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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오늘의 질문

열린 사회와 그 적들 다시 읽기 (1권 2장)

by 격암(강국진) 2020. 6. 3.

오늘은 저번에 이어서 열린 사회와 그 적들 1권의 2장 헤라클레이토스에 나오는 내용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플라톤보다 먼저 살았으며 모든 것은 변한다는 주장을 한 철학자로 이 책의 문맥에서 말하자면 역사주의 이론을 주장한 가장 최초의 철학자중의 하나입니다. 플라톤의 철학은 이 사람의 영향을 아주 크게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는 왜 모든 것이 변한다는 주장을 했을까요? 과거의 사람들에 대해서 생각할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진짜 중요한 것은 그들의 답이 아니라 그들의 질문이다

 

라는 겁니다. 

 

 

과거사람들의 답을 현대인의 눈으로보면 그것들은 비과학적이고 세부사항이 틀렸다고 생각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의 질문에 주목하면 우리는 우리도 여전히 같은 문제를 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단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우리와 과거 사람들의 답사이에 존재하는 차이는 사소한 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가 풀어야 하는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이 혼란한 역사적 격동기에 나는 세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헤라클레이토스는 왕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사회적 혁명으로 귀족이 지배하던 사회가 무너지는 것을 목격합니다. 보다 현대적으로 말하자면 조선같은 봉건국가가 무너지고 공화국이 서는 걸 본 왕세자같은 입장이었던 셈입니다. 

 

따라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자신이 당연한 거라고 생각했던 많은 사회질서가 무너지고 이제는 뭐가 옳고 뭐가 그른 건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을 했을 겁니다. 그는 귀족질서를 옹호했지만 그것이 무너지는 것은 결코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헤라클레이토스가 느끼는 것을 느꼈을 겁니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는 한가지가 달랐습니다. 그는 세상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포퍼는 고대그리스에서 일어난 변화를 변화하지 않고 정적인 부족사회에서 추상적인 관계를 가지는 사회로 말합니다. 정적인 부족사회에서 세상은 하나의 건축물처럼 이해됩니다. 그러니까 집이 있다면 지붕이 있고, 기둥이 있고, 문이 있다는 식으로 이 세상은 여러가지 부속품으로 이뤄진 하나의 건축물로 이해되는 겁니다. 

 

포퍼는 정적인 부족사회의 가장 큰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사회적 질서나 법률이 자연법칙과 혼돈된다. 

 

그러니까. 왜 귀족은 지배하고 노예는 노예로 살아야 하는가. 원래 그렇다는 겁니다. 본래 자연법칙이 그렇다는 겁니다. 인간이 결정한다고 해가 서쪽에서 뜨는 것이 아니고 별이 다르게 움직이지도 않듯이 인간 사회의 질서도 자연법칙의 일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관점에서는 물리학과 법학이 같은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 앞에서 이 집이 무너졌습니다. 더이상 지붕은 지붕같지 않고 기둥은 기둥같지 않아서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졌습니다. 현대인의 입장에서 보면 갑자기 중력법칙이 달라지고, 물이 30도에서 끓고 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겁니다. 그러자 알고 있던 많은 지식들이 쓸모없어집니다. 갑자기 세상이 훨씬 훨씬 더 복잡해 졌습니다. 

 

여기서 철학자는 추상적 방향으로 관점을 돌립니다. 이제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추상적 방향에는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건 바로 세상이 변한다는 법칙입니다.

 

약간 말장난처럼 느껴지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정력학에서 동력학으로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걸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조금더 친숙한 뉴튼물리학을 생각해 봅시다. 뉴튼의 운동법칙은 동역학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물질들이 어떻게 움직이는가에 관한 법칙입니다. 그런데 뉴튼 방정식은 매우 간단하죠. F=ma 한 줄입니다. 이 세상은 이렇게나 복잡한데도 운동방정식은 이렇게나 간단하다는 겁니다. 

 

이게 동역학의 힘입니다. 이 세상은 변하기때문에 아주 복잡하지만 그 변화의 법칙이 어떤가를 보면 첫째로 그 변화의 법칙이 뜻밖에 간단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역학으로는 세상을 이해할 가능성이 보이게 됩니다. 둘째로 이 변화의 법칙은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동역학으로 관점을 돌린다는 것은 다시 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화하지 않는 것을 찾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포퍼는 이것이야 말로 헤라클레이토스와 플라톤을 넘어서 모든 역사주의자들에게 공통된 특징이라고 말합니다. 즉 그들은 사실 변화하지 않는 부족사회같은 세상의 안정성을 아주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과 함께 살기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인 격변이 일어납니다. 고대그리스에서는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고 근대에도 산업혁명이나 프랑스혁명같은 일이 일어나는 겁니다. 세상이 이해가 안됩니다. 

 

여기서 역사주의자들은 변화의 법칙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자신들이 혼돈과 무지속에 있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떤 법칙을 찾았을 때 그들은 역사는 이렇게 움직여 간다는 이론을 마치 뉴튼의 물리학처럼 발표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역사주의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반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다시 헤라클레이토스로 돌아가서 그의 메세지들을 다시 읽어봅시다. 모든 것은 변한다. 모든 것은 허망하다. 선도 악도 하나다. 물, 불, 공기등 세상 모든 것은 불이 변화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이 옳은가 그른가는 두번째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는 지적으로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이해가 안된다고 해서, 무조건 옛날 관점이 옳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변화의 법칙이라는 관점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다시 이해 가능한 것으로 변한다는 것을 발견한 위대한 철학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고 방식은 현대에 까지 이어집니다. 뉴튼 역학이 좋은 예지만 우리는 물리적 세상을 이해할 변화하지 않는 법칙을 찾아왔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사회속에서도 법칙을 찾고 경제에서도 법칙을 찾고 있습니다. 모두 다 이 혼란한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포퍼가 이 책에서 말하는 것은 그런 노력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은 답을 모르는 상태를 견디지 못한 나머지 답을 찾았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지나친 확신은 재앙을 부릅니다. 개인들을 억압하고 닫힌 사회를 만드는 전체주의가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역사주의의 뒤에 있는 감정은 바로 이제는 사라져 버린 부족사회처럼 변하지 않는 어떤 상태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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