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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첨단연구는 무엇으로 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18. 6. 14.

18.6.14

최근 삼성에서 인공지능의 연구를 위해 두 유명 해외 과학자들을 부사장급으로 대우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두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나는 이 기사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일단 삼성에서 인공지능을 연구하기로 했다는 기사를 읽고 나자 내 생각은 다른 곳으로 흐르게 되었다. 그것은 어떤 분야의 연구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하는 것이다. 인력일까? 연구비일까? 시설일까? 뛰어난 지도자일까?

 

좀 낭만적으로 들릴지 몰라도 내가 생각하기에 어떤 분야의 연구가 꽃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열정이다. 즉 그런 연구를 해내겠다는 관심과 의지다. 이 열정의 문제는 냉정한 사업가나 투자가에게는 주관적이며 실체가 없어서 무시해야 할 것으로 여겨질 수 있지만 연구의 경험이 있는 나에게 있어서 열정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보인다. 나는 열정을 무시한 기술에 대한 투자는 실패하거나 위험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며 그 사실이 아래에 내가 쓸 것으로 인해 자명해 보이게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최소한 그것을 고민해 둬야 한다.  

 

열정이란 단어는 매우 개인적으로만 들리지만 반드시 개인적이지만은 않다. 우리는 물론 개인적인 이유로 뭔가에 열정을 가지지만 따지고 보면 개인의 내부세계란 결국 또 그를 둘러싼 사회가 반영된 것이다. 우리가 만드는 것은 그게 무엇이든 아주 자명하지는 않다. 열정이 없는 눈으로 보면 미친 짓으로 보일 수 있고 열정이란 문화적으로 철학적으로 공유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 사람들이 만들었던 거대한 유적들을 생각해 보자. 나는 때로 큰 절이나 교회나 궁궐같은 곳을 보면서 이것들이 얼마나 말도 안되는 일인가를 생각할 때가 있다. 피라미드 같은 유적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간단히 그것을 종교적 믿음이나 과거 국가의 권위라는 말로 설명하지만 그것은 마치 주먹질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전쟁에 대해서 다 안다는 듯이 말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도대체 믿음이 얼마나 강하면 인간은 개인의 의식주를 훨씬 초월하는 일을 이렇게나 지나치게 한다는 말인가. 피라미드같은 거대한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마다 있는 옛 절만 가봐도 오래전에는 지금보다 길도 더 안 좋았을텐데 이런 곳에 절을 만들고 부처상을 만드는 정성은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몽골이 쳐들어 와서 나라가 쑥대밭이 되었는데도 8만대장경을 만드는 정성은 한편으로 감탄스럽지만 한편으로는 불경스럽게도 솔직히 좀 미친 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게 열정이다. 열정으로 만들어 진 업적들은 후대에서 보면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한 결과로 보이기 쉽다. 그것들이 지금 어떻게 보이건 세상을 바꾸고 지킨 것들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시각으로 보면 그것은 완전히 달라 보일 수 있다. 열정을 공유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은 해야 하는 일이거나 할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겠지만 그 열정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건 전혀 계산에 맞지 않는 미친 짓으로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옆의 나라의 불상이나 절이 아무리 거대하고 멋져 보여도 그런 물질적 외향의 아래에 있는 불교 교리에 대한 믿음이 없이 우리나라에도 큰 불상이 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해서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시작해 보면 생각보다 훨씬 돈이 많이 들고 유지가 어려울 것이다. 구경할 때는 별거 아니었는데 진짜 해보면 그런 불상을 만든 사람들이 갑자기 미친 사람으로 보일런지 모른다. 뭘 이렇게까지 해서 그런 걸 만들었을까하는 생각이 들지 모른다.

