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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다시 읽기 (1권 1장)

by 격암(강국진) 2020. 6. 2.

오늘은 열린 사회와 적들이라는 책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오늘의 소개는 소개의 시작입니다. 지난 번에 하이젠베르크의 부분과 전체에 대해서 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책을 조금씩 읽어나가면서 자세히 설명해 보는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이유는 책이 아주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렵다고 하는 분들도 많은 것같습니다. 그래서 전에 했던 10분짜리 소개가 불충분하게 느껴져서 이번에는 천천히 읽어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많은 분들이 중요한 책을 읽게 되는데 녹음이 조금은 기여할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열린 사회와 적들을 포퍼는 1902년에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철학자입니다. 그를 영국의 철학자라고 말하지만 영국에 자리를 잡게 것은 2 세계대전이 끝난 그러니까 이미 그가 40 초반이 이후였습니다. 따라서 포퍼는 어디까지나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성장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지요. 

 

포퍼는 20세기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과학철학자로 과학에 있어서 반증가능성이라는 것을 강조한 사람입니다. 그러던 그가 나치를 피해 뉴질랜드로 이민을 갑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열린사회와 적들을 씁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때문에 포퍼를 자본주의의 수호신같은 사람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그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대개 포퍼가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포퍼의 본래 관심사는 과학이었고 포퍼는 과학이 아닌 것이 과학으로 주장되었을 전체주의가 퍼진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책을 겁니다. 그런데 포퍼를 그저 공산주의 비판가로 말하는 사람들은 정확히 책에서 포퍼가 비판하는대로 말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말들의 본질에만 집착하는 것이죠. 이게 좌파다, 저게 우파다같은 말을 하거나, 이게 민주주의고 저게 자유주의고 하는 말에 너무 심취해서 사람들에게 딱지 붙이기를 좋아하는 것은 정확히 포퍼가 반대하는 겁니다. 바로 그런 태도가 닫힌 사회를 만들고 전체주의를 만든다고 말이죠. 

 

책의 내용은 역사주의는 과학이 아니다라는 말로 요약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주의가 뭔지, 역사주의는 과학이 아닌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겠죠. 그래서 책은 역사주의가 뭔가를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역사주의의 기원을 찾아서 포퍼는 서구 사상의 근원이라고 말해지는 플라톤 철학을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말은 역사주의라는 것이 그만큼 우리의 사고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입니다.

 

책을 읽는데에 있어서 주의해야 점은 우리는 우리가 역사주의가 뭔지를 안다고 쉽게 말하지 말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과학이 뭔지, 이데올로기가 뭔지 고민도 별로 없다가 극단적 사상에 쉽게 빠져듭니다. 누구도 전체주의자가 되고 싶어서 되는게 아닙니다. 제가 고전을 소개할 종종하는 말입니다만 만약 역사주의가 뭔지가 그렇게 간단한 거라면 포퍼가 책을 썼겠습니까? 또한 책이 고전이 되겠습니까? 사실 많은 사람에게 있어서 역사주의가 뭔지를 깊게 이해한다는 것은 사고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책은 깨달음을 줍니다. 여러분이 천천히 고민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말입니다. 

 

책은 물론 단순히 역사주의가 과학이 아니라고 말하는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플라톤 철학을 분석한 1권의 10장에서 포퍼는 현대 문명이 지금 서있는 자리를 평가하는 데에까지 도달합니다. 포퍼는 우리가 직접적 접촉의 시대에서 추상의 시대로 변환하는 혁명을 겪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미 플라톤 시대에 일어났던 혁명은 아직도 제대로 종결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꾸 주술과 마법의 시대인 전체주의의 시대로 돌아가려고 한다는 겁니다. 이야기는 책이 나온지가 벌써 75년이나 되었는데도 마치 21세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책을 여전히 읽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책의 1장을 봅시다. 1장의 제목은 역사주의와 운명의 신화입니다. 역사주의는 과학이 아니다라고 말하려면 우리는 일단 역사주의라는 것이 뭔지를 소개하는 것에서 글을 시작해야겠지요. 

 

역사주의란 역사에 대한 이론입니다. 포퍼는 스스로 그걸 밝히기 싫어했고 나치즘뿐만 아니라 시온주의에도 반대했습니다만 유태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가장 먼저 예로 역사주의는 바로 선민사상입니다. 유태인은 선민사상으로 유명하죠. 

 

선민사상이란 것은 신이 하나의 성스런 민족을 만들었으며 민족은 번영할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렇게 선민사상은 민족에게 정체성을 부여합니다. 우리는 성공할 운명을 가진 선택된 민족이라는 거죠. 

