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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철학이 먼저인가 과학이 먼저 인가?

by 격암(강국진) 2022. 3.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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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3.9

철학이 먼저인가 과학이 먼저인가? 무슨 자존심에 대한 질문같지만 이는 널리 퍼져있는 오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생각해 볼만한 가치가 있다. 예를 들어 지금도 많은 철학책에 보면 흔히 나오는 이야기지만 사람들은 흔히 철학을 인간 사고의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것으로 여긴다. 나도 젊었을 때는 그렇게 알았다. 하지만 사실 인간의 문명이나 사고를 기초와 그 위에 서있는 건물로 생각하는 태도는 아주 널리 퍼져있지만 옳지 않다. 인간은 나아가 인간 사회와 문명은 그보다는 생명체에 가까운 유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차차 말하겠지만 이것은 여러모로 중요한 문제다. 우리의 사고를 건축물로 생각하는 방식은 자연히 그 기초가 부실하면 전체 건물이 무너지기 때문에 일단 기초를 잘 다져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는 어느 정도는 맞는 이야기이고 그래서 내가 젊었을 때 나는 이 말을 너무 깊게 믿었다. 하지만 이런 사고에 깊게 빠진 사람들은 흔히 기초밑의 기초밑의 기초를 파다가 결국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혼돈에 빠지게 된다. 인생의 본질을 알고 인생을 살 수는 없다. 연애가 뭔지를 다 알고 나서 연애를 시작할 수는 없다. 삶이란 그보다는 작은 하나의 세포가 분열하고 커져서 성인이 되듯이 일단 작고 소박한 상태로 시작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점에서 한발 한발 성장해 나가는 것인데 이는 마치 씨앗이 자라서 커다란 나무가 될 때 위로 자라서 큰 가지를 만드는 것 이상으로 뿌리도 깊게 자라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이유를 알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그냥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다. 

 

우리의 사고를 건축물로 생각하는 사람은 마치 나무가 뿌리부터 거목수준으로 키운 다음에 그 위로 가지를 뻣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음식을 먹어보지도 않고 이론만으로 요리사나 음식평론가가 될 수는 없다. 인생을 살아보지도 않고 인생론을 공부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자기 개발을 하지도 않으면서 남의 자기개발 이야기를 많이 읽는 것으론 아무 것도 되지 않는다. 우리는 이론 이상으로 체험이 필요하며 그래서 좋은 인문학책도 이론이전에 더 많은 체험을 줘야 한다. 아 하고 깨우치는 말이 아니라 그저 아 저런 말들이 있군하고 객관적으로 텍스트하고 떨어져서 읽게 되는 글은 아무도 바꾸지 못한다. 우리를 바꿀 수 없는 인문학이란 마치 플라스틱으로 만든 요리처럼 맛이 존재하지 않는 음식과 같다. 

 

이와 관련된 흔한 오류중에는 내가 인간 오류라고 부르고 싶은 오류가 있다. 이는 한 개인과 인류전체를 혼동하거나 특정한 귀족계층같은 소수의 인간들을 모든 인류로 혼동하는 오류다. 그러니까 인류가 달착륙을 하면 우리는 달에 갈 수 있다가 되고 거기서 나는 달에 갈 수 있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앞에서 말한 뿌리의 문제와 깊게 연관되어진 이유는 뿌리의 문제란 결국 체험이 우리의 사고를 키운다라는 사실과 연결되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면 당신이 생각하는 나라는 개념이나 인간이라는 개념은 크게 틀려있을 수 있다. 

 

우리가 자동차를 만들면 우리가 원인이고 자동차는 결과이지만 그 관계는 이렇게 일방적이 아니다. 사실은 자동차를 사용하는 체험이 우리를 바꾼다. 우리가 과학을 만든다라고 할 때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우리나 나라는 존재가 있고 그 존재가 과학을 만든다는 식으로 생각하지만 과학적 발전이 주는 체험은 우리를 바꾼다. 나는 그냥 여기있고 그것이 세상을 보는게 아니다. 세상이 나를 만든다. 가장 우리를 많이 바꾼 것은 바로 문자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은 유전적으로 태어나지 않고 만들어 진다. 유전적으로 태어난 인간은 우리가 아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은 탄생이후에 수없이 많은 체험 특히 언어활동으로 인한 체험을 통해 만들어 지는 것이며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 심장이나 간이나 쓸개같은 내부 기관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의식에 대한 것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인간은 현실적으로 컴퓨터라기 보다는 컴퓨터에서 도는 윈도우 같은 프로그램에 가깝다. 그리고 그 프로그램은 후천적으로 주입되며 외부와 연결을 유지할 때만 제대로 작동한다. 

 

그런데 이 체험이란게 뭘까를 다시 생각해 보자. 이것은 개인 차원에서는 한 개인의 평생동안의 기억일테지만 인류차원에서는 인류가 누적시켜온 문명이고 정보고 과학이다. 한 명의 인간이 홀로 평생 노력해서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 그 인간이 혼자서 벼농사나 발명할 수 있을 까? 볼펜을 만든다는 건 어떤가? 볼펜은 고사하고 청동기도 혼자서는 발명할 수 없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뭔지, 결혼이 뭔지, 법이 뭔지를 무의 상태에서 한 인간이 만들어 낼 수는 없다. 

