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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이야기의 관점, 법칙의 관점

by 격암(강국진) 2019. 4. 7.

19.4.7

우리가 뭔가를 보는 관점에 따라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다르게 보이게 된다. 이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어떤 것들은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이런 것이 관점이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관점을 따르면서도 관점 따위가 존재한다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사색을 하고 글을 쓰는 한가지 이유는 바로 이런 숨겨진 관점들을 밝혀내고 기억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알아차리기 힘든 관점들에는 이야기의 관점과 법칙의 관점이 있다. 이야기의 관점에서는 물론 우리는 세상을 이야기로 파악한다. 이야기의 관점의 특징은 주인공이나 주인공들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주인공의 체험을 간접적으로 느낌으로써 사물이나 세상을 파악한다. 즉 이야기는 주인공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 주인공이 인간이거나 의인화되어 그것을 듣는 사람에게 그 주인공의 체험을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한다. 예를 들어 징기스칸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킬리만자로 산이나 호랑이나 조약돌을 주인공으로 하는 이야기를 들어도 우리는 그것을 인간적으로 이해한다. 즉 산이나 호랑이나 조약돌을 암묵적으로 인간적인 감정과 반응을 하는 것으로 여기게 된다. 

 

인간에게는 거울세포라는 것이 뇌에 있다는 것이 요즘은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런 것을 몰라도 남이 고통스러워 하거나 신맛이 나는 것을 먹는 것을 보면 우리는 단지 그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고통을 느끼고 입에 침이 흐르게 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그래서 이미 오래전에 맹자가 측은지심이 인간의 본성이라고 말했던 것이 아닌가. 

 

이야기의 관점은 인간의 본능이 포함하는 공감 능력이 만들어 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우리는 누군가가 언어로 쓴 이야기를 듣거나 읽는 것이 아니라 그저 뭔가를 보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레 그것을 하나의 이야기로 이해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우리는 그것을 우리 스스로가 체험한다면 어떻게 될까를 상상하고 간접체험하게 된다. 뒤에 말할 법칙의 관점도 그렇지만 이야기의 관점도 언어이전의 본능적 반응에 포함되어 있다. 그만큼 뿌리가 깊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이 관점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식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이야기의 관점과 법칙의 관점의 차이는 주관과 객관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오해의 소지도 많다. 이야기는 주인공을 가진다. 인간은 제한된 시간과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의 이야기는 제한된 길이뿐만 아니라 제한된 수의 주인공을 가진다. 고려 이야기를 하면서 주인공이 백만명인 이야기를 4천년동안 할 수는 없다. 그래서 하나의 이야기는 당연히 주관적인 특성을 가지게 된다. 즉 주인공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되는 것이다. 전두환이나 이승만의 이야기를 듣게 되면 우리는 전두환이나 이승만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된다. 박정희나 이병철, 정주영의 이야기를 듣게 되도 마찬가지다. 그런 이야기에서 가장 불공평한 취급을 받는 것은 그 이야기에서 거의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수동적인 태도만 취하거나 언급도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감정이나 경험은 그 이야기에서 완전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가 아니라 여러개의 이야기들을 계속 들음으로써 객관적 진실에 다가갈 수 있다. 즉 대통령의 이야기, 노동자의 이야기, 기업가의 이야기, 농부의 이야기, 주부의 이야기등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 어떤 시대의 진실을 여러 각도에서 보는 것이 되고 그것이 우리에게 그 시대의 진실을 객관적으로 보게 해 줄 수 있다는 것이 이야기의 관점이다. 그러니까 이야기의 관점이라는 것이 반드시 주관적인 것이라고 말하고 끝날 수는 없다. 그러니까 농민문학이니 노동자문학이니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해지는 것이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의 시간과 능력은 제한되므로 사실은 우리가 듣고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제한이 크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은 특정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하나의 이야기에 몰입하면서도 자신은 여러 이야기들을 다 들었고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는 일이 많다. 

 

우리는 세상에는 천가지 만가지 이야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이 하나의 이야기의 진실은 진짜가 아니냐는 생각에서 종종 헤어나오지 못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본능에 깊게 새겨져 있어서 그 설득력이 굉장하고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눈앞의 하나의 이야기에 비이성적으로 반응한다. 심리학자 카네만 같은 사람은 아기북극곰이나 아기 펭귄 사진 하나에 반응하여 환경보호에 공감하는 인간들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이런 인간의 모순을 지적한 적이 있다. 이것도 인간이 이야기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다시 보여주는 예다. 

 

무엇보다 우리가 이성의 시대 이전에도 신화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을 이해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야기의 관점이라는 것이 가지는 힘과 자연스러움을 다시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처음말했던 것처럼 우리가 특정한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생각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때는 고의적으로 기억하기를 싫어한다. 즉 고의적으로 편파적이 되는 것이다. 

