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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인공지능의 시대와 세대차이

by 격암(강국진) 2018. 8. 6.

2018.8.6

최근 고등학생인 막내와 이야기를 하다가 요즘 아이들의 꿈중의 하나가 유튜버가 되는 거라는 말을 들었다. 유튜브에 동영상을 올려서 억대의 수익을 올리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들었지만 그 숫자가 얼마가 되건 요즘 아이들에게 그것이 하나의 롤모델로 자리잡을 정도가 되었다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였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세대 차이의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매체의 변화

 

우선 매체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우리는 문자 매체에서 멀티미디어 매체로의 변화를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 이미 집집마다 티비가 없는 집이 없는 세상이므로 멀티미디어의 세상은 궁극에 달한 것같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압도적 다수의 사람들은 대통령도 유명 작가나 배우도 아니다. 따라서 이제까지는 그들의 의견이 매스미디어로 방송되는 일은 없었다. 그럼 그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은 직접 대면을 해서 말을 하고 아니면 글을 써야 하는데 당연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단한 연설가도 작가도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의견은 잘 기록되고 전달되지 못한다. 즉 실질적으로 무시되었다. 

 

이런 과거의 현실은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소수였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시대에는 문맹자들의 삶은 의식의 세계에서 그들의 숫자에 비례하는 합리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없었다. 예를 들어 왕자와 공주가 나올 법한 옛날 이야기를 생각해 보라. 그걸 보면 귀족이나 왕족은 세상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고 무식한 농부나 병사들은 그저 흙이나 구름이나 가축처럼 존재할 뿐이다. 그들의 감정, 그들의 결정은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우리는 농민 문학이니 노동자 문학이니 하는 것의 등장에 큰 의미를 두었던 것이다. 신이나 왕족이 아닌 평범한 노동자나 농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이 등장한다는 것은 심지어 그런 소설을 귀족이나 교육받은 지식인이 썼어도 의미가 있다. 그것은 노동자나 농민의 삶이 사회적 의식의 세계에서 의미있는 위치를 차지하기 시작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더 바람직한 것은 글쓰기가 더 보편화되어 노동자나 농민 스스로가 자신의 삶을 잘 표현하는 것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21세기도 쉽지 않다. 글쓰기의 전문가가 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설사 매춘부의 삶을 경험한 사람이 그 삶을 이야기하는 소설을 쓴다고 해도 그것은 매춘부가 쓴 소설인 것 이상으로 매춘부의 삶을 경험한 작가가 쓴 소설로 생각해야 한다. 압도적 다수의 매춘부는 작가가 될 능력도 의지도 없다.  

 

큰 변화가 생긴 것은 20세기 후반부터였다. 글쓰기는 여전히 의미가 있지만 사람들은 글을 쓰지 못해도 사진을 찍어서 타인들에게 자기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맛있는 것을 먹는지, 내가 지금 얼마나 멋진 곳에 있는지를 혹은 반대로 내가 얼마나 끔찍한 곳에 있는지를 타인에게 말하기 위해 우리는 더이상 멋진 소설가가 될 필요는 없다. 사진 한장이 많은 엉터리 소설보다 더 효과적이고 스마트 폰을 들고 다니기 시작한 사람들은 그 사진을 찍고 저장하고 전송하는 일을 아주 쉽게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타인과의 소통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필름 카메라의 시대에는 카메라가 있어도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그렇게 많이 사진찍지 않았다. 촬영 비용과 저장 관리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요즘 세대는 무조건 찍고 저장한다. 하드디스크에 있는 데이터는 우리의 기억을 대신해 주고 그렇게 하는데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다. 즉 우리는 좋은 일기를 쓸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삶을 훨씬 더 선명하게 기억하며 성찰하는 사람처럼 살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 문맹자들이었던 농부나 노동자가 글을 쓰고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고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 중요한 일이었다면 우리는 새로운 매체를 통해 보다 많은 시민들이 자신을 표현하고 기록하게 된 것을 중요한 사건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것은 고작 사진이나 동영상일 뿐이고 이름없는 시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세계관의 변화

 

