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13
미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미래는 항상 이미 우리곁에 다가와 있다. 단지 우리에게 그걸 볼 눈이 없을 뿐이다. 그걸 보기 위해서 우리는 고의적으로 익숙한 것을 낯설게 봐야 한다. 그럴 때 이따금 우리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보게 된다. 이 익숙한 것중에는 우리의 언어가 있다. 우리는 C++나 파이선같은 것들을 컴퓨터 언어라고 부르고 그런 것을 써서 프로그램을 짜는 것을 코딩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일상어로 말하자면 말하기나 글쓰기에 해당하는 것이 코딩이라는 것인데 나는 오늘은 이것을 앞으로 다가올 스마트한 미래 환경에 대한 한가지 단서로 여기면서 다시 한번 가까운 미래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점검해 보려고 한다.
우선 글쓰기가 코딩이라는 점에 대해 생각해 보자. 컴퓨터 언어는 인간과 컴퓨터가 대화를 할 수 있도록 컴퓨터가 수행해야 할 명령들과 그것들을 늘어놓는 문법을 말한다. 인간의 사고가 그 궁극에서 뇌세포의 전기활동이 되듯이 컴퓨터도 궁극적으로 이진법의 명령만 수행하므로 우리는 그것을 모아서 더 인간이 쓰기 편한 상위언어를 만든다. 그래서 C++ 이나 파이선, R, 매트랩같은 언어가 되는 것인데 상위 언어라고 해도 서로 차이가 있어서 파이선이나 R같은 것은 C++에 비하면 훨씬 단순하고 직관적이며 인간의 언어에 가깝다. 그래서 코딩을 하는 시간이 훨씬 짧다. 그리고 이것은 컴파일러라는 과정을 통해서 다시 최종의 기계명령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상위언어의 경우 이 하위 기계어로 번역하는 과정이 더 많이 개입해야 하기 때문에 프로그램은 전체적으로 느려지게 된다. 하지만 이 부분은 빠른 컴퓨터와 잘 최적화된 컴파일러로 해결할 수 있으므로 요즘은 코딩이 편한 상위 언어로 프로그램을 짜는 일도 많다.
컴퓨터에 관심이 좀 있는 사람들은 컴퓨터 언어에 대해 이 정도를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뜻밖에 그들이 잘 주목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쓰는 일상어다. 우리의 언어도 이렇게 컴퓨터 언어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을까? 일상어는 컴파일러를 통해 뇌신호로 바뀌는가? 그렇다면 그 과정은 완전히 우리의 머리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 마지막 질문에 답하자면 그것은 적어도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다.
인간도 여러가지 단어와 문법을 써서 자신의 뜻을 전달한다. 그리고 그 일상어도 컴퓨터 언어처럼 인간이 개발하고 만든 것이다. 예를 들어 인간들은 민주주의라던가 결혼이라는 단어의 뜻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방대한 자료를 '사회적으로' 축적했다. 대표적인 저장창고는 물론 도서관이다. 우리는 이러한 자료의 축적을 무시하기 쉽다. 결혼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에 대해 도서관에 방대한 자료가 있다는 사실이 그에 관련된 연구를 하는 사람이 아닌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 도서관에 있는 자료가 컴퓨터의 컴파일러처럼 등장하여 상대방에게 의미를 전달하는 과정에 끼어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대 중국이나 고대 이집트의 제국들에서 도량형을 통일 했듯이 어떠한 단어나 시스템을 공유하며 소통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표준적인 의미나 기준을 설정해야 한다. 그렇게 설정된 기준은 각종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에게 퍼지기도 하고 교육시스템을 통해 사람들에게 교육되기도 한다. 그것은 그냥 상식수준에서 머물 때도 있지만 법규로 공식화될 때도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그 말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print라는 컴퓨터 명령을 쓰면 그 단어가 컴퓨터 컴파일러에 의해서 번역되듯이 우리가 비록 인식하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가 일상 대화를 하고 글을 쓸 때 우리는 상식과 문화라는 거대한 시스템을 옆에 소환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언어에는 객관적 의미가 있게 된다. 몇 몇 예외가 있기는 하지만 당신은 결혼해 달라고 말하거나 내가 누군가를 죽였다고 말한 후에 내가 결혼이라는 단어나 죽였다라는 단어로 의미했던 것은 이러저러한 것이라고 멋대로 주장할 수 없다. 하나의 언어는 하나의 문화집단이나 법률체계같은 플랫폼 안에서만 분명한 영향력과 의미를 가지고 작동하게 된다. 우리가 그 언어를 쓸 때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그 플랫폼을 소환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보이지 않는 곳에서 컴퓨터 언어가 컴파일러를 거치듯이 말이다.
