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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정신의 탄생과 과학기술의 비가역성

by 격암(강국진) 2019. 10. 18.

19.10.18

나는 누구인가? 우리의 정신은 어떻게 발달했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 그럴 듯한 답을 찾는 한가지 방법은 한가지 가설을 세우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정신발달은 인류의 정신발달을 반복한다라고 하는 가설이다. 생물에 있어서 개체발생은 계통발생을 반복한다라는 말과 비슷하게 들리는 이 말은 엄밀하게 말하면 사실이 아닐 것이다. 사실 모든 사람은 서로 다르지 않는가? 하지만 이것이 일정부분이라도 진실을 포함한다면 우리는 역사적 기록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인류 정신의 발달을 이해하고 그것이 나라는 개인의 정신적 발달에 대해 중요한 통찰을 줄거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러니까 인류의 역사가 곧 천천히 변화하는 거대한 인간의 두뇌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며 우리 스스로의 뇌와는 달리 역사는 그 안으로 기어들어가 관찰이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노력만 충분히 한다면 우리의 정신에 대해 뭔가 중요한 것을 역사로부터 배우게 될 거라는 기대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인류의 역사를 돌아볼 때 비교적 쉽게 눈에 띄는 사실은 바로 과학기술의 비가역성이다. 여기서 말하는 비가역성이란 일단 어떤 과학이론이나 기술이 세상에 나타나면 그것은 계속 더 발전할 뿐 쉽사리 퇴보하지 않고 적어도 본래의 형태를 유지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철기문명이 다시 석기 문명으로 돌아가는 일도 없고, 뉴튼의 물리학이 나왔는데 몇백년 지나고 나니까 그걸 잊어버리는 일도 없다. 적어도 그런 일을 상상하기란 무척 어렵다. 그래서 인류는 그 변하지 않는 과학기술을 강하게 믿고 의지해 왔으며 이것은 인류의 정신을 바꿔왔다.

 

상대적으로 인문학은 이와는 좀 다르다. 대표적으로 철학의 예를 들자면 일찌기 버틀란트 러셀은 서양철학사를 논하면서 철학자들은 사회적 융합을 강화하고 싶은 사람들과 반대로 그것을 약화시키고 싶은 사람들로 나눠진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 사회적 융합이 강화되다가 그것이 풀리고 그러다가 다시 강화되는 역사의 순환에 따라 철학의 논리도 순환해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말하면 제자리에서 그다지 멀리가지 못했던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플라톤이니 부처니 공자니 하는 수천년 전의 사람의 말을 읽으며 공감하고 또 그것의 새로운 해석에 대해 논쟁한다. 하지만 우리는 2천년전의 과학기술에 대해서는 대개 무관심하다. 우리가 믿고 의지할 새로운 과학기술들은 그것을 이미 대체했고 우리는 과거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즉 상대적으로 과학기술의 역사는 보다 더 비가역적이고 직선적이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본다면 철학이 과학기술을 만든다기 보다는 과학기술이 철학을 만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아이작 뉴턴은 1642년에 태어나서 1727년에 죽었다. 그리고 칸트는 1724년에 태어나서 1804년에 죽었으며 철학자로 알려진 칸트는 뉴턴 물리학을 연구하기도 했던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의 연대를 지적하는 이유는 비록 뉴턴 이전에도 철학자가 물론 있었고 칸트 이후에도 물리학자가 있었지만 과학과 형이상학의 관계가 논리적 순서와는 대개 반대가 된다는 점을 지적하기 위한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과학기술이 확고해지고 그것이 사회를 바꾸면 그것을 소화해 내는 혹은 정당화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철학 혹은 형이상학이 뒤따른다. 예를 들어 그것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론이 자연스레 고전역학적으로 보이게 되는 철학이다. 

 

과학기술은 전체주의적이고 독재적이다. 하나의 과학이론은 그와는 다른 과학이론과 공존하는 법을 모른다. 그것은 배중률적이라서 내가 옳으면 반드시 그와 다른 다른 이론은 틀려야 한다. 과학이나 기술의 검증은 철저하다. 예를 들어 뉴튼 물리학이 만개의 경우에는 옳지만 하나의 경우쯤에는 틀린다고 해서 과학자들은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경우가 나오면 모두가 뛰어들어서 뉴튼 물리학의 한계를 밝히겠다고 난리가 나게 된다. 받아들여진 과학은 기록되어진 모든 경우에 있어서 문제없이 작동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그런 기록이란 개인의 한계를 크게 넘어서는 것이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인식한계를 넘는 도구를 사용하고 인간의 기억력의 한계를 넘는 방대한 기록을 남겨서 과학을 검증하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이 비가역적인 이유는 이때문이다. 