 

책의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선민사상이 옳은가 그른가가 아닙니다. 선민사상 나아가 역사주의에는 이보다 중요한 사실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1장에서 언급되는 역사주의의 두가지 특징들만 말해 보겟습니다. 두가지란 바로 첫째로 역사주의는 미래에 대한 것이란 겁니다. 두번째는 역사주의의 역사란 사회적 집단적 역사를 말한다는 겁니다. 

 

역사주의에 대해 우리가 주목해야 첫번째 사실은 이게 역사를 두고 전개된다는 겁니다. 역사주의는 아주 가까운 장래에 대한 예언도 아니고 자주 반복되어 일어나는 일에 대한 예언도 아닙니다. 장래에 일어날 일이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한번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겁니다. 설사 어떤 역사주의 이론이 역사는 순환한다고 해도 순환이 4만년마다 한번 온다고 하면 우리가 살아생전에 그런 순환을 목격할 일은 없으니까요. 

 

여기서 이런 질문을 던져봅시다. 일기예보는 역사주의일까요 아닐까요? 어떤 분들은 역사주의가 과학이 아니라고 하면 역사주의는 틀렸고 과학은 맞아서 과학이 과학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일기예보는 틀리기로 유명하죠. 맞지도 않는 일기예보는 그럼 역사주의 일까요?

 

만약 누군가가 1만년뒤의 특정한 날의 날씨에 대한 예보를 하겠다면 그건 아마 과학이  아닐 겁니다. 그런 예측은 검증이 불가능하니까요. 일기예보와 역사주의가 다른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일기예보는 매일 매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정확히 맞지는 않지만 일기예보다 대개 맞는 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기예보를 믿는 거죠. 

 

하지만 역사주의는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다가 약속된 날에 약속된 미래가 오지 않아도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20세기 말에 유행했던 종말론 같은 겁니다. 중요한 것은 과학도 틀린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과학이 발전하죠. 하지만 과학은 계속 자주 검증을 합니다. 하지만 역사주의는 검증이 불가능한 이론입니다. 그러면서 예측할 없는 것을 예측할 있다고 주장합니다. 

 

역사주의에 대해 기억해야 두번째 사실은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개인사가 아니고 사회의 역사라는 겁니다. 역사에 대한 이론은 예측할 수없는 것에 대한 예측을 할뿐만 아니라 이론에서 다루지 않는 것에 대해 우리가 장님이 되게합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맛있는 김치찌개를 만드는 법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해봅시다. 그럼 사람은 김치찌개의 맛을 결정하는 요소에 대해 연설을 하겠죠. 그런데 사람이 찌개를 얼마나 오래 끓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해봅시다. 이럴 우리가 사람의 의견에 아주 심취하면 우리는 암묵적으로 이렇게 믿게 됩니다.

 

김치찌개의 맛은 찌개를 끓이는 시간과는 상관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선민사상같은 역사주의 이론을 믿는다고 해봅시다. 그럼 사람은 세상을 민족이니 국가니 하는 차원에서만 보게 되기 쉽습니다. 왜냐면 선민사상은 아주 뛰어난 불세출의 영웅같은 사람이 아니면 개인을 다루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이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는 이론에 심취하는 가장 문제는 그게 틀리냐 맞냐가 아닙니다. 그건 맞건 틀리건 미래의 일이죠. 문제는 사람은 모든 것을 한국이라는 틀에서만 본다는 겁니다. 개인이 죽고 사는 예언된 성공과는 상관없는 일이고 다른 무엇보다 역사주의에서 말하는 예언이 달성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한국 전쟁때도 봤습니다. 친구과 가족이고 따지기 전에 사상이 중요하다는 식의 생각을 하는 사람은 지금도 있습니다. 공산주의에 빠졌던 사람도 분명 이렇습니다만 반공주의에 빠진 사람도 이렇습니다. 세상을 공산주의냐 아니냐로만 보는 겁니다. 개인이 실종됩니다. 역사주의가 전체주의가 되는 것은 이렇게 세상을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로만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느새 세상에 대한 우리 개인의 책임 혹은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의 중요성을 잊어버리게 됩니다. 바로 사람이 굶어 죽고 있어도 그걸 시장의 법칙이 만든 결과지 잘못은 아니라고 말하게 됩니다. 

 

역사주의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이제 시작했습니다. 역사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포퍼는 부족주의가 뭔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2장에 대해 말할 이야기하겠습니다. 

 

역사주의는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이 옳고 역사주의가 틀리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학은 틀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주의는 틀리지도 않습니다. 역사주의는 예측할 없는 것을 예측할 있다고 말합니다. 역사주의는 반증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역사주의는 일반론을 펼치는 가운데 개인을 없애 버립니다. 포퍼는 책에서 계속 말하고 있습니다. 역사는 법칙이 만드는게 아닙니다. 역사는 바로 우리의 선택이 만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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