 

예를 들어 서구 사회가 인공지능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혹시 그들이 그들 문화의 시조로 삼는 그리스가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했기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노동은 노예가 하고 인간은 추상적인 일에 몰두 하는 것이 정상적이며 행복에 이르는 길이라는 관점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인공지능기술의 완성이란 어쩌면 노예 제도의 부활일 수 있다. 모든 인간이 노예들을 거느리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열정을 가지고 추구하고 싶은 미래인가?

 

그게 아니면 인공지능이란 이성주의적 사고의 결과일 수 있다. 우리는 글을 쓰고 기록을 남기고 법을 만들고 긴 계산을 해서 뭘 하려고 하는가? 우리는 논리적이고 합리적으로 세상이 돌아가길 바란다. 그게 공평한 거라고 생각한다. 인공지능이란 세상을 그렇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기술로 볼 수 있다. 교차로에 교통순경을 세워두는 대신에 자동적으로 신호를 잘 바꿔주는 지성적인 기계를 만들어 인간을 그런 잡일에서 해방시키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내가 인공신경망에 대한 공부를 하기 시작한 것은 1991년이었다. 나는 인공신경망에 대한 연구 논문들로 석사와 박사학위 논문을 썼다. 그 이후 내 관심은 인공신경망보다는 뇌에 더 기울어졌지만 본래 계산 뇌과학 분야의 사람들은 대개 양쪽에 다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 연구내용이 생각만큼 그 거리가 멀지도 않다. 인공지능은 정보처리 프로그램이고 계산 뇌과학이란 뇌를 정보처리의 시스템으로 보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제와 돌아보면 그런 나에게 있어서 인공지능이나 뇌에 대한 관심이란 결국 나 자신에 대한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조울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이 어느날 도대체 조울증이란 게 왜 있는지, 내 인생을 뒤흔든 이 조울증이란 것을 이해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에 대한 열정은 도대체 지성이나 합리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나온다. 뇌과학에 대한 열정은 인간의 감정과 기억과 판단이란게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서 나온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이것이 유일한 것은 아니다. 실제로 뇌과학분야는 돈많은 선진국들이 고령화사회로 변해가면서 치매같은 뇌관련질환들이 중대한 사회적 비용을 발생시키는 것때문에 보조를 많이 받는다. 즉 의학적인 이유가 뇌과학 연구의 열정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이런 열정의 근원들이 보여주는 것은 하나의 연구는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폭넓은 참여에 의해서 행해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한 대의 자동차는 그저 한 명의 기술자가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것은 기술자 이상으로 철학자와 문학가에 의해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한 대의 자동차를 만들어 낼 열정을 탄생시킨 것은 결코 단 한명의 기술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며 뒤집어 말하면 그렇게 여러 사람이 만들어 낸 열정과 관점이 아니면 자동차는 제대로 탄생될 수 없었다.  

 

이성과 생명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라, 개인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과 감정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나라는 어쩌면 인공지능의 연구에서 제대로 된 결실을 맺을 수 없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노동자들을 노예처럼 부릴 수 있는 사회에서 뭐하러 새로운 노예를 만들려고 할 것인가? 설사 할 수 있다고 해도 인간에 대한 고민이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 지는 인공지능은 도대체 어떤 기능을 가지게 될 것인가?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이 만든 거대한 종교적 건축물은 돈을 많이 들여도 엉성하여 쓸모가 없거나 더 나쁘게는 애초에 생각했던 목표와는 반대되는 기능을 가지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희생자를 더 만들더라도 운전자의 보험료 부담을 최소화하는 자율운전 자동차를 만들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이세돌과 알파고의 대국이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게 되었지만 여전히 아주 많은 한국사람들은 그냥 대학원생 몇명과 교수 몇명에게 돈 몇십억주면 인공지능 금방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해서 잘 안되면 이번에는 유명한 외국 과학자를 불러다가 지도를 하게 하면 금방 될거라고 생각한다. 이런 발상은 학문의 기초도 되어 있지 않은 후진국에 선진국 문물을 들여올 때 통하던 것이다. 똑똑한 학생 뽑아서 선진국 교과서 열심히 공부하게 하고 선진국 학자 데려다가 좀 가르쳐 달라고 하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그런 시대 말이다. 

