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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와 자유에 대한 착각

by 격암(강국진) 2019. 2. 21.

어윈 쉬뢰딩거의 생명이란 무엇인가는 생명이 어떻게 가능했는가를 물리학적으로 이야기하는 책이다. 어윈 쉬뢰딩거는 생명현상이란 양자역학이 제공하는 분자의 안정성없이는 가능하지 않았다라는 말로 두가지를 동시에 지적한다. 그 두가지란 다음과 같다. 첫째, 양자역학은 원자같은 미시적인 것에 대한 이론인 것같지만 사실은 생명의 존재같은 거시적인 현상의 뒤에 있다. 둘째로 바람직한 진화는 적절한 속도와 조건을 갖췄을 때만 일어날 수 있다.



현대인은 돌연변이가 자연적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것이 DNA라는 생명물질의 변화와 관련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진화란 결국 DNA의 변화다. 그런데 DNA가 변화하는 것이 모두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현상의 핵심은 DNA가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DNA가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열적인 요동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으로 자신을 복제하는 현상에 있다. 다시 말해 DNA가 하나의 세포에서 몸 전체를 이룰 수 있을 만큼 복제되는 동안에도 언제나 같은 신호를 유지할 수 있기에 생명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단 생명이 있어야 그 생명의 발전도 있는데 DNA가 마구 변하는 물질이라면 애초에 생명이 있을 수도 없었다. 


양자역학이 생명현상의 핵심에 있게 되는 이유는 만약 양자효과라는 것이 없었다면 분자라는 것은 마치 쇠구슬을 서로 줄같은 것으로 묶어놓은 것이 되어서 고분자가 어떤 특정한 형태를 유지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목걸이 같은 것을 상상해 보라. 그것은 우리가 제멋대로의 모양들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분자단위로 가면 목걸이같은 그 고분자는 양자효과때문에 특정한 모양만을 가질 수 있는데 그 모양을 벗어나려면 강력한 에너지의 보급이 필요하고 그것도 에너지가 빠져나가고 나면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 돌아온다. 이때문에 모자 하나와 신발 두개를 이어놓은 물체와는 달리 모든 물분자는 정확히 서로 똑같은 것이다. 수소 원자 두개와 산소원자하나는 정확히 같은 모양으로만 결합하기 때문이다. 


강력한 교란으로 양자효과가 주는 안정성을 뛰어넘어서 DNA를 수정하면 어떻게 될까? 그게 바로 방사선을 몸에 쬐는 효과다. 그리고 우리는 원전같은 곳에서 고방사선에 쬐인 사람들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다. 그러면 죽는다. 아니면 살아남기 어려운 기형아를 낳는다. 이것이 과학이 보여주는 진화의 진실이다. 생명현상은 이런 의미에서 저에너지 현상이다. 


그런데 사상적으로 자유주의나 시장주의는 진화에 대해서 특정한 부분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진화론은 결코 모든 전통적인 가치와 구조를 파괴해야 한다는 증거가 될 수 없다. 그러니까 자유와 부자유중 어느 것이 좋은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당연히 자유가 좋지라는 답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면 구조를 가진 모든 것은 부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집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도 되는 자유가 있다면 화폐질서가 무너질 것이다. 결혼을 했지만 아무런 제약이 없이 산다고 하면 결혼제도가 무너질 것이다. 학벌을 위조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학벌질서가 무너질 것이고 남의 음악과 영화와 책을 복사해서 내 것처럼 팔아도 문제가 없다면 컨텐츠 시장이 무너질 것이다. 


모든 사상적 사회적 발전은 나를 지키는 행위와 개혁의 균형속에서만 가능하다. 현대인은 현대 민주주의에 자부심을 느낄 테지만 천년전이나 이천년전쯤으로 돌아가 기술도 문맹률도 지금과 달랐던 시대에 현대의 민주주의를 실시하려고 하면 그런 제도가 정착도 되지 않겠지만 개혁의 과정속에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것이다. 말을 타는 것보다 자동차를 타는 것이 궁극적으로 효율적이라고 해도 그 변화가 자연스럽고 적절한 속력으로 일어나지 않는다면 엄청난 비극이 생긴다. 말에 관련된 산업에 일하던 사람들은 하루 아침에 실업자가 되어 거지가 되는데 그 사람들에게 이제 말은 틀렸으니 자동차를 사라고 하면 그 사람들이 자동차를 살 돈은 있을까? 이래서 개혁은 결코 단순히 A에서 B로 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같은 개혁도 어떤 과정을 거치냐에 따라 가능해 질 수도 불가능해 질 수도 있을 뿐만 아니라 애초에 그게 바람직한 것인가 아닌가도 바뀐다. 궁극적으로는 사람이 행복해지려는 개혁인데 개혁의 최종단계만 보면서 뛰어가다보면 행복하게 만들 사람이 없어지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20세기 이데올로기 전쟁과 그것들이 만든 비극이 이걸 생생하게 보여준다. 


