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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진짜 지식과 진짜 체험

by 격암(강국진) 2019. 8. 12.

2019.8.12

진짜 지식 혹은 진리에 대한 생각이나 논의는 너무도 거대하게 느껴져서 종교적이라거나 미신적으로 여겨지기 쉽다. 누군가가 '진리란...'하는 식으로 말한다면 사람들은 그걸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처럼 미심쩍은 말로 듣기 쉬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진짜 지식에 대한 생각은 때로 피할 수가 없다. 왜냐면 우리 일상에 있는 혼돈의 근원에서 이것들은 강력한 힘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진짜 지식에 대한 이야기중 하나는 바로 과학적 진리관이다. 과학은 관찰에 기반을 두고 그 결과에서 일반원리를 찾아낸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케플러가 케플러 법칙을 티코 브라헤의 자료에서 찾아낸 것이고 그걸 더 일반적인 규칙인 중력법칙에서 뉴튼이 유도해 낸 것이 바로 과학적 진리찾기의 예다. 이제 우리는 그렇게 찾아낸 중력의 법칙을 진리로 믿는다. 물론 뉴튼의 중력법칙은 이미 아인쉬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으로 수정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돌멩이를 던지면 그것이 뉴튼의 중력법칙을 따라 움직일 거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현대에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중력은 생생한 실체이며 진정으로 영원한 것은 아닐지는 몰라도 중력법칙은 거의 영원히 확실한 진짜 지식이다. 

 

이 과학적 진리관이 처음부터 믿어졌던 것은 아니다. 애초에 관찰된 사실로부터 일반적 결론을 이끌어 낸다는 귀납법은 과학혁명초기부터 흄같은 사람에 의해서 의심받고 비판받았으며 지금도 비판받고 있다. 이에 관련된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버틀런트 러셀의 칠면조이야기다. 러셀은 사람을 관찰하는 칠면조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칠면조는 매일 같이 아침마다 모이를 주러 오는 사람을 만나고 그럴때마다 사람은 안전하다는 관찰결과를 얻는다. 하지만 그러다가 추수감사절 아침이 되었을 때 바로 그 사람에게 죽는다는 것이다. 수백일동안의 데이터에 근거한 결론은 한순간에 틀린 것이 될 수 있다. 귀납에 의한 결론이 왜 위험한가를 경고하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귀납법에 근거하지 않고도 우리는 진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까?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명제에 도달한 과정도 이런 고민의 연장이었고 오랜동안 유클리드 기하학과 같은 이론은 인간은 관찰없이도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증거로 여겨졌다. 그래서 같은 맥락에서 종교가 등장하고 인간은 직관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어지기도 했던 것이다. 사실 과학혁명이전에는 종교적 혹은 비종교적 직관이 유일하게 진리에 도달하는 방법이라고 여겨졌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귀납법이나 직관론이나 모두 엄밀하게 말하면 파산한 주장이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기하학은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발전하면서 결코 유일한 기하학 그러니까 유일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게 되었고 이것은 우리가 직관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증거가 없이도 지극히 옳을 수 밖에 없다고 믿어지는 어떤 믿음도, 심지어 수천년간 진리로 여겨졌던 믿음도 사실은 그저 하나의 가능성이며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는 가장 확고한 증거가 비유클리드 기하학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진리관들은 우리가 학자가 아니라도 우리의 일상에 깊게 파고들어 온다. 과학적 방법을 쓰는 것은 과학자들뿐만은 아니다. 과학의 성공에 힘입어 과학적 방법에 대한 믿음은 깊어졌다. 그러니까 너도 나도 과학자들을 흉내내면서 여러가지 관찰 사실들을 끌어모아서는 거기서 그럴듯한 일반론을 끄집어 내려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결론이라고 믿어버린다. 

