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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게리맨더링과 합리적 판단

by 격암(강국진) 2018. 11. 8.

18.11.8

미국의 메사추세츠주에서 1812년에 있었던 일이다. 당시의 주지사 게리는 공화당후보에게 유리하도록 선거구를 재조정했다. 그러다보니 지도위의 선거구 모양은 기괴해 졌고 그 모습이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샐러맨더라는 전설적인 괴물과 비슷하다고 해서 이런 일을 게리맨더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게리맨더링은 정치적으로 그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지만 나는 그것이 정치를 넘어 합리적 판단이란 주제의 근원에 이르는 가르침을 주는 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게리맨더링과 비슷하지만 좀 더 극단적이어서 사람들이 종종 농담으로 하는 말들이 있다. 그건 이런 것이다. 

 

나는 나보다 뚱뚱한 사람중에서는 제일 날씬해.

나는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인기가 좋아. 

 

이런 말들은 언뜻 들으면 자기가 날씬하다던가 인기가 좋다고 말하는 것같지만 자세히 따지면 너무 당연한 말들이므로 웃음을 이끌어 낸다. 

 

게리맨더링과 이런 농담들은 공통점이 있다. 우리가 만약 판단을 내리는 기초적 집단을 우리 맘대로 조정할 수 있다면 거기서 어떤 결정이 나오는가 하는 가를 마음대로 바꿀 수 가 있다. 따라서 사실상 그런 결정의 의미가 거의 없어진다. 우리가 말하는 합리적 판단이란 통상 이런 인위적인 조작된 환경이 아니라 어떤 보편적이고 자연적 배경아래서 내려지는 판단을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도대체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배경이라는 게 뭘까? 이 세상에 그런게 있던가?

 

한국의 대통령은 한국 사람들이 뽑는다. 그런데 하지만 사실은 19세 이상의 나이를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재외국민은 2009년에야 선거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과는 다르게 아무리 무식하고 나이가 들어도 혹은 화가 나서 이성을 잃은 것같아도 선거권을 가질 수 있다. 사람에 따라서는 유치원생보다 유치해 보이는 경우도 있는데 말이다. 

 

우리는 이런 규정들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러니까 이런 규정들이 있기는 하지만 선거의 결과는 이런 규정들에 크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배경이라는 것이 그렇게 달성하기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그런거라면 선거권을 가지는 나이를 18세로 내리는 일이 왜 그렇게 힘들까?

 

보편적이고 자연적인 배경이란 건 달성하기 어렵고 엄격히 말하면 세상에 그런 건 없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특수한 집단, 특수한 테두리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의미에서 합리적인 판단같은 것은 존재하지않는다. 우리는 절대적인 의미에서 옳은 것을 진리라고 부르는데 그런건 세상에 없다고 봐야 하고 설사 있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이 이해하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세상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으므로 종교적 주장은 절대적이고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진리의 더 좋은 후보는 수학적 진리나 자연법칙일 텐데 사실 수학과 과학조차도 절대진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분야의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다. 유클리드 기하학이 절대 유일의 기하학이 아니며 뉴튼의 역학은 양자역학으로 대체되었다는 예가 가장 유명하다. 

 

여러분이 만약 보다 더 일상적인 예를 생각해 보고 싶다면 내가 이전에 쓴 글인 통계와 존재 그리고 생각의 오류라는 글을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거기서 내가 말했듯이 우리는 너무 쉽게 세상에 평균이 존재하며 어떤 단어를 쓰는 것을 자명한 것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냥 어떤 단어를 만들면 그 단어에 쉽게 노예가 된다. 단어가 있으면 너무 쉽게 세상에 그런게 존재한다고 믿는다. 

 

노빠라던가 빨갱이 같은 말이 좋은 예다. 우리는 이런 말이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노무현을 지지하면 노빠라고 부른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른 이유로 노무현을 지지했고 노무현에게 투표했지만 나중에 지지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빨갱이는 공산주의자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을 맘대로 여행하고 중국과 교역을 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빨갱이는 따지고 보면 공산주의자도 아니다. 우리는 종종 막연히 노빠라던가 빨갱이라는 사람들이 존재하며 그들이 어떤 특성을 공유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런 건 근거가 거의 없다. 그냥 상상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단어를 들을 때 혹은 어떤 단어가 사용되어지는 것을 볼 때 그 단어는 일종의 게리맨더링을 행한다.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빈 허공에 정신적인 테두리를 치고 그 테두리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사실은 곰곰히 생각하면 자신은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데 말이다. 아니 그 말은 애초에 그 의미가 매우 희박한 것인데도 그런 존재가 생생히 있는 것으로 느끼는 것이다. 

 

심지어 한국같은 널리 쓰이는 말에도 이런 문제가 있다. 즉 나는 한국을 사랑한다거나 나는 한국을 발전시키고 싶다라고 말하고 있는 사람들도 한국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다른 의미들을 던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가 최근에 만든 특이한 말이야 거론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런 효과가 강할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에게 팔만대장경은 한국이라는 나라의 보물이며 그 문화적 정체성의 핵심으로서 어떤 희생을 해서라도 지켜야 할 것일 수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에게 그것은 그냥 나무 조각일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나는 것을 아프카니스탄의 탈레반정권에서 생생히 목격했다. 그들은 인류 전체의 보물이랄 수 있는 바미안 유적을 파괴했는데 그들의 종교에 따르면 그것은 가치가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해로운 미신을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탈레반정권과 완전히 다를까? 우리 역시도 모든 것을 보존하고 가치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조선의 왕족이나 양반의 것은 소중히 보존하지만 노비나 평민들의 문화는 상대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사라지는 많은 것들이 어떤 누군가에는 파괴된 바미안 유적처럼 생각되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다. 우리가 말하는 한국이라는 것의 실질적 의미가 뭘까? 한국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까지는 말할 수 없어도 그것은 생각보다 자명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한국 사랑은 누군가에게는 한국파괴로 보인다. 

 

우리는 오래된 도시의 건물을 부시고 거기에 높은 아파트나 상가건물을 짓기 좋아하며 그것을 기꺼이 발전으로 부른다. 오랜동안 존재한 갯벌이나 모래사장을 없애버리는 것을 발전으로 여기며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될 나무와 길을 없애버리고 과거의 흔적이 없는 새 것으로 대체한다. 이 모든 것들도 누군가에게는 굉장한 야만이 될 수 있다. 초라한 부모를 배신하고 다른 더 멋진 사람을 부모로 섬기는 행위가 보통 발전이나 진보가 아니라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지듯이 말이다.

 

나는 모든 것이 다 가치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비록 유한한 존재지만 우리의 판단에 따라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아무 것도 안하고 살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바뀔 것이며 미래에는 우리의 결정이 비합리적이고 야만적인 것으로 여겨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우리의 생각이 진리이며 보편적이고 자연스런 근거에서 나온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으면 알고 있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셀 수 없이 자주 어떤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보편적이고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모른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 우리는 선입견에 눈멀어 있다. 게다가 그런지도 모르고 확신에 차있다. 때문에 합리적 판단은 우리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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