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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과학자의 시선

프로이트와 마법의 시대

by 격암(강국진) 2022. 12. 29.

22.12.29

경영학자이자 저명한 작가인 피터 드러커는 1909년에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그가 성장한 때는 빈이 빛나던 시기의 말엽이었고 사람들은 세계 대전 이전의 유럽의 분위기를 그리워하고 그걸 유지하려고 하던 시기였기도 하다. 성인이 되자 이런 빈을 떠난 드러커는 이후 영국을 거쳐 미국에서 활동하게 된다. 그 덕분에 그는 19세기와 20세기의 차이를 생생하게 증언하는 자서전을 쓰게 된다. 이 자서전은 본인의 이야기이자 자기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 중에는 빈에서 활동했던 프로이트에 대한 부분이 있다. 

그는 프로이트를 현대의학의 시대에 존재하던 19세기 의학자들같은 존재로 그리고 있다. 말하자면 현대의학의 시대에 한의학을 하는 사람이랄까? 피터 드러커는 현대의학을 질병에는 개별적 원인과 개별적 징후 그리고 개별적 치료법이 있다고 믿는 학문으로 정의 한다. 대표적인 것이 세균학이다. 특정한 질병은 특정한 세균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므로 우리가 그 세균을 알아내고 그것을 제거하는 일을 하는 것이 질병을 치료하는 일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대의학 이전의 서양 의학은 어떠했을까? 그들은 체액과 수증기 따위로 인간을 이해했다고 한다. 그와 같을 수는 없겠지만 한의학도 기같은 개념을 논한다. 서양이든 동양이든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어떤 몇가지 원인으로 모든 질병을 설명하려는 특징을 가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기라는 것이 몸 전체에서 균형을 잃으면 이러저러한 질병이 생겨난다는 뜻이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팔과 다리는 둘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로 연결된 것이다. 현대의학은 현대과학이 그러하듯이 문제의 원인을 국소적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다루려고 하는 환원주의를 따르고 있으며 반대로 그 이전의 의학은 전체의 균형을 강조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프로이트는 이미 현대의학이 제대로 발달되기 시작한 후에 의사가 된 사람이며 그래서 그는 정신질환의 치료가 과학이 되어야 하고 그의 정신분석이 과학이라는 것을 강조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대 정신 의학이나 뇌과학의 선구자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현대과학 이전의 특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와 결별한 아들러나 융같은 그의 제자들은 주관주의적이고 신비주의적 성향을 더욱 많이 가지게 된다. 이들은 프로이트와는 달리 과학이고자 하는 집착이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에 관해서는 아주 충격적인 질문이 하나 존재한다. 정신분석은 과학인가 예술인가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답할 수 없거나 후자로 말했지만 프로이트 자신은 이것을 매우 싫어했으며 그래서 마의 산을 쓴 토마스 만이 프로이트가 문학에 큰 기여를 했다고 말하자 그는 크게 분노했다.  

21세기를 사는 우리로서는 프로이트는 이미 낡은 이름이 되었다. 어쩌면 젊은 사람들 중에는 프로이트라는 이름 자체를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말했듯이 뇌과학이나 의학계에서 프로이트는 이미 철저히 파산했다. 요즘 초자아니 이드니 하는 말을 거론하는 의사나 과학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예술과 과학의 융합을 추구했던 사람, 그의 주장이 과학인지 예술인지 말하기 어려웠던 사람의 이야기는 현재에도 큰 흥미를 끈다. 예술과 과학의 이분화는 20세기 내내 극복되려고 노력했지만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한가지 예가 바로 의학이다. 여러분이 우울한 기분을 느낄 때 어쩌면 여러분은 뇌속의 세로토닌이니 도파민같은 화학물질의 분비를 조절하는 약을 먹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아름 다운 풍경을 본다거나, 노래를 부른다거나, 감동적인 영화를 본다거나 해도 여러분은 그 우울증이 완화되는 것을 느낄 것이며 심지어 어떤 책을 읽고 깨달음을 얻은 끝에 그 우울증이 극복되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전자의 경우가 바로 정신병을 과학적으로 접근하는 것이고 후자의 경우는 예술적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술을 마시거나 알약을 먹음으로서 우리의 정신이 변화된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동시에 어떤 예술적 체험을 통해서도 변화된다. 이 예술적 체험은 원룸에서 고독하게 사는 것보다는 친밀한 가족과 함께 사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고 하는 조언을 포함한다. 언뜻 보면 과학적으로 들리는 이 후자의 발언은 따져보면 환원주의적이지 않고 과학적이지 않다. 인간의 환경은 워낙 복잡해서 그 전체가 원인이 된다고 하는 것은 과학적으로 논하기 힘들다. 다시 말해 가족과 함께 지냈더니 정신병이 더 심각해졌다고 해도 그럴듯하고 더 좋아졌다고 해도 그럴듯하다. 이런 건 과학적 조언이 아니다. 이건 예술적 조언이다. 이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전일적인, 환경적인 요소가 우리를 좌지우지한다는 주장이며 이것이 바로 종종 마법적인 세계의 조언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노래가 당신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는 체험은 예술적이며 마법적인 경험이다. 

 그러니까 프로이트식 정신분석이나 상담은 어쩌면 환자를 데려다 놓고 예술적인 공연을 펼치는 정신상담가의 활동일 수도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예술적으로 파악했을 때 여러분은 이것을 어떻게 하는가를 결코 논리나 글로만 배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이다. 그런데 전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예술이다. 현실은 사실 언제나 이 둘의 중간에 있다. 예를 들어 자전거타기는 과학일까 예술일까? 자전거가 어떻게 해서 두 바퀴로 갈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자전거타기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자전거타기를 글로만 배울 수는 없다. 우리는 반드시 자전거를 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균형감각을 습득해야 한다. 그 감각은 지금 이순간 내가 자전거를 타는 환경을 인지하는 것을 포함한다. 미끄러운지, 울퉁불퉁한지, 경사가 있는지, 길이 휘어졌는지등에 따라 우리는 자전거를 다르게 타야 하고 따라서 객관적으로 자전거타기를 서술할 수 없는 것이다. 

현대가 과학의 시대라고만 생각하면서 프로이트나 한의학을 보면 그건 전혀 값어치가 없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자전거에 한번도 올라탄 적이 없으면서 자신이 자전거타기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사실 현대의학은 분명 과학이겠지만 프로이드의 정신분석이 환자를 관객으로 하는 예술적 공연이라는 관점을 현대의 의사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지나치게 과학적 관점에 빠진 의사는 환자를 자동차보듯이 하고 수리공처럼 접근하려고 할테지만 그런 식으로는 환자의 치료가 성공적이기 어렵다. 그래서 임상체험이 없이 의사가 되기는 어려운 것이다. 현장 경험에서 뭔가를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는 여전히 예술이 넘친다. 오히려 과거보다 더 그런 것같다. 본래 지식이 늘면 무지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무지가 더 늘어나기 마련이다. 인식하는 세상이 더 커지기 때문이다. 인공지능의 시대는 점점 더 강력하게 인간들이 모두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뻔한 논리로 움직이는 일은 점점 더 기계가 더 잘하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라도 요즘은 스토리텔링의 시대라는 말도 넘쳐나지 않는가. 단순히 객관적인 지식으로 가치가 생성되지는 않는 시대다. 

마법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가장 강력한 마법의 시대다. 가장 강력한 과학은 가장 강력한 마법을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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