 

하지만 철학자 칼 포퍼는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통해서 이런 것은 과학이 아니고 그저 과학과 유사한 미신인 유사과학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한다. 그 책에서 그가 특히 강조한 것은 마르크스주의였지만 사실 그가 비판하고 있는 것은 모든 유사과학이다. 사회현상처럼 복잡한 것에 대해서 과학적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것은 많은 대중적 믿음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대로 성공한 적이 없다. 그래서 사회적 미래는 여전히 예측 불가능하고 그런데도 개인적 신념을 과학으로 포장해서 대중에게 말하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경제학자가 도표 몇개를 그리고 내년에는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 분명하다고 확실하게 말하는 그런 것이 그것이다. 그는 정확히 말하면 이러저러한 것이 옳으니 그런 미래를 만들어 갑시다라던가 이럴 수도 있으니 조심하자고 해야 한다. 그가 하고 있는 것은 미래를 예측하고 그것이 틀리면 포기되는 과학이 아니기 때문이다. 

 

모자이크 처리된 그림

 

관찰결과 즉 데이터가 있으면 거기에서 어떤 이론이나 일반론적 결론을 유도할 수 있다는 생각은 칠면조 이야기에서 지적하는 일반화의 정당성 문제말고도 다른 문제도 가진다. 차원의 저주로 알려진 이 문제는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다. 우리는 가끔 여기저기서 모자이크처리된 그림을 본다. 그 그림은 어떤 의미에서 진실의 일부다. 즉 현실을 낮은 해상도로 표현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데이터를 가지고는 우리는 그게 뭔지 잘 알아볼 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데이터는 있지만 그것이 진짜 지식에 도달할 정도로 충분하지가 않은 것이다. 그림은 2차원의 현실이다. 우리는 2차원적으로 나열된 작은 점들의 집합을 하나의 그림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2차원의 현실에 대한 데이터를 저해상도로 얻으면 즉 현실에 대한 데이터가 어느 정도 있어도 그것이 부족하면 그 그림이라는 현실을 알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모자이크 그림이 보여주는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2차원 정도가 아니다. 현실은 3차원도 10차원도 아니고 종종 그보다도 훨씬 더 차원이 높다. 뉴튼이 달이나 지구를 하나의 질점으로 근사해서 마치 위치 하나만을 가지는 물건으로 여겼을 때 그는 엄청나게 복잡한 어떤 것을 아주 단순화한 것이다. 우리는 지구위에 있는 단 한사람의 뇌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잘 모른다. 그런데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포함해서 아주 많은 것을 가진 지구를 그냥 하나의 구체로 여겨서 계산을 하면 천체에 대한 관찰데이터가 잘 설명된다. 

 

그러니까 데이터 혹은 관찰결과를 통해서 어떤 진짜 지식이나 법칙에 도달할 수 있다는 믿음은 사실은 현실적으로는 우리가 다루고 있는 현실의 어떤 한 측면이 지극히 단순화될 수 있다는 가정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데이터를 많이 구해도 차원의 저주에 따라 데이터가 부족하다. 고차원적인 고려를 해야할 때 우리의 데이터란 위에서 말한 모자이크된 그림 정도가 아니다. 그보다도 훨씬 못하다. 이제까지의 과학적 방법의 성공이란 현실중에서 지극히 낮은 차원으로 근사했을 때도 성공적인 측면들에 대해서만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종종 환원주의라고 부르기도 한다. 즉 현실을 잘게 나눠서 낮은 차원으로 이해해도 문제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원주의가 통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우리가 개인적으로 수집한 정도의 데이터를 가지고 일반화를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 전세계의 학자들이 모여서 엄청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경우에도 우리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결론은 지극히 근거가 약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역사가 과학이 아닌 것이다. 충분한 데이터도 없고 있다고 해도 그 데이터를 분석하기도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 그걸 컴퓨터의 힘을 빌려 어느 정도 극복한 것이 요즘 말하는 인공지능이다. 