최근에 우리는 흥미롭지만 구세대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보고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먹방이다. 요즘은 물론 공중파 방송도 연예인들을 불러다가 이것저것 먹이는 장면을 하루 종일 방송하고 있지만 사실 먹방이 화제가 된 것은 오래되었고 그것은 반드시 어떤 유명인의 먹방도 아니었다. 그들은 먹방 동영상을 올려서 유명해졌고 심지어 돈도 벌었기 때문에 관심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화제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거대 미디어가 충분한 양의 먹방 동영상을 내보내고 있는 것같은데도 일반인들의 먹방 방송은 여전하다. 이것이 바로 어린 학생들이 유튜버를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일반 방송이 먹방을 내보내는 데도 왜 유튜브 먹방은 사라지지 않는가? 그 이유는 하나가 아니겠지만 간단한 이유도 있다. 사람들은 영화를 고를 때 영화 평론가의 글도 읽지만 일반인들의 댓글에 큰 관심을 가진다. 왜냐면 직업적으로 영화를 많이 보는 영화 평론가들의 반응은 일반인들의 반응과 다를 때가 많기 때문이다. 내가 토끼라면 사자의 반응보다는 토끼의 반응이 내게 더 도움이 된다. 그러니까 직업으로 영화를 보는 영화 평론가보다 일반인의 반응이 사실 더 도움이 될 때가 많다. 먹방도 마찬가지다. 유명 배우나 코미디언의 음식 체험도 나름의 재미가 있지만 나와 비슷한 사람의 체험에는 나름의 장점이 있다. 또한 유튜브 먹방은 시청자와 제작자간의 소통이 훨씬 더 긴밀하다. 인터넷에는 황교익이나 백종원같은 유명 음식평론가의 추천이 자기에게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도 많다. 

 

일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유튜브에는 영화나 뮤직비디오를 보고 자신의 반응을 올리는 사람들도 많다. 이것도 나이 든 세대에게는 먹방만큼이나 어리둥절한 일이다. 동영상을 보면서 자신이 반응한 것을 찍어서 만든 동영상이라고? 그들이 무슨 유명인도 아닌데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그런 동영상을 본다고?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기술의 발달로 정보 채널이 증가하면서 전에는 만들어 지고 유통되지 않았던 정보가 흐르기 시작하고 있다. 그러한 정보 중에는 과거의 의미로도 중요한 정보들이 있다. 이것은 지금의 중노년층도 이해하기 쉬운 예들이다. 사실은 과거의 방송국도 주목했어야 마땅한 컨텐츠가 그들이 정보 채널을 독점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전달되지 못하다가 이제는 그렇게 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보가 전부는 아니며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낡은 사고방식일 뿐이다. 예를 들어 좋은 영화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고 따라서 그것을 알아보고 설명해 줄 수 있는 뛰어난 평론가가 주는 정답에 주목하는 것이 이런 것이다. 주식이 왜 오르는지에 대한 어떤 전문가의 멋진 이론이 이런 것이다. 정보 채널이 증가함에 따라 흘러다니게 된 정보에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정보도 있다. 나는 이것을 베이지안의 정보라고 부르고 싶은 데 그 이유는 아래에 쓸 것이다. 베이지안의 정보들은 종종 과거의 의미로는 그다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름 없는 사람의 체험을 공유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하지만 이것은 세상을 훨씬 덜 이론적으로 파악하는 혹은 고전적 이론 체계가 아무리 복잡해도 허약하다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는 중요한 정보다. 이것은 이론이 없다. 그냥 어떤 특정 종목의 주식이 올랐다는 사실만 전달 받을 뿐이다. 

 

아마 인공지능이나 빅데이터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들은 베이지안의 정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요즘의 흐름이라는 것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세상이 너무 복잡해져서 이론을 포기하고 그냥 데이터에만 집중하는 확률론적 사고이기도 하다. 베이지안의 정보라는 이름을 쓰는 이유는 그래서인데 물리학자나 빈도주의자의 정보는 주어진 세계에 대한 훨씬 더 많은 가정을 요구한다. 반면에 베이지안의 태도는 모델 혹은 이론을 최대한 배제하는 것이다. 

 

고전적 사고는 어떤 이론에 얽매임이 더 깊다. 나이든 세대는 대개 이런 이론에 근거해서 뭐뭐 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젊은 세대는 훨씬 더 즉흥적인데 그들은 사실 나이든 세대의 이론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과거 보다는 훨씬 더 많은 정보를 모으고 그 정보를 잘 판단할 예민한 감수성을 가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다. 즉 즉흥적으로 사는 것이 필요하다. 

