 따지면 엄청나게 많은 책임을 져야 하는데 그것들은 이제 '시스템의 문제'로 인식된다. 기업체 회장이나 고위급 공무원의 책임이 아니다. 삼성에서 왠만한 사고를 쳐서는 이재용이 재판에 출석하지도 않는다. 시스템이 알아서 대응할 뿐이다. 월급받고 태만한 노동자는 개인적으로 나쁜 놈이지만 월급 안주고 호화롭게 사는 사장은 시스템의 뒤에서 보호받는다.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미투운동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도 많은 사람들은 좋다 나쁘다라던가 성폭력이다 아니다의 이분법적 사고로 옥석을 가리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는 일부러 그것을 가리지 않으려고 하는 언론사들의 파렴치한 행동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뒤에는 나쁜 자본의 힘이 있다. 이때문에 여성문제에 있어서 정작 급하고 중요한 사안들은 가려지고 실질적인 개선은 불가능해 지는 면이 크다. 지금 미투 운동을 지지한다면서 보도를 하는 언론들이야 말로 상당 수가 여성들에 대한 가해자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들이야 말로 미투운동을 싸구려 가쉽거리로 만든다. 진짜 권력을 외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 이순간에도 우리 사회에 심한 일을 당하고 있는 여성들이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는가. 인권이 열악한 곳에서, 지금 이순간에도 당하고 있는 여자들이 있고, 장자연처럼 목숨을 잃은 사람도 있다. 우리의 시선은 그들을 향하고 있는가? 지금처럼 여자 희생자들을 선별적으로 골라서 보도하자면 남자들이 오히려 여성들에게 성폭행 당해왔다는 그림도 얼마든지 그려낼 수 있다. 남자도 인간이지만 여자도 인간이고 세상에는 아주 많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초등학생과 성관계를 가진 여선생의 뉴스도 있었지 않은가. 여자들을 꽃뱀취급하는 것이 폭력이라지만 세상에 꽃뱀이 없다고 누가 그러나. 


나는 남자건 여자건 공격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말에 너무 휘둘리지 말고 말을 더 만들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그 말의 감옥속에서 허우적대고 묶이는 것은 힘없는 대중들 뿐이다. 그 감옥이 강하면 강할 수록 그 감옥에서 자유로운 인간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더 심해지고 그들은 더 자유로워 질 것이다. 2400원 횡령한 버스기사는 해고지만 1조나 10조쯤 돈을 날려먹는 사람들은 출세하는 세상에서 말이다. 실제로 우리는 수년전의 키스 미수사건이나 36년전의 강간미수사건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하는 세상에서 포철이 50조를 당했다던가 거대 언론사 간부들이 삼성에게 아부했다던가 하는 것은 보지 못하는 세상에 살고 있지 않은가?


그걸 알기 때문에 거대 자본들은 더 많이 말을 만든다. 자유를 말하면서 자유를 파괴하고 인권을 말하면서 인권을 파괴하고 미투를 말하면서 여성들을 더욱 더 불평등하게 취급하기 위해서다. 진짜 악의 중심과 싸우기 위해 사람들이 단합하여 상식이 통하는 세상이 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진짜로 전근대적 질서를 지키며 봉건군주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을 공격해서 진짜로 여성들이 더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 오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보다는 누군가는 달에 가도 어쩔 수 없고 누군가는 몇발자국만 움직여도 움직인 건 움직인 거라고 벌줄 수 있는 세상을 만들고 싶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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