 

일반화 자체를 문제삼는 칠면조문제 그리고 데이터의 양을 문제 삼는 차원의 저주에 이은 귀납법의 세번째 문제는 데이터 편향성이다. 데이터가 무한히 많지 않을 때 우리는 당연히 어떻게 데이터를 수집했냐에 따라 다른 결론을 내리게 되고 다른 현실을 보게 된다. 

 

데이터 편향성이 일어나는 방법은 수없이 많겠지만 나는 여기서는 다양성이란 측면만 말해두고 싶다. 여기 방안에 수학자가 백명이 있고 단 한명의 웨이터가 있다고 하자. 많은 문제들에 있어서 수학자들은 좋은 답을 말하겠지만 동시에 수학자가 약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학자들만 만난 수학자들보다 보통 사람들을 훨씬 많이 본 웨이터가 사회를 보는 부분에 있어서 강점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웨이터의 의견은 매우 소중한 것이다. 그의 의견이 없으면 전체 군중의 의견은 훨씬 더 편향될 수 있다. 

 

그런데 한국에는 기묘한 전통이 있고 그것이 사회적 합리성을 망가트리고 있다. 그 전통은 바로 사농공상으로 신분을 계층적으로 생각했던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유교를 공부하는 선비가 가장 고결하고 그 다음이 농사짓는 사람이며 다음이 기술자고 마지막이 장사하는 사람이라는 사고다. 물론 사농공상은 옛 이야기지만 과학자로 살았던 나는 이 신분제의 흔적이 우리의 의식에서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서구와 우리는 과학 기술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다. 박사는 영어로 Ph.D라고 말한다. 물리학 박사도 Ph. D다. 그런데 여기서 Ph는 필로소피 즉 철학을 말한다. 그러니까 서구에서 박사란 공학이건 이학이건 인문학이건 모두 기본적으로 철학자로 여겨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 과학의 시조로 통하는 뉴튼이 천문학을 연구한 것은 종교적인 동기였다. 즉 신이 만든 세상속의 법칙을 찾아내는 일을 종교적으로 가치있는 일로 여겼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별을 관찰하고 연구하는 행위는 종교적이고 철학적인 일이었다.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는 일이었다. 이에 비하면 조선의 선비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과학기술적인 탐구속에서 찾지않고 주로 유교경전에서 찾았으며 탐구의 대상도 세상이 아니라 주로 인간의 심성이었다. 오늘날의 한국 과학기술자는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조선의 선비보다는 관노였던 장영실같은 사람에게서 찾는다. 

 

나는 이 문제를 좀 진지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차이가 과학 기술에 대한 체험의 가치를 다르게 생각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과학기술자를 철학자로 생각하는 사회와 그저 실용적이고 돈에 관련된 잔재주로 생각하는 사회가 어떻게 같을 수 있겠는가? 내가 늘상하는 말이지만 우리나라에서 의학이나 법학 그리고 문학이나 철학에 대해서는 "재미있다"라던가 "큰 돈을 벌게 해주는" 이라는 수식어가 공공장소에는 잘 붙지 않는다. 그것들은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숭고한 가치가 있는 행위로 여겨진다. 그런데 한국에서 과학은 흔히 재미있는 과학교실이라던가 산업을 일으켜 우리를 부자만들어 줄 지식으로 선전되는 일이 많다. 과학선전물이나 뉴스가 과학을 그런 시각으로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조선시대에 기술적인 것을 잡학으로 여겼던 전통은 여전히 살아있다. 

 

내가 대학원에 들어갈 무렵 당시에 학교교재로 쓰던 두꺼운 수리물리학 교재가 있었다. 한 선배가 말하기를 그 수리물리학 교재에 나오는 수학 문제를 전부 풀면 세상이 달라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그 수리물리학 책을 전부 풀지 못했지만 학부와 석박사과정을 거치고 주로 수학적 모델을 만드는 이론가로 십여년의 세월을 보내면서 그 말이 중요한 진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오랜 계산의 경험이 뭘 남겼는가를 말하기는 쉽지 않지만 확실히 그런 경험은 뭔가 아주 중요한 것을 남긴다. 사람이 달라진다. 물론 이것은 국토종단 걷기를 한다던가 몇달동안 포장마차 장사를 해본다던가 한 아이의 부모가 되어 그 아이를 키워본다던가 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로 할 수 있는 말이다. 