코딩이란 이런 인공적 환경안에서 벽돌을 가지고 건축물을 만들거나 부품을 가지고 기계를 조립하는 행동과 같다. 단어와 문법에 따라 우리는 프로그램을 짜는데 다 짜고 나면 이 프로그램은 어떠한 행위를 하도록 만들어 진 추상적 공간의 건축물이나 기계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글도 마찬가지다. 나는 지금 일상어라는 언어를 써서 하나의 글이라는 기계를 조립하고 있다. 그 기계는 내가 그것에 의존하지 않고는 도달하기 어려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계다. 말을 하거나 그냥 생각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문자의 사용은 인류에게 있어 거대한 의미가 있다. 문자를 써서 기록한다는 기술이 없었을 때 인간의 언어가 복잡해 지는 수준은 훨씬 낮을 수 밖에 없고 더구나 내뱉은 말은 사라지고 만다. 그 말은 인간이 국가같은 거대한 조직을 만들고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논리적인 의미에서 말하자면 하나의 국가나 하나의 자동차는 한 편의 글과 같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말하고 글을 쓰는 것이 코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면 그리고 글쓰기나 코딩이 하나의 기계를 구축하는 것이라는 것을 납득했다면 우리는 이제 더욱 더 추상적 코딩의 세계로 혹은 추상적 언어의 세계로 들어가 볼 수 있다. 스마트 폰을 들고 어떤 포털사이트에 가서 블로그를 하나 개설한다고 해보자. 블로그 개설이라는 스위치를 누르자. 그 포털사이트에 당신을 위한 블로그가 만들어졌다. 혹은 스마트 폰을 들어서 배달앱을 켜고 치킨을 주문한다고 하자. 나는 제품을 고르고 스위치를 누른다. 미리 등록해둔 카드에서 돈은 인출되어 나가고 얼마지나지 않아 치킨이 배달되어 온다.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코딩일까 아닐까? 언어일까 아닐까? 우리는 더이상 목소리나 문자라는 미디어를 쓰고 있지는 않지만 이러한 행동도 글쓰기나 코딩과 다를 바가 없다. 나는 주어진 플랫폼안에서 주어진 형식에 따라 주어진 행동들을 나열했고 그러면 그 행동들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내가 볼 수 없는 곳에서 나의 행동들은 컴파일러를 거치고 번역되어 행동으로 실천된 것이다. 수화가 언어이듯이 이런 행동들도 모두 의미를 전달하는 언어활동이다. 다만 우리는 지극히 추상적인 수준의 언어를 쓰고 있을 뿐이며 종종 그것이 언어활동이라던가 코딩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할 뿐이다. 컴퓨터의 발달에 의해 우리는 굉장히 복잡한 행위를 그저 클릭 한번으로 할 수있게 된 것뿐이다.
인공지능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인가라고 묻는다. 나는 이 질문에 올바른 답은 그렇다라고 믿는다. 하지만 지배가 무슨 뜻인가를 오해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이미 문자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우리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개념들은 전부 문자라는 형태로 문명을 쌓아올려 만들어 진것이며 후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입된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언어때문에 우리는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고 사회생활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것은 해로운 일이니 가급적이면 자연그대로의 인간으로 살아가자고, 문자에 지배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사람들은 인공지능이라고 하면 그것이 인간보다 더 뛰어날까 아닐까에 신경쓰고 인공지능이 자아를 가질까 말까에 주목하는 경향이 있다. 첫번째 질문은 어리석은 것이고 두번째 질문은 흥미로운 것이지만 별로 핵심적인 것은 아니다. 어차피 인간이 만든 자동차나 비행기나 계산기는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지성이 인간의 것이라는 생각도 완전히 맞는 생각은 아니다. 지성은 전부가 아니면 대부분 문자라는 인간의 도구가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란 사실은 자동차를 탄 사람처럼 사이보그다. 지성은 인간의 유전자안에 있어서 인간이 본래부터 가지고 태어나는 유전적 특징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사회라는 토양위에 건설되어진 인위적 건축물이며 다시 말하지만 문자라는 미디어에 크게 의존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인공지능이 자기 의지를 가지게 될까? 그건 요점을 비켜나가는 질문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자기 의지가 없어도 인공지능이 기계로 남아도 인공지능은 충분히 위험하리만큼 강력하다. 인공지능은 이제까지의 언어보다 훨씬 더 상위의 언어이기 때문에 효율이나 복잡성에 있어서 이제까지의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건축물이나 기계보다 훨씬 더 엄청난 규모의 것을 만들어 낼 수 있게 해줄 것이다. 슈퍼지능의 출현은 인공지능이 자기 의지가 있는가 없는가와 상관없다. 문자는 문학작품만 만든게 아니다. 로켓도 핵폭탄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도 파괴적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쓰일 수 있다. 전 인류를 다 죽일 수 있는 바이러스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다던가 하는 일 말이다. 뛰어난 문학작품도 사람을 자살에 이르게 할 수 있고 무기는 말할 것도 없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도 인간을 죽일 능력을 충분히 가지게 될 것이다.