 

반면에 인문학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일상어로 전개되며 인간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는 인간의 일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 진다. 우리가 과학이나 수학 이외의 분야에서 행하는 사고들은 설사 도서관 가득한 책들에 그 기초를 가진다고 해도 그래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해상도가 지극히 낮은 그림처럼 애매할 때가 있다. 인문학 분야에서는 종종 가장 기초가 되는 개념들 그러니까 민주주의니 국가니 사랑이니 정의니 하는 것에 대해 뭐뭐란 무엇인가하고 싸우고 철학자들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단어에 새로운 뜻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것은 우리가 원이 무엇인지를 가지고 논쟁하는 일은 거의 없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인문학은 다원주의적이고 대개 하나의 주제에 대해 여러가지 해석과 주장이 병립하게 된다. 니체가 말한 것중에 한두가지 의미가 불명확것이 있거나 분명히 틀린 점이 있다고 해도 우리는 니체철학을 폐기처분해 버리지 않는다. 철학은 과학이론과 분명히 다르다. 

 

물론 인문학과 과학이 깨끗이 갈라지는 것은 아니다. 과학은 형이상학을 전제하고 복잡한 인문학적 논쟁은 대개 믿을만한 과학적 결과로 정리된다. 과학과 인문학의 관계는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얽혀 있다. 일단 어떤 과학 기술 체계가 자리잡고 나면 그것들은 그 나름대로 새로운 경험과 관찰사실들을 만들어 내게 되고 그것이 인간의 문화와 언어를 바꾸게 된다. 그래서 인간의 일상언어와 인문학도 더 복잡해 질 수 밖에 없다. 

 

내가 여기서 과학과 인문학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과학과 인문학간의 우열을 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의 정신을 결정해 온 것은 강력한 믿음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즉 보다 엄밀한 검증이 가능했던 과학과 기술은 그 만큼 더 강력한 믿음을 만들어 냈고 그 강한 믿음이 점차로 보다 덜 비가역적인 다른 분야에 대한 인간의 생각도 바꿔왔다는 것이다. 강력한 신앙은 기적을 믿게 만들지만 완성된 과학이나 기술은 우리의 눈앞에서 매순간 기적을 재현하므로 믿지 않기가 힘들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인간의 정신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져 왔다. 

 

망원경이 인간 눈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듯 우리는 과학이론의 관념을 써서 개인적 체험의 한계를 넘어선 인간 정신을 구축하게 된다. 오늘날의 과학기술은 인간이 개인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관찰의 한계를 훨씬 넘어서 까지 관찰된 자료들을 종합한 것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은 바로 양자역학과 상대성 이론이었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 이론은 기술의 발전덕분에 인간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극한의 범위까지 관찰을 넓힌 결과다. 빛의 속력이 지구의 움직임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던가, 전자가 원자라는 극한의 작은 범위에서 어떻게 움직인다던가 하는 것을 연구하다보니 인간은 관찰과 부합되는 이론을 만들기는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게 완성된 과학이 일상적 체험의 범위를 어찌나 넘어가는지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이 새로운 이론들을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수학적으로는 우리는 그것을 다룰 수 있다. 그래서 그걸 사용해서 실험결과를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한명의 개인으로서 우리의 사고는 여전히 일상언어의 관념에 기반하고 고전역학적이다. 그래서 전자는 입자이기도 한 동시에 파동이라는 양자역학적인 발언은 적어도 지금의 인간은 절대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이 된다. 

 

언젠가 이런 새로운 과학의 개념이 우리의 언어에 녹아들어서 우리의 일상적 사고가 양자역학을 자연히 포함하게 되는 날이 올까? 그러기에는 양자역학은 우리의 일상에서 너무 떨어져 있고 실제로 양자역학이 나온지 백년이 넘었어도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고전역학적으로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양자역학을 믿는다. 이것이 과학의 힘이다. 우리의 일상이 양자역학을 부정하는 쪽으로 강하게 당겨도 과학은 제자리를 지키고 오히려 지속적으로 우리의 정신을 끌어당기고 있다. 