 

그런데 한국에서 누가 어떤 철학책과 수학책을 거론하면서 인생이나 사회에 대해서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는 것은 어떤 책이냐고 물으면 어떤 답이 나올까? 대부분 철학책을 선택할 것이다. 수학공부를 한 사람은 오히려 보통사람보다도 덜떨어진 바보처럼 생각이나 안하면 다행이다. 이것은 특히 대학내부에서 혹은 대학을 둘러싼 지식인 사회에서 그렇다. 

 

데카르트는 수학자였고 칸트도 물리학 연구를 했으며 과학혁명의 구조를 쓴 토마스 쿤은 애초에 물리학으로 하버드에서 박사를 받은 사람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철학과나 생물학과를 졸업하고 신경과학분야로 박사과정에 들어온 서양의 학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가 놀란 것은 그들은 훨씬 더 이과 문과 구분이 없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훨씬 더 물리학이나 수학에 능통했다는 것이다. 컴퓨터 프로그래밍과 물리학에 해박한 철학과 학생이라는 것은 편견인지는 몰라도 한국적인 관점으로는 신기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인문계라고 하면 여전히 나는 수학이 싫고 과학은 모르겠고 하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다. 21세기지만 이런 의미에서 과학의 체화는 한국에서 아직도 이뤄지지않았다. 과학과 철학과 지혜는 분리되어 있다. 과학과 수학이 인생을 바꿔주는 지식이라고 깊게 믿지 않는다. 인문학은 가슴속에 있는 것이라면 과학기술은 몸바깥에 있는 도구같은 것으로만 여겨진다. 

 

이것은 데이터 편향의 한 예이며 이런 의미에서 나는 한국이 여전히 편향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실질적 체험을 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공계의 훈련과정을 사소한 가치로 생각한다. 진리나 진짜 체험은 주로 동서양의 인문학적 고전속에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눈에 세상은 어떻게 보일까. 우리는 확실한 과학적 지식은 망각하고 어려운 단어의 해석에 빠져드는 진흙탕을 헤매기 쉽다. 우리는 과학적 합리주의를 초월하는게 아니라 거기에 도달도 못하고 비이성주의로 빠져들기 쉽다. 한국에 넘쳐나는 사이비종교들은 이런 태도의 결과가 아닐까?

 

그럼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는 완전히 별개로 논의해야 할 하나의 큰 주제다. 다만 여기서 한가지만 말해보자면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무지하다.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지 않다. 

 

즉 우리는 우리의 무지를 기억하고 우리가 뭔가를 알고 있다는 착시와 싸워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무지를 위한 싸움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안타까운 것은 이 무지를 위한 싸움은 생각보다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지극히 낮은 해상도의 모자이크 그림안에서 또렷하게 현실을 본다. 게다가 우리는 종종 논쟁도 해야 한다. 그러면 논쟁의 상대자는 그 부실한 몇개 안되는 데이터를 들고 나와서 이러니 저러니 떠들어 대는데 논쟁은 이기는 쪽이 현명해 보이기 때문에 우리는 모른다는 말을 반복하는 사람은 잊혀지기 쉽다. 예를 들어 교육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라고 묻는데 누가 나는 모른다라고 하고 다른 사람은 나는 확실하게 교육의 핵심을 보여줄 수 있다고 하면 논쟁은 시작도 안되기 쉽다. 세상은 안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달려간다. 무지를 위한 싸움은 개인적 차원에서도 쉽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가면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사회적으로 우리는 자꾸 확신으로 돌진해 가는 것이다. 진짜 체험이 뭔지, 진짜 지식은 어떻게 도달될 수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계속 고민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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