데이터를 다루는 방식의 차이는 우리의 시야를 크게 바꾸게 된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조선왕조실록이 디지털화하기 전에는 그 안에 코끼리가 몇번 나오는지, 어디에 나오는지를 찾는 일은 엄청난 작업이었다. 하지만 디지털화를 하고 나면 검색만 하면 바로 결과가 나온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조선시대에 대해 훨씬 명료한 인식을 하게 된다. 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물론 이같은 것은 정말 시작의 시작에 불과하다. 인공지능이 만들어 가는 세계의 언어는 규모는 물론 질적으로도 현재의 언어와는 크게 다르다.
문자는 아주 뛰어난 기록방법이었지만 실은 한계도 분명한 것이었다. 이는 고대인들도 잘 알았던 것이다. 장자 외전 천도편에는 환공과 대화를 나누는 수레바퀴 기술자 윤편의 이야기가 나온다. 성인의 글을 읽고 있던 환공에게 윤편은 그것이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환공이 그것이 왜 그렇냐고 묻자. 윤편은 답한다. 자신이 수레바퀴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데 말로 다 전할 수 없는 것이 많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문자로 기록된 것은 옛사람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문자가 이러한 한계를 가졌다는 것 그리고 인간의 이성이라는 것이 대부분 문자라는 미디어로 만들어 진 것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우리는 어쩌면 인간 이성의 한계를 이러한 예를 통해서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르고 우리가 왜 슈퍼지능을 논하게 되는가를 알게 될 것이다.
자동차 운전을 글로 배울 수는 없다. 지금은 세계 챔피언을 바둑으로 이기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있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 지에 대한 문자로 된 설명은 없다. 인공지능은 인간의 문자로 기록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방대한 데이터를 정리하고 그에 기반해서 결과를 뽑아준다. 인공지능의 출현은 인간이 누적시킨 데이터의 양이 증가했기 때문에 생기는 필연적 결과일 수 있다. 이제 어느 인간도 인간이 누적시킨 데이터를 다 볼 수는 없다. 그것이 설사 인간이 아는 문자로 되어 있어도 말이다. 하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기계가 기록하고 기계만이 분석할 수 있는 데이터의 양은 무섭게 증가하고 있다. 구글은 그 방대한 데이터를 저장하기 위해 따로 발전소를 세울 정도다.
문자를 내재화한 인간을 사이보그 1이라고 부를 때 인공지능을 내재화한 인간을 나는 사이보그 2라고 부른다. 사이보그 1의 세상과 사이보그 2의 세상은 비교가 되질 않는다. 타고난 대로 사는 원시인이 비행기를 타고 다니고 폭탄을 쓰는 사이보그 1을 보면 마법을 쓴다고 생각하거나 신과 같다고 생각할 것이다. 사이보그 2는 사이보그 1에게 그렇게 보일 것이다. 앞에서 말한대로 지금의 인간은 사이보그 1이고 그 사이보그 1의 합리성은 대부분 문자라는 매체의 한계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사이보그2의 이성은 따라서 사이보그 1의 이성과는 기초부터 다른 차원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언제 이런 시대가 오는 것일까? 인공지능에 대해서 생각할 때 어느 순간 위대한 지성을 가진 인공지능이 눈을 뜨고 순식간에 세계는 바뀌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은 두 가지 이유로 오해일 가능성이 크다. 하나는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물리적 변화는 점진적인 것일 거라는 점이다. 데이터는 이미 농축되고 있고 시스템은 발달하고 있다. 이미 그 과정은 시작되었다. 음성인식을 하는 스마트폰은 이미 새로운 시대로 우리를 이끌기 시작한 것이다. 배달앱을 쓰거나 SNS를 하거나 클라우드 펀딩에 참여하고 유튜브를 보는 것은 우리를 미래문화로 천천히 이끌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세상이 하루 아침에 변한다고는 느끼지 못할 것이다. 다만 우리의 인식변화는 순식간일 수 있다. 도무지 이해가 안가는 세상의 흐름이 어느 순간 즉 인공지능이 내재화되는 순간 우리에게 다르게 보일 수 있다. 그 순간이 우리가 사이보그 2로 새롭게 태어나는 순간일 것이다.
