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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유발 하라리의 유튜브 영상들을 보고

by 격암(강국진) 2019. 1. 14.

어제는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를 쓴 유발 하라리의 동영상 두개를 봤습니다. 첫번째 동영상은 TED 강연으로 2015년의 것이었고 두번째 동영상 역시 TED 주최 강연이었지만 강연이라기 보다는 대담 형식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언변은 거침이 없고 설득력이 있습니다. 흥미롭게 봤기 때문에 소개를 할겸해서 그에 대한 요약과 감상을 남겨볼까 합니다. 


첫번째 강연은 짧고 단순합니다. 그 주제는 인간은 왜 침팬지와는 달리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인데 그 답은 한마디로 인간은 침팬지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에서 협력을 할 수 있기 때문이며 그런 일을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가 강조하는 두가지는 첫째로 인간의 능력은 집단속에서 발휘되는 것이며 1 대 1로 비교하자면 침팬지의 능력이 오히려 더 뛰어날 거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간은 현실이라고 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가상의 것을 믿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강연 혹은 대담은 2017년의 것으로 트럼프가 당선된 이후에 이뤄지면서 진행자는 세상에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냐고 묻습니다. 하라리의 대답은 세계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그것의 문제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역행적으로 다시 애국주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라리는 애국주의의 눈으로 볼 때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가 다른 나라때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 기술적 발전이 주로 문제라고 말합니다. 즉 미국 서민의 생활의 질이 떨어지고 직장이 없어지는 것은 멕시코나 인도네시아나 한국같은 다른 나라 때문이 아니라 기술의 발전 때문에 이전에 존재하던 직업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다른 나라를 비난하면서 멕시코 장벽같은 것을 세우려고 하지만 아무도 기술의 발전을 비난하고 있지는 않다고 말합니다. 



하라리의 말들에 대부분 공감하면서도 그가 강조하는 한가지에 대해서는 말을 남겨 볼까 합니다. 그는 점차로 추상적이 되어가는 오늘날 현실과 인위적으로 만들어 진 것을 구분하려고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주로 물리적 현실이며 의식을 가진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유전적 특징같은 것 혹은 바꿀 수 없는 과거 혹은 중력의 법칙같은 자연법칙은 그가 말하는 현실이겠죠. 반면에 국가나 돈같은 개념은 매우 생생한 현실처럼 느껴지지만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시스템이고 허구입니다. 그 자체로는 사실 가치가 없는 것이죠. 


그는 또한 고통에 대해서도 말을 합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뭐가 진짜 가치가 있는가를 보는 한가지 방식은 고통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고 이것은 고통을 느끼는 주체 즉 의식의 존재를 가정합니다. 예를 들어 국가가 고통받는다거나 은행이 고통받는다는것은 허구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고양이나 인간이 고통받는 다는 것은 현실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현대 사회는 점점 더 그 허구의 힘이 거세 집니다. 허구인 돈과 현실적 존재인 음식을 서로 바꿀 수 있는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삶과 죽음이 국가나 법인같은 허구에 달려 있는 것이 지금의 세계입니다. 하라리는 이런 혼란스런 세계에서 중심을 지키는 방법으로 변하지 않는 현실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유전적 특징이나 과학적 사실들을 잊지 말아야 하고 우리는 말과 개념에 휘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것들은 모두 인간 스스로가 만들어 낸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 현실과 비현실을 고정된 기준으로 구분하는 것은 무의미할 수 있으며 오늘날 일어나는 변화에 대처하는 방식으로서 바람직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의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예를 들어 의식의 존재라는 것도 쉽게 단언할 수 는 없습니다. 그는 동물도 의식을 가진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고 의식의 문제를 흑백처럼 있다 없다로 판단합니다. 즉 의식이란게 물통에 물을 가진 것처럼 조금 있고 많이 있고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하지는 않는다는 겁니다. 그보다 분명하게 흑백으로 있다 없다라고 말합니다. 돌멩이는 의식이 없고 강아지는 의식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는 의식의 존재와 비존재의 선을 어디에 그어야 할까요? 사실 생선이 의식이 있다고 믿으면 생선을 마구 먹기가 쉽지 않죠. 의식이 있다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의식의 존재 비존재를 어딘가에 선을 그어 파악하는 것이며 이것은 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흑백으로 구분되는 것보다는 바꾸기 어렵고 변하기 어려운 정도로 연속적으로 파악해야 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즉 현실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매우 바꾸기 어려운 정도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물리학의 법칙이나 태양이 내일 동쪽에서 뜬다는 사실들은 하라리의 말대로 바뀌지 않는 현실이죠. 인간은 날개가 없다거나 종족을 보존하고 싶은 본능이 있어서 짝짓기를 하고 싶어한다 즉 배우자를 찾고 싶어한다라는 것도 유전적 사실로서 현실입니다.  반면에 돈이나 국가는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비현실입니다. 여기서 현실과 비현실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변할 수 있는가 혹은 변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하라리가 지적하듯이 추상성의 중요성은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추상적인 개념이 우리가 통상 말하는 현실보다 더 바꾸기 어려운 시대가 오고 있습니다. 인간이 날개가 없는 것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할까요? 우리는 안드로이드가 되거나 유전자조작을 통해서 날개가 있는 인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 있지요. 그런데 인간이 돈을 없앨 수 있을까요? 그것도 물론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결정적 질문은 이것입니다. 돈을 없애는 것보다 인간이 날개를 가지는 것이 더 쉬운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뭘 현실로 말하고 뭘 가상현실이나 비현실로 말해야 할까요? 우리가 인간의 정신이나 유전적 특징조차 바꿀 수 있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가 인간의 특징이 이러저러하다는 것도 더 이상 현실이라고 단언하기어려울 것입니다. 우리가 국가나 법인이나 돈을 생생한 현실로 느끼는 이유는 사실 이미 그런 비현실의 힘이 너무 강해서 우리의 삶과 죽음이 그것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농사만 짓던 사람은 땅을 개간하고 밭에서 일하는 것이 진짜 노동이고 현실이며 유튜버가 된다던가 작가가 되는 것은 비현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땅에서 솟아나는 작물은 현실이며 네트웍을 따라 흘러다니는 말들이나 기껏 종이위에 쓰인 단어들은 허구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정말 오늘날의 세계에서 농사가 현실일까요? 무슨 놀이동산가듯이 농사체험을 하는 곳이나 옥상에서 농사를 짓는 도시 농부들이 오늘날에는 있습니다. 그들에게 농사란 놀이에 가깝습니다. 이럴 때 어느 쪽이 현실이고 어느 쪽이 비현실일까요?


역사적으로 우리가 통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 하나 우리가 통상 추상적 비현실이라고 느끼는 것보다 더 바꾸기 쉽게 변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변화의 속력은 매우 빨라진 것같습니다. 바꿀 수 없었던것은 바꿀 수 있게 되고 인위적인 허구같아 보이는 것이 시스템이 거대해 지면서 바꾸기 불가능해집니다. 이런 시대에 하라리처럼 현실에 집중하자고 하는 것은 그다지 계속 성공할 수는 없는 방법인 것같습니다. 


그럼 대안은 무엇인가. 이것은 또하나의 긴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만 저로서는 기본적으로 우리가 시대의 변화의 속력에 맞춰서 추상성에, 비현실에 오히려 몸을 던지는 것이 더 현실적인 대안이 아닌가 싶습니다. 추상적 비현실이 이미 현실이 된 시대에 그것을 계속 추상적 비현실로만 여기면 우리는 시대에 뒤진 농부처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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