 

물론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자기 삶의 논리를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고 나이 든 세대들은 이것이 무책임한 행동으로 여겨지겠지만 이것은 결코 비이성적 행동이 아니다. 세상의 복잡성에 대한 관점이 다른 것이다. 요즘의 젊은 세대의 유년시절은 지금의 노년들의 유년시대와는 크게 다르다. 단순히 사치스러운 소비수준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의 노년들은 유년시대에 아주 작은 세계 안에서 성장했었다. 극단적으로는 집바깥을 모르고 기껏해야 동네가 온 세상이었던 유년시절이었다. 요즘 젊은이들의 유년시대는 이미 세계 전부로 열려있었고 어른들의 세계로 열려있었다. 즉 그들은 세상이 복잡하다는 것을 훨씬 더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심리적 이유

 

베이지안의 정보가 중요해지는 이유에는 심리적인 이유도 있다. 인간은 결코 천만명이나 1억명의 반응을 기억하고 참조하게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은 그저 주변 몇명의 반응을 참조해서 반응한다. 이걸 보여주는 심리적 결과는 많이 있었는데 예를 들어 길을 가다가 몇 사람만 길을 멈추고 어딘가를 쳐다 보면 다른 사람들도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렇게 행동한다. 혼자서 판단하라면 답을 확실히 알고 있는 문제도 집단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 다 바보같은 답을 내리면 자신의 판단에 자신감을 잃는다. 이렇게 하는데 몇만명의 반응이 필요한게 아니다. 그저 4-5명이면 충분하다. 그래서 우리는 설사 인터넷 댓글로 수많은 칭찬을 받아도 그저 몇개의 악플에 상처받는다.  우리는 컴퓨터 처럼 수만 수십만개의 데이터를 한꺼번에 기억하고 처리하는 기계가 아니다. 

 

과거의 세대는 보다 강한 가족적 유대가 있는 속에서 사회 전체를 하나의 모델로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까 성공한 시민이라는 개념이 있다면 그것은 5천만명의 한국인 나아가 70억인 인류 전부에 대한 평균적 개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사실 강한 가족적 유대 혹은 지역공동체적 유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 주니까 가능한 것이다. 즉 내 주변의 작은 공동체가 나의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주는 가운데 큰 사회의 기준과 상식에 접근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도 세계의 평균이 아니며 모든 인간에게 보편적으로 통하는 메세지는 내 개인 문제를 해결할 때 도움이 안될때가 많기 때문이다. 칸트나 니체를 읽으며 연애를 하면 정말 성공할까? 그렇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우리는 모두 훨씬 더 많은 연애의 기본을 가족에게 배운다. 우리가 마음대로 추상과 보편의 세계를 노닐 수 있는 것은 가족같은 공동체집단이 나를 땅에 발붙이고 있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사라질 때 우리는 길을 잃고 사회적 패배자가 되고 우울증에 걸릴 수 있다. 

 

옛 세대는 그렇다 치자. 가족적 유대가 훨씬 약해진 요즘 세대는 나이든 세대가 자신들이 답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에 못마땅할 것이다. 그들의 메세지는 보편성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걸 따라하다 보면 삶이 공허해 진다. 요즘 젊은 세대는 구세대보다 훨씬 외롭게 컸고 보편성만으로는 정체성 위기가 오게 된다. 말하자면 개인적 사회관계가 없는데 시험공부만 하다가 우울증에 걸리는 학생이 되는 것이다. 많은 기성세대는 요즘이 자신이 성장할 때처럼 지역과 가족이 긴밀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다. 아이들의 발은 이미 허공에 있는데 더 일반론적인 이야기를 하는게 도움이 될까? 

 

따라서 요즘의 젊은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자연스런 현상은 온라인에서 가족을 대신할 커뮤니티를 찾는 것이다. 그 공동체는 보편적이지 않다. 보편적이지 않을 수록 그 공동체가 우리의 특징이 되고 소속감을 느끼기 쉬워서 정체성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인터넷 커뮤니티가 가족을 대신해 주는 것이다. 남들이 모두 보는 방송을 보는 것만으로는 소속감과 행복을 느낄 수 없다. 너무 유명한 사람은 오히려 현실감이 없다. 서툴러도 내 옆집 친구같은 사람의 먹방이나 반응 비디오를 보면서 우리는 행복감을 느낀다. 