두번째 이유가 더 중요하다. 우리는 사람의 역할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지금의 인류문명은 금속활자의 발명으로 일반대중이 쓰고 읽게 된 사건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이때문에 금속활자를 쓰는 인쇄술의 발전은 지난 천년이래 최고의 발명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제대로 사이보그 1이 되지 못했던 다수의 대중이 사이보그 1으로 완성된 사건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쓰고 읽기가 가능해 지면서 사고의 폭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빈방에 서있는 인쇄기가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고 뉴튼 물리학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니다. 영어를 쓴다고 해서 바로 세익스피어의 작품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을 내재화한 사람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언어는 그걸 쓰는 사람을 요구한다. 그 둘이 결합되어야 그 언어가 가진 진정한 힘이 해방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이 언어라면 그 언어를 쓰는 사람들, 그 언어를 내재화, 문화화하는 사람들의 존재도 그 언어의 발명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리고 그것이 갖춰졌을 때 인공지능의 잠재력은 현실화될 것이다.
이는 문자라는 미디어가 인공지능에 비해 상대적인 단점을 가졌듯이 인공지능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보다 분명해 진다. 인공지능도 역시 기계다. 그래서 분명한 규칙이 있거나 방대한 데이터가 있는 경우가 아니면 인공지능의 출력은 의미를 잃는다. 즉 1회적이고 규칙이 없는 것을 컴퓨터로 어떻게 다뤄야 할까에 대해 우리는 아직 답이 없다. 당신이 연애를 인공지능의 조언대로 한다면 그건 상대방을 수많은 사람의 평균에서 별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로 여긴다는 뜻이다. 따라서 당신의 연애상대가 가진 특이성이야 말로 당신이 그나 그녀를 사랑하는 이유라면 인공지능의 조언에 따른 연애는 그다지 성과가 좋지 못할 것이다. 결국 인간이 중요하다. 인공지능은 도구일 뿐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알파벳이 저절로 시가 되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유다. 우리는 여전히 시인이 필요하다.
새로운 문화는 충돌을 만들기 마련이다. 서양문명을 가지고 아메리카 대륙에 서양인이 상륙한다고 인디언들이 모두 서구화된 것은 아니다. 기독교의 수장인 교황이 지배하던 유럽이 자본주의를 추종하는 국가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게 될 때도 그 변화가 순조로울 수는 없었다. 국가는 하나의 책이며 사이보그 1의 이성의 결과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문화가 국가를 온전히 바꾸지 못한다면 국가가 새로운 조직과 충돌하게 되는 일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최근 비트코인이 세계 경제를 뒤흔들고 있다. 화폐발행은 국가의 가장 기본적 기능이고 가상화폐는 국가의 경계를 넘어간다. 이런 가상화폐류가 새로운 공동체를 움직인다면 국가와 그 새로운 공동체는 충돌하게 되지 않을까?
그 충돌의 중간과정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이 충돌의 최종적 결과는 뻔하다. 물론 사이보그 2가 이긴다. 슈퍼지능이 낡은 지능과의 싸움에서 질 리가 없다. 그리고 이것은 인공지능의 승리만은 아니다. 창조하는 인간의 승리다. 사이보그 2가 된 인간이 인공지능이라는 언어를 써서 창조해 나갈 세계는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이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인공지능의 가능성이 대단해도 그것을 써서 창조하는 인간이 없다면 성취는 미미할 것이다.
'주제별 글모음 > 인공지능에 대한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비환원주의라는 유령의 얼굴 (0) | 2021.02.21 |
---|---|
AI와 문학적 상상력 (0) | 2021.02.11 |
인공지능은 슈퍼지능인가? (0) | 2020.05.22 |
동적 평형과 언어 그리고 인공지능 (0) | 2019.09.25 |
인공지능으로 도달하는 진리 (0) | 2019.08.1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