20세기 이래로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는 점점 더 중요한 질문이 되가고 있다. 그 이유는 세상의 기술적 사회적 변화의 속력이 날로 커지면서 변화해야겠다는 필요성은 커지는데 어떤 개혁이 가능하고 바람직한가가 인간의 한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일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20세기는 조선사람들에게 있어서 왕정을 마무리하고 공화정이 들어서는 시기였다. 조선이 망하고 일제시대가 있었고 해방이후 한반도에는 공화국이 들어섰다. 이 변화는 백년정도에 걸쳐서 일어났기 때문에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봉건시대에 태어나 왕을 정점으로 하는 봉건질서를 당연하게 여기다가 공화정 질서가 이땅에 뿌리내리는 일을 경험해야 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인간의 수명을 백년이라고 할 때 사회적 변화가 백년 이상에 걸쳐서 일어난다면 그 사회적 변화는 쉽다. 우리는 말하자면 봉건제를 믿는 사람이 늙어죽고 공화국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신세대가 성장하는 것을 개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사회적 변화가 30년에 걸쳐서 일어난다면 우리는 태어나서 청년이 될때까지는 열심히 봉건제 이데올로기를 주입받고 그 다음에는 스스로를 공화국 시민으로 다시 재교육해야만 한다. 이게 설사 바람직한 일이라고 해도 쉬운 일일까? 그렇다고 할 때 당연히 바람직한 개혁이란게 정말 누구를 위해 당연한 것이 되는 것일까? 


2019년 현재의 30년전을 생각해 보자. 그건 1989년을 의미한다. 이때만 해도 대학졸업하면 취직은 별로 어렵지 않았고, 무엇보다 전체 고등학생의 절반도 안되는 사람만 대학을 갔다. 핸드폰도 없었고 인터넷도 대학에서만 실험적으로 있던 시절이다. 30년전이 지금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한다면 30년후는 어떨까? 지금 있는 직업중 뭐가 살아남을까? 우리가 개혁을 그저 옳은 일을 하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세상에 비극은 넘쳐날 것이다.


세상에 많은 머리좋은 지식인들이 무시하는 것중의 하나는 그들 스스로가 모두 부유한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래도 대부분 형편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돈이 있고 인맥이 좋고, 지식이 많으면 개혁이 만들어 내는 변화를 견뎌낼 수 있다. 그들은 가족제도가 붕괴하고 지역 공동체가 붕괴하고 종교시설이 무너져도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 그런데 중학교 졸업에 평생 배운거라고는 트럭운전밖에 없는 50대의 노동자에게 이제 자율운전트럭이 나왔으니 트럭운전말고 다른 걸 배우라고 하면 할 수 있을까? 몸파는 여자에게 매춘이 나쁜 거라고 말하는 것은 옳겠지만 그녀에게 그거말고 사는 방법을 제시할 수 없다면 몸팔지 말고 죽으라고 하는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발전과 자유가 무조건 좋다고 말하는 것은 그것이 나쁘다고 말하는 것만큼이나 틀려 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미 발전에 지쳐있다. 발전은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는 하지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했던 어느 시기에서 아무 변화가 없이 늙어죽을 때까지 머무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새로운 음악, 새로운 자동차, 새로운 집, 새로운 음식따위 필요없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보편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문화적 사회적 규칙들을 통에 하나로 넣고 무너뜨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질서가 무너질 때 우리는 복지에만 의존하여 대책없이 사는 사람들, 전통적 사회질서의 실종, 높아지는 범죄율, 약물과 술에 의존하는 사람들의 증가를 보게 된다. 우리는 문화라는 바다를 헤엄치고 사는 물고기와 같다. 그러니까 사방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개혁을 밀어부치면 모두가 물바깥으로 나온 고기처럼 된다. 겉으로는 어떨지 모르나 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개혁을 하고서 비늘을 촉촉하게 만들기 위해 물을 비싼 돈을 주고 사는 꼴이 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자유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제까지 우리가 자유를 말할 때 그것은 개인의 자유였다. 그러니까 각각의 사람은 법을 어기지 않는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문화나 사회적 질서의 권리나 자유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나는 왈츠를 듣고 싶은데 누군가가 힙합을 옆에서 틀고 그 옆에서는 디스코를 틀면 이건 소음의 지옥밖에는 되지 않는다. 이런 지옥을 단순히 모든 사람은 자기가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자유가 있고 남에게 다른 음악을 듣지 말라고 할 수는 없다는 원칙만으로 해결할 수는 없다. 모여서 왈츠에 맞춰 춤추고 싶은 사람들의 집단적 권리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그걸 힙합에 대한 차별이라고 막는 것이 무조건 옳을까?


시대는 점점 인간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다. 그 말은 그런 변화에 적응 하기 어려운 젊은 세대나 빈민층에게 이 세상은 지옥이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지옥은 상당부분이 옳은 일을 하자는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 진다. 그들이 말하는 개혁과 변화는 생명현상의 본질을 위배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일단 자기를 보존할 수 있고 나서야 발전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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