 

철학자 화이트헤드는 과학과 현대세계라는 책에서 같은 일이 고전역학에서도 일어났다고 말한다. 즉 현대과학의 발전이 인간의 정신을 바꿔서 고전역학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과학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이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전통적으로 음양 오행이니 하는 과학인 듯한 이론들이 있었고 지금도 우리는 과학적으로는 증명되지 않은 혈이니 기니 하는 이야기를 한방의사에게는 듣는다. 마찬가지로 17세기 과학혁명 이전의 인간 지식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요정이나 귀신처럼 생각되어지는 무수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말하자면 뉴튼은 최초의 과학자이자 마지막 주술가라고 할 수 있다. 마침내 뉴튼 물리학이 나오고 그 뉴튼 물리학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형이상학들이 또 뉴튼 물리학적인 말들이 보편화되었다.  예를 들어 관성이며 힘이며 에너지같은 말들이 말이다. 우리는 이미 그 이후에 태어나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더이상 보지 않게된 마법과 요정이 과학혁명 이전시대의 사람에게 어떻게 느껴졌을까를 직접 체험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뉴튼 이전에 그것들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생생한 현실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현대인들도 징크스의 힘같은 것을 실재하는 것으로 믿지 않는가?

 

사실 뉴튼 물리학은 결코 당연한게 아니다. 그것은 당연하지 않은 특징들을 가진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일상은 뉴튼 물리학에서 다루는 것처럼 고립된 계와는 다른 경우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는 뉴튼 물리학이 진공속을 나르는 천체들에 대한 관찰에서 나왔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관성의 법칙은 외부의 힘이 없으면 어떤 물체는 움직이는 속력을 유지한다는 것이지만 현실에서는 움직이던 것은 마찰때문에 언제나 얼마지나지 않아 저절로 멈춘다. 또 뉴튼 물리학은 힘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그냥 -수학적 의미에서는 선형적으로- 합쳐진다고 말하지만 그것도 본래부터 자명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뉴튼물리학은 성공적이었다. 후대의 과학자는 - 아마도 라플라스였을 것이다- 이 우주를 지배하는 단 하나의 법칙을 뉴튼이 최초로 발견했다고 부러워 했다. 일단 그렇게 되고 나자 뉴튼 물리학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어졌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은 그것에 맞춰 변화했다. 적어도 몇백년간은 그랬다. 심지어 양자역학이 나온 지금도 뉴튼 물리학의 가치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로케트를 발사하면서 양자역학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개인으로 돌아가면서 이 글을 마치도록 하자. 물론 개인에게도 과학과 기술은 중요하다. 하지만 좀 더 보편적으로 말하자면 이제까지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은 우리가 비가역적으로 뭔가를 강하게 믿게 될 때 그것이 우리의 정신을 변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스스로가 믿는 것으로 자기의 정신 혹은 마음을 구축한다. 우리가 강하게 믿는 것들이 그 정신이라는 건축물의 바닥이고 벽이며 기둥이고 지붕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란 그런 건축물로 모형화된 세계속에서 벌어지는 연극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가장 강한 그 세계의 벽들에 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으며 통상 우리가 무지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우리의 정신세계안에서 변화하는 것들에 더 주목을 한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 세계를 이루는 그 벽의 위치가 바뀔 때야 말로 우리의 정신이 진짜로 성장하거나 파괴되고 만들어 지는 때이다.

 

지금의 나를 알려면 지금의 내가 아닌 때에 대해서 기억하거나 적어도 이해를 어느 정도 해야 하는데 그것은 인위적인 노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5살이거나 15살이거나 25살이었을 때 우리의 정신은 지금과 같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과는 뭔가 다른 것을 당연하다고 믿어서 세상은 지금과는 다르게 보였다. 그런데 일단 우리의 믿음이 바뀌고 나면 우리는 마치 우리가 태어난 이래로 쭉 이렇게 세상을 본 것처럼 느끼게 된다. 마치 우리가 고전역학 이전의 시대 사람들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이해하기가 힘든 것처럼 말이다. 

 

그런 일은 이제까지 일어나 왔고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청년은 유아기를 잊어버리고 노인은 청년기를 잊어버린다. 비가역적인 믿음은 우리 정신의 보다 가역적인 부분들을 왜곡할 것이다. 그래서 답은 3차원에 있는데 우리로 하여금 2차원에 머물게 해서 답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한다. 우리는 이런 것을 개인적 체험을 통해서는 알기는 알지만 실감하기는 어렵다. 우리가 과학이나 역사를 공부하는 한가지 이유는 그런 예들이 우리에게 스스로를 보는 한가지 창을 열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지만 역사가 우리가 들여다 볼 수 있는 하나의 거대한 뇌의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과학기술은 강력하게 인간의 정신을 만들어 왔다. 지금 이순간 우리 개인의 정신세계속에서 우리가 가진 어떤 강력한 믿음은 과학기술이 그렇게 해 온 것처럼 강력하게 우리의 정신을 왜곡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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