 

첨단연구는 그런게 아니다. 그 시작은 열정에 있다. 왜 우리가 그런 것을 원하는지, 누가 열정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것이 그런 열정을 키우고 유지하게 해주는지를 고민하는데 있다. 불행하게도 물질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연구에 대한 열정은 돈이며 따라서 열정의 문제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게 큰 산업이 된다던데, 큰 돈이 된다잖아 그러니까 열심히 하자는 것으로, 돈을 지불하는 것으로 열정은 충분히 나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나라에 신발공장도 없었던 시절 열심히 일해서 1달러라도 더 벌어 고깃국에 쌀밥먹자고 하던 시절에는 그런 말이 열정의 문제를 충분히 해결했는지 모른다. 가족이 굶는데 그들을 인간답게 살게 하고 싶다는 욕망은 숭고한 것이기 때문이다. 첨단연구는 그런게 아니다. 인공지능연구는 그런게 아니다. 이 나라에 설사 엄청난 천재가 나타나서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연구업적을 거의 혼자의 힘으로 만들어 낸다고 하더라도 그런 천재는 마치 이슬람 국가에 태어난 불교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업적은 잊혀지거나 무시당하거나 엉뚱하게 악용될 것이다. 원숭이에게 시속 200킬로로 달리는 자동차를 주는 것은 업적이 아니라 자살을 유도하는 재앙이다. 

 

우리는 여러가지 이유로 열정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 그 시작은 단순하게 우리는 무엇을 더 필요로 하는가하는 질문을 던지는데서 시작된다. 그런데 이 단순한 과정은 여러가지 이유로 왜곡되는데 그중의 하나는 바로 돈이다. 인류의 이득과, 회사의 이득과 나 개인의 이득은 모두 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단순한 질문은 점차로 복잡해 지고 심지어 망각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새 기초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고 그저 월급받으니까 일한다는 식의 태도에 젖어들 수도 있다. 거기서 망각되는 것은 물론 제대로된 열정이다. 

 

열정을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것은 바로 연구 커뮤니티다. 즉 비슷한 관심을 공유하는 사람들의 네트웍이 서로의 열정을 보존하고 더 키우는데 아주 중요하다. 그러니까 노벨상급의 유명 과학자 한명에게 많은 것을 투자하는 것보다 다수의 사람들이 소통할 수 있게 만들고, 그들의 열정을 계속 추구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저변의 확대가 훨씬 더 중요하다. 물론 유명과학자는 열정을 전염시킨다. 그래서 그런 지도자의 존재도 엄청 중요하다. 하지만 첨단연구의 지도자는 스스로 키워져서 나타나야지 수혈되는게 아니다. 

 

예를 들어 인공지능 연구를 제대로 하려면 인공지능에 대한 이야기를 일반인수준에서 전문가 수준까지 모으고 퍼뜨리는 잡지를 발행하는 것부터 해야 할지 모른다. 나는 꼭 딱딱한 기술적 논문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이고 문학적인 상상력이 더 필요하다. 기술자는 물론 인문계 사람들도 인공지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관심을 가지는 가운데 한국에도 인공지능에 대한 대화의 장이 열리고 그 위에서 인공지능에 대한 연구능력이라는 것이 나올 것이다. 저변이 커지면 직업적 안정성도 생긴다. 특정분야가 지금은 인기가 좀 있지만 몇년 지나서 프로젝트 끝나면 미래가 암담하다는 식이면 젊은 연구자들은 불안해서라도 꿈꾸기를 멈출 것이다. 

 

열정이 죽으면 연구는 제대로 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점은 한국에서 지나치게 사소하게 취급되거나 낭만주의자의 헛소리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기술을 지나치게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이 곧 한국 사회의 한계가 만들어 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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