 

사실 지금의 중장년층도 어린 시절에 친구들이랑 어떤 골방에 처박혀서 뭘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같이 시간을 보냈던 기억들, 뭔가를 같이 보면서 웃었던 기억들이 있다. 논리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그저 같이 있고 어떤 감정적 소통이 있는 것이 심리적 위안을 주던 그런 시간 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그걸 직접 하기 힘들고 따라서 온라인을 통해 해결하는 것같다. 

 

직업의 미래

 

땅에서 농사를 짓던 시대가 끝나고 공장의 시대가 오자 농민의 수는 날로 줄어들었다. 지금은 인구의 몇퍼센트면 전체 인구가 먹고 살 농사를 지을 수 있다. 이걸 뒤집어 말하면 농사가 기계나 비료나 종자개량같은 과학기술의 힘으로 행하는 것이 되면서 농부들이 실직을 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공장과 서비스업에서 새 직업을 찾았다. 농사꾼들은 땅이야 말로 소중한 것이며 따라서 땅을 포기하고 취직을 하는 것은 왠지 공허하다고 느꼈다. 실제로 옛날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에 서부로 공장을 세우러 떠난 사람은 낭패를 보고는 했다고 한다. 일단 땅이 흔했던 서부에 도착하자 각자 자기 땅을 소유하고 그것에 기반하여 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노동자들은 직장을 그만두고 모두 떠나 버렸다. 따라서 서부에 공장을 세우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즉 자기 땅을 소유할 수 있다면 취직해서 월급받는 생활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토지보다는 기술로 돈을 벌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들은 다시 토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하지만 토지는 제한적이고 결국 농사짓는 사람은 많은 나라에서 매우 소수가 되었다. 기술을 배워야 돈을벌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 새로이 나타난 직업중의 하나는 지식인이었다. 사회가 커지자 빠르고 정확한 정보처리가 필요해 졌기 때문이다. 이들이 하는 일은 그들이 보고 들은 것에 대한 그들의 반응을 글로 남기고 보관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이글에서 하는 일도 다른 지식인들이 하는 일도 사실은 그 본질이 먹방과 다르지 않다. 나는 세상을 보고 그 것이 내 머리에 어떤 반응을 일으킨다. 그리고 나는 그 반응을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 나자신에게 그리고 남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지식인이 하는 일이란 결국 그런 것이다.  

 

현대인들은 오랜 동안 취직의 시대를 살았다. 다시 말해서 다수의 사람들은 학교를 다니고 취직을 해서 직장을 가지면서 살았고 그런 사람들이 보기에 유튜버가 되겠다는 젊은이는 왠지 공허한 일을 하는 것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런데 인공지능같은 기술이 발달하면서 공장이나 서비스업에서의 직장이 사라지고 있다. 한세대가 지나고 나면 지금 인간이 하는 일의 대부분은 기계가 더 잘할 것이다. 그래서 기계가 못하는 것은 뭐냐고 질문하는 일이 요즘 흔해졌다. 토지가 드물어지자 취업의 시대가 온 것처럼 취업이 드물어 지면 우리는 새로운 것의 가치를 재평가하게 될 것이다. 물론 취업자리가 흔해지면 다시 취업으로 돌아가고 싶어질 수도 있지만 말이다. 

 

우리는 앞으로 기계나 기술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될 것이다. 그게 무엇일까? 이 질문의 답은 하나가 아니겠지만 적어도 당분간 기계가 하지 못할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냥 인간이 아니라 어느 도시에서 태어나 특정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특정한 학교를 다닌 특정한 인간 말이다. 그 인간은 데이터를 생산해 내고 그 데이터는 미래에 아주 중요한 자원으로 쓰일 것이다. 우리는 인간과 닮은 기계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친구로서 애정을 느낄 대화 상대로서의 기계는 만들기가 굉장히 힘들다. 왜냐면 우리는 기계가 우리와 공유하는 경험이 실제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기계는 거짓말로 그런 척할 수 있을 뿐이다. 먹방을 생각해 보라. 저기 멀리 있는 누군가가 라면을 만족스럽게 먹는 장면을 기가 막히게 만든 컴퓨터 그래픽으로 만들어 낸다고 해도 우리는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그 라면의 가치에 대해 말해 주는 것이 없는 가짜 정보다. 