 

검은 것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흰 것이 뭔지를 알아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것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바로 법칙의 관점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법칙의 관점은 이야기의 관점에서와는 다르게 주인공이 없다. 이야기의 관점이 인간이 가진 공감능력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면 법칙의 관점은 뭔가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인간의 인지능력에 그 뿌리를 가지고 있다. 어두운 방안을 헤매다가 벽에 부딪히면 우리는 거기에 벽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기억한다. 이것이 가장 기초적인 법칙의 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법칙의 관점은 그냥 우리가 보는 대상에는 어떤 질서가 존재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믿는 것이다. 좋은 예가 과학이다. 신화와 과학의 큰 차이는 주인공의 존재에 있다. 신화에서는 이 세상을 움직이는 신적인 존재를 주인공으로 내세운다. 그 신이나 신들은 신이지만 인간적인 의도와 감정을 가진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자유의지를 통해서 이 세상의 일들을 결정한다. 좋은 예는 그리스 신화같은 것이지만 성경을 보건 혹은 우리나라에 전해 오는 옥황상제니 신선의 이야기니 하는 것을 보건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연의 법칙을 논할 때 거기에는 주인공이 없다. 그저 세상은 이런 질서를 가지고 있다는 인식과 그에 따른 인과관계들만이 존재할 뿐이다. 축구 경기를 이야기의 관점으로 보면 우리는 축구선수들이 경기를 이기기 위해 노력한 이야기라던가 경기를 보는 관객의 이야기로 축구 경기를 이해하게 된다. 반면에 법칙의 관점에서 축구를 보면 우리는 축구가 기본적으로 인간이 하는 경기이며 규칙을 가진 게임이라는 점에서 나오는 결과들에 주목하게 된다. 예를 들어 농구와는 달리 축구가 100 대 0으로 끝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축구는 무승부가 많이 나온다. 또 프로 야구보다 프로 축구는 시즌당 경기수가 훨씬 적다. 계속 뛰어야 하는 축구선수와는 달리 야구선수는 투수를 제외하면 수비할 때도 공격할 때도 계속 서있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축구나 프로야구는 물론 기본적으로 모두 돈을 벌기 위한 비지니스다. 이런 것이 법칙의 관점이다. 

 

법칙의 관점은 체험과 자유의지를 행하는 주인공이 존재하는 감성적 관점인 이야기와는 달리 체험과 자유의지가 제거되어져 있다. 그래서 법칙의 관점을 따르다 보면 우리는 인간을 잊어버리게 되기 쉽다. 반대로 이야기의 관점을 따르다 보면 법칙을 잊어버리기 쉽지만 말이다. 이 두개의 관점은 그 각각이 매우 자연스러워서 그걸 깨닫기조차 힘들지만 조화롭게 융화되기도 불가능하거나 힘들다. 

 

법칙의 관점은 특히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을 보고 들어야 하는 오늘날 중요하고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한국의 노인복지의 현실을 본다고 해보자. 우리는 여러 정책과 노인들의 현상태를 말해주는 수치의 관계를 보여주는 통계를 들여다보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여러가지 인과관계처럼 보이는 법칙을 보게 되는데 그것은 진짜 법칙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착시일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보는 법칙에 따라 이런 저런 정책을 주장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것은 때로 과분하게도 과학이라고 까지 주장된다. 법칙의 관점은 객관적이라는 생각도 종종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법칙을 많이 믿는다. 많은 법칙은 검증이 거의 불가능해서 그냥 믿음의 대상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법칙의 관점도 형식만 그럴뿐 주관적일 때가 많다. 

 

법칙의 관점을 따르는 사람에게 당신은 인간적 감정과 자유의지를 잊고 있으며 이런 관점을 오래 따르다 보니까 공감능력이 떨어져 있다고 지적하면 대개의 경우 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한다. 그러나 법칙의 관점을 따르면 똑같은 컵이라도 어머니가 유품으로 남긴 컵은 시장에서 파는 같은 제품과는 다르다는 것, 인간은 돼지나 닭이 아니라서 그저 일정량의 음식을 먹고 일정량의 돈을 소비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인간은 그저 집이있고 몇명과 산다는 숫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디에서 누구와 사는가가 중요하다는 것, 무엇보다 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인간이지 시스템이 아니라는 것을 잊게 된다. 어느새 자유의지나 감정은 그저 판타지가 된다. 세상은 오래전부터 정해진 법칙에 따라서 흘러가는 곳이 되고 그에 따라서 생기는 결과들은 우리가 어쩔 수 없고 감정낭비를 할 가치가 없는 것이 된다. 