 

체험이 우리를 바꾼다라는 사실 그리고 우리의 체험이란 사실 홀로 고립되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수없이 오랜 시간동안 누적시킨 것들을 통해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많은 현대인들은 큰 착각을 한다. 그들은 만약 만년전으로 타임머쉰을 타고 돌아간다면 단지 그들이 털가죽옷을 입는 것처럼 된다고 생각한다. 더 엄청난 변화는 머릿속에 있다. 진정한 원시인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현대인이 보는 것과는 크게 다르다. 현대의 사고, 현대의 철학이 무엇이든간에 그것은 결코 현대의 경험없이 만들어 질 수 없는 것이고 그 경험은 개인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현대 철학은 산업혁명이래 발전한 현대과학기술이라던가 물리학의 발전이 만들어 낸 충격을 거꾸로 해소하기 위해 만들어 진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철학이 더 기본이라서 그 기본적 발전위에 현대 과학기술이 만들어지고 물리학의 발전이 생겨나는 것이라는 생각은 적어도 절반이상 크게 틀렸다는 것이다. 철학이 안 중요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 관계는 절대로 기초와 상층부처럼 위 아래가 있는게 아니다. 철학없이는 과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면이 있는 이상으로 수학과 과학의 훈련없이는 철학의 겉만 핧을 뿐이다. 모두가 똑같이 살아야 할 이유는 없고 각자의 삶은 각자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만 깊은 숲속에서 스마트폰따위와는 상관없이 홀로 명상하며 사는 사람의 철학이 반드시 모든 면에서 IT 기기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사는 사람의 사고보다 더 깊다고 할 수는 없다. 공자나 플라톤은 위대한 철학자이지만 그들이 인터넷의 시대, 핵무기의 시대에 대해 뭘 알겠는가? 이공계의 사람들은 인문학 교육을 못받아 무식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실 미분방정식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쓴 글이 언제나 합리적일거라고 믿어서는 안된다. 그들의 말은 어느 정도 무속의 시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들이 비트코인이 뭔지, 메타버스가 뭔지 알게 뭔가. 망원경이나 우주선없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험의 폭은 작다.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과학과 기술이라는 도구없이 인간이 알 수 있는 경험의 폭은 작고 그 경험으로 도달할 수 있는 철학도 한계가 크다. 

 

한국인으로서 안타까운 또하나의 인간오류는 지금의 현대사회 문명은 상당부분 서구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것이다. 현대과학은 현실적으로 서구 과학이다. 현대기술도 현실적으로 서구 기술이다. 그리고 과학과 기술이 철학을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히 서구의 사상가에 익숙하다. 우리는 니체를 읽고 스피노자나 러셀의 이야기를 읽으며 플라톤을 읽는다. 설사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들의 사고는 우리에게 주입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동양의 글을 읽으면 종종 그것은 마치 사이비종교나 무속의 세계를 그리는 것처럼 들리기 쉽다. 도란 무엇인가라고 하면 사이비종교같은데 신학은 좀 더 진지한 사고같고 현상학이니 분석철학이니 하는 곳에 이르면 이건 거의 과학처럼 들린다. 

 

동양인으로서 우리는 서구철학에 의해 우리의 삶으로부터 분리되어져 있다. 우리는 동양인인 것도 아니고 서양인인 것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의 전통과 문화와 편안하게 공존할 길을 아직 잘 찾지 못하고 있다. 마치 몸은 호랑이인데 스스로가 돌고래인 줄아는 기괴한 모습이랄까? 이것도 일종의 인간오류다. 서구인이 만든 소프트웨어를 동양인의 머리에 집어넣은 탓이다. 

 

정리해 보자면 철학과 과학은 나아가 우리 일상의 지식은 위아래의 관계로 펼쳐져 있지 않다. 일상의 삶을 체험이란 말로 표현할 때 체험없이는 철학이 없고 철학은 우리가 뭘 체험할 수있는가를 결정한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체험 혹은 현대인의 삶은 지극히 사회적이다. 다시 말해 마치 이 우주에 홀로 태어나서 한 인간이 먹고 마시고를 경험하면서 현대인의 정신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한 인간으로서는 경험할 수 없는 것을 경험하는데 그건 다 누적된 문명탓이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아마도 인터넷을 통해 피씨나 스마트폰으로 이 글을 읽을텐데 그것은 양자효과가 작동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차원의 힘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백년전 사람에게 현대인의 일상은 귀신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한 개인의 힘으로는 이 거대한 인류의 체험은 물론 심지어 나 개인의 체험조차도 정리해서 간결한 철학으로 만든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우리는 특히 개인으로 말할 때 별거 아니다. 나는 흔히 쓰는 볼펜을 만드는 플라스틱도 어떻게 만드는지 모른다. 우리 주변에 있는 것 대부분은 있으니까 있는거지 어떻게 만드는 지 모르는 것투성이다. 우리는 단지 누군가가 만들다가 만 사고의 조각들을 가져다가 조립하고 고쳐서 좀 더 쓸모있는 것으로 만들려고 할 뿐이다. 그나마도 안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철학을 무시하는 인간은 결국 자기도 모르게 남의 철학을 통째로 가져다가 쓰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 온몸의 감각도 내 것이 아니게 된다. 반면에 철학에 몰두하여 그게 전부인 것처럼 자랑하는 인간들은 삶을 잊고 체험의 중요성을 잊기 쉽다. 전자렌지도 잘 못돌리는 주제에 철학자 이름 몇명안다고 자신이 대단한 줄 아는 바보가 되기 쉽다. 눈앞의 문제는 못보고 별에만 정신팔린 주제에 부질없는 자부심이 과할 수 있다. 과학이 철학앞에 잘난 척할 수 없는 것처럼 철학도 과학앞에서 잘난 척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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