 

우리는 어떤 드라마를 아주 재미있게 보고 나면 그 드라마에 대한 타인의 평을 찾아서 본다. 그리고 그 평이 나의 느낌과 비슷해도 그것을 계속 보고 읽는다. 이것은 자기 긍정의 만족감을 주는데 만약 내가 재미있게 본 영화를 마구 혹평하는 사람을 보는 경우 내가 어떤 느낌일까를 생각해 보면 이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단순히 심리적인 것이 아니다. 정보의 가치라는 측면에서 생각해 봐도 그렇다. 타인의 반응은 그 자체가 하나의 정보처리다. 내 동료가 뭔가를 보고 공포에 질린다면 나는 그러한 반응을 통해 지금 뭔가 무서운 것이 오고 있다라고 판단한다. 이것은 영화평을 보고 영화를 판단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내 동료가 아니라 지렁이나 토끼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내게 별로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 그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기계가 하지 못하는 정보처리가 있다. 인간의 반응이라는 데이터를 기계는 만들어 낼 수 없다. 인간이 반응한 것같은 거짓 반응을 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인간의 반응이란 말하자면 원재료 데이터다. 그 재료를 가공하고 분석해서 인간처럼 반응하는 행동을 만드는 것은 기계가 잘하지만 그 원재료를 기계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는 없다. 빅데이터는 수집되어져야지 기계가 가상으로 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수 있다면 데이터는 애초부터 필요없다.  

 

먹방이나 반응 비디오를 보면 나는 미래의 많은 사람들이 체험을 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것은 이미 지식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글쓰기의 형태로 해 온 것이다. 우리는 이미 여행작가 같이 남들 대신 여행을 가보고 자기 반응을 타인에게 제공하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이미 인터넷에는 회사에서 물건을 받아 그 물건을 쓴 소감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레스토랑과 온갖 물건에는 이미 사용자 평들이 붙는다.

 

이런 변화의 극으로 가면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자기 체험을 통해 거대한 정보처리 시스템에 기여하게 되는 미래가 된다. 우리는 이걸 약간 끔직하게 생각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 데이터를 생산하는 삶이란 뭔가 무의미해 보일 것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인이 살아가는 직장인으로서의 삶도 몇백년전의 사람에게는 똑같이 보일 것이다. 지금 존재하는 직업의 대부분은 그때는 없었다. 이말은 뒤집어 말하면 그때의 사람에게 그 직업은 이해불가능한 무의미한 일처럼 보일거라는 것이다. 먹방비디오를 찍는 유튜버가 하는 일이 뭔가 무의미해 보이는가? 큰 돈을 벌고 있는 프로 야구 선수도 수백년전의 사람에게는 아주 무의미해 보였을 것이다.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까지는 대다수 개인들의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점점 그런 데이터가 중요해지는 시대다. 노래를 내놓기 전에 이미 성공할 것을 확신하는 것은 어떤가? 호텔이나 리조트를 문열기 전에 이미 성공을 확신하는 것은 어떤가? 데이터는 그런 예측을 훨씬 가능한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는 두가지가 중요하다. 하나는 개인의 반응이 문자를 넘어서는 데이터라는 것이고 또하나는 그것을 분석하는 데에는 확률적 데이터 분석기술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즉 단순히 계산기로 인간이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인공지능같은 기술이 필요하다. 그것이 이러한 변화를 진짜로 일어나게 만들 것이다. 

 

미래는 확실히 알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리고 미래에도 농업이 있을 것이고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도 서비스직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며 여전히 글을 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발달하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의 비율이 아주 작아 질 때 다수의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체험하고 자신의 반응을 시스템에 제공하는 일을, 즉 데이터를 생산하는 일을 자신의 주된 직업으로 해서 살게 될 것같다. 그건 지금과는 굉장히 다른 직업의 세계일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평론가가 되는 세상이랄까? 농사를 짓던 사람들은 공장으로 떠난 자식들을 머리에 헛바람이 들었다고 했을 것이다. 유튜버가 되겠다는 젊은이들은 일종의 평론가라는 직업세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공부해서 취직하고 거기서 늙어죽을 때까지 일하는 것을 정상으로 생각하는 중장년층에게 이런 꿈은 머리에 헛바람이 든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예나 지금이나 그것이 사실인 경우도 많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는 바뀌어 가고 있다. 바로 모든 사람들이 지금과는 좀 다른 의미의 지식인이 되는 시대, 모든 사람들이 정보처리에 주로 종사하는 시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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