 

나는 그래서 경제학같은 학문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물리학의 법칙이 만들어 내는 결과에 감정적일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실일지 모른다. 하지만 사회적 현실에 대해 법칙으로 접근하는 경제학은 사회적 현실에 대해서도 감정적이 되지 말라고, 거기에 몰입하고 공감하고 체험하지 말라고 말하는 효과를 자연히 발휘하게 된다. 이게 정말 옳을까?

 

법칙의 관점에 미친 사람이라도 대개는 자기 자신이나 자기 주변의 일은 이야기의 관점을 가지고 이해한다. 그런데 이런 두가지가 결합되면 최악이다. 여러가지 정책적 판단착오를 일으키는 독재자나 관료가 그저 자신의 일의 힘듬에 대해서만 인간적인 연민을 느끼면서 세상에 넘치도록 많은 비극들에 대해서는 본래 세상이 그렇다고 하는 관점을 택해서 아무런 공감을 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칙의 관점은 오늘날 거의 필연적이다. 세상에 정보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같은 가족들끼리도 공감하면서 사는 것이 쉽지 않다고 푸념하면서 세계에 존재하는 70억인간 나아가 모든 생명체들과 비생명체들에게 모두 공감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비현실적이다. 즉 우리는 인간의 타고난 능력을 훨씬 넘어서서 연결된 세상을 살고 있고 따라서 법칙의 관점으로 감정을 닫지 않으면 살기가 힘들다. 우리는 공감능력이 사라진 무정한 독재자들과 관료를 비판해야 하지만 정도의 문제일 뿐 누구나 어느 정도는 세상을 법칙의 관점으로, 무정한 눈으로 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무 힘이 들기 때문이다. 

 

법칙의 관점과 이야기의 관점은 모두 옳고 모두 틀리다. 이야기도 법칙도 우리가 세상에 대해 아는 것을 어떻게 풀어 놓는가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이 둘은 인간의 다른 면을 공략한다. 이야기는 우리의 공감능력에 법칙은 우리의 인지능력에 호소한다. 이야기는 우리로 하여금 주어진 대상을 안쪽에서 바라보게 즉 자기 중심으로 바라보게 해 준다. 바다거북이의 이야기는 우리를 바다거북이로 만들어 바다거북이의 입장을 이해하게 한다. 그러나 법칙은 대상을 바깥쪽에서 보며 저기 바다거북이가 이렇게 존재한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하지만 이 둘은 매우 강력한 호소력을 가지면서도 서로 공존하기가 어려워서 서로를 억누르게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분열은 감정과 이성의 분열이라는 주제를 떠올리게 하고 실제로 비슷한 면이 있지만 정확히 같지는 않다. 일단 어떤 관점이든 관점이란 모두 지식과 이성과 의식의 영역으로 봐야 한다. 그러나 분열이 만들어 내는 상황은 비슷하다. 

 

우리는 대개 특정한 관점에 빠져든다. 어떤 사람은 법칙의 관점에 몰입하고 어떤 사람은 이야기의 관점에 몰입한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도 한쪽 관점만 가지지는 않는데 적어도 자기 자신은 이야기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자기 자신은 자유의지가 없다고 100% 믿는 인간을 나는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대개 이쪽 분야와 영역에는 법칙의 관점으로 접근하고 저쪽 분야와 영역에는 이야기의 관점으로 접근하게 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에 별 근거는 없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자신의 관점과 자세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고 객관적인 거라고 믿고 스스로가 어떤 특정한 입장과 관점을 취한다는 사실 자체를 대부분 자각하는 일이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실은 엉망진창 뒤죽박죽이다. 이런 가운데서도 현대사회는 빠르게 더 많은 정보를 쏟아내고 있다. 그러니까 이 관점의 문제는 소통에 의해서 해소되어지고 있다기 보다는 더 심해지고 있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 세계를 살고 있으니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것은 당연하며 그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일까? 그런 면도 있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다양성은 좋은 것이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고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 빵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듣는 것은 그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 대부분이 빵에 대해서 전혀 모른다면 다양한 의견의 수렴이란 결국 빵을 만드는 법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를 덮어버리는 효과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냥 우리는 서로 달라라는 말로 결론날 일이 아니다. 우리가 관점의 문제에 대해서 사색하고 고민해야 할 이유는 이때문이다. 자기에 대한 기본적 점검이 없는 가운데 정보가 과잉된 사회는 이데올로기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어떤 편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과잉생산하고, 소통이 불가능해질 것이며 가치 있는 목소리는 잊혀질 것이다. 모두의 목소리는 평등하다고 너무 빨리 결론 내리게 된다. 결국 집단적 판단이 엉망이 되고 그러면 그 사회는 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뭐든지 다 개성이고 차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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