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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비환원주의라는 유령의 얼굴

by 격암(강국진) 2021. 2. 21.

2021.2.21

환원주의란 어떤 대상을 그 부분들의 합으로 정의하고 이해하려는 생각을 말한다. 일찌기 노벨 화학상을 받은 로얼드 호프만은 환원주의적 이해에 반대하면서 이해에는 환원주의적 이해 즉 수직적 이해가 있는가 하면 그것과 다른 대상들이 가지는 관계를 통해 만들어 지는 수평적 이해인 비환원주의적 이해도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생명의 음악을 쓴 데니스 노블은 리처드 도킨스가 쓴 이기적인 유전자는 생명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만을 의미한다면서 비환원주의적인 즉 전체주의적이고 (holistic) 시스템적인 생명의 이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뿐아니라 20세기 내내 여러 책의 주제가 되었던 인문학과 과학의 분열논쟁도 이와 관련이 있다. 과학은 환원주의적 이해의 절정이며 인문학적 이해나 예술적 이해는 시집을 출간하기도 했던 로얼드 호프만이 말한 수평적 이해와 적어도 같은 계열이기 때문이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사람이 이 환원주의나 비환원주의라는 말들에 대해 이해하기 어렵다는 느낌을 받고 있다면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건 모든 사람에게 그렇다. 비환원주의란 현대문명속의 유령과 같다. 여러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고 이따금씩 환원주의를 비판한다. 하지만 현대 문명은 환원주의에 아주 깊게 매몰되어 있으므로 비환원주의에 대해 들어도 이해를 하기 어렵거나 자꾸 잊어버리게 된다. 마치 누군가 봤다는 사람도 있고 나도 언젠가 본 것도 같은데 진짜 있는지는 의심되는 유령처럼 말이다. 하지만 하나의 패러다임속에 있을 때 그 패러다임의 바깥에 있는 것은 본래 유령처럼 보이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유령의 배회란 패러다임의 변화가 임박했다는 징조일 수도 있다. 

 

우리가 오늘날 환원주의의 패러다임속에 살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환원주의적 이해가 가지는 하나의 강점 때문일 것이다. 환원주의적 이해는 누적이 된다. 하나를 부분으로 나누는 구도는 계속 수정되면서 개량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수학이나 과학에 대해 말할 때 우리는 고대 그리스 시대의 그것을 유치한 것으로 말한다. 그리스의 천문학보다 뉴튼의 물리학이 더 뛰어난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시나 철학에 대해 말할 때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공자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현대 사회에 몇명이나 될까? 지혜가 무엇인지 애매하다고 해도 이 질문은 무의미하지 않으며 우리는 인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비슷한 질문을 마찬가지로 던질 수 있다. 즉 인생이나 음악이나 사랑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환원주의가 거둔 승리는 그다지 대단하지 않았고 우리는 여전히 몇백년이나 천년전의 어떤 천재가 지금도 살아있었으면 한다. 그들의 이해가 현대인의 이해보다 더 뛰어난 것같다. 

 

환원주의의 강점이자 약점은 주어진 대상을 단순화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는 이유는 그럴 때 일이 더 쉬워지기 때문이 아닌가. 우리는 수많은 사실들을 관찰한다. 하지만 그 많은 사실들은 환원주의적 이론에 의해서 압축되어 설명될 수 있다. 환원주의의 왕자는 물리학이다. 물리학적 자연법칙은 얼마나 간결한가. 뉴튼의 물리법칙이나 맥스웰의 전자기법칙은 그저 몇줄에 지나지 않지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을 설명해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수직적이건 수평적이건 이해란 결국 정보의 압축이다. 아주 많은 정보를 어떤 방식으로 압축하여 간결하게 표현할 수 있거나 우리가 이해하려고 하는 대상을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나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통해, 예를 들어 유비(analogy)에 의해 더 잘 알 수 있을 때 우리는 이해를 했다는 성취감을 느낀다. 

 

환원주의는 대상을 분해하고 사물의 근원적 요소를 지목함으로해서 세상을 간단히 볼 수 있게 만든다. 물론 이 과정은 간단하지도 당연하지도 않으며 우리가 쓰는 미디어에 크게 의존한다. 수없는 사람들이 이 세상을 관찰했지만 뉴튼 이전에 뉴튼의 법칙을 발표한 사람은 없었다. 수 많은 정보들은 기록되고 누적되었으며 정리되고 압축되었다. 그 긴 과정을 거친 후에 우리는 뉴튼 같은 천재를 만나서 아주 간결한 환원주의적 이해에 도달하게 된다. 그래서 문자의 발명과 수학의 발전따위는 환원주의적 문명이 발전하는데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런데 이것을 뒤집으면 우리는 왜 환원주의가 언제나 성공하지 못하는지 그리고 왜 비환원주의는 아직도 유령인지를 알 수 있다. 환원주의건 비환원주의건 그것의 한계는 인간의 한계다. 인간이 정보를 기록하고 정리하고 새로운 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자는 전체주의적(holisitic) 관점은 말은 그럴 듯하지만 인간의 정보처리 능력의 한계때문에 공허해진다. 이것이 비환원주의가 여전히 유령인 이유다. 환원주의 역시 아주 복잡하고 인간의 언어로 기록하는 것이 어려운 것 그리고 재빨리 변하거나 세상에 단 하나 밖에 없어서 많은 관찰이 있을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 이런 예에는 사회나 뇌같은 것이 있는데 그래서 사회과학이나 경제학 그리고 뇌과학같은 것이 물리학같은 것과는 달리 발전이 느린 것이다. 하나의 사회에 대한 환원론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데이터가 필요한 것일까? 그런 데이터는 인간의 언어로 기록가능한 것일까? 설사 기록가능하다고 해도 사회 자체가 백년쯤 지나면 완전히 달라진다고 할 때 그 기록과정이 백년이 넘게 걸린다면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대안은 뭘까?  이 세상의 누구도 아직은 환원주의를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비환원주의를 제시하고 그것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말해 패러다임의 전환은 본격화되지 못했고 비환원주의는 여전히 유령으로 살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인공지능이 발달하는 것을 볼 때 우리는 비환원주의의 한가지 또렷한 형태가 시작하는 것을 본다. 그것은 바로 빅데이터가 비환원주의의 핵심이 되게 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바람직한지, 사람들의 찬성을 얻을지 나는 모른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은 이것에 반대할 것이다. 

 

인공지능이 발전하면서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정보처리가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기계가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며 압축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의 결과물을 우리는 흔히 인공지능이라고 부른다. 기계학습이란 대량의 데이터 안에 있는 법칙을 기계가 학습에 의해서 찾아내는 것이고 그렇게 학습된 기계를 우리는 흔히 인공지능이라고 부른다. 유명한 딥러닝머쉰인 알파고도 이 예에 속한다. 

 

빅데이터를 통한 이해와 전통적인 즉 환원주의적 이해는 서로 다르다. 하나의 사회에 대한 환원주의적 이해는 앞에서 말한대로 영 신통하지가 못했다. 하지만 만약 기계가 이 사회에 대해 엄청난 양의 정보를 엄청난 속력으로 수집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보자. 그렇게 해서 그 안에서 법칙을 찾아내는 것이다. 좋은 예는 주가 예측이나 선거 예측이다. 인터넷을 떠돌아다니는 정보들을 모두 수집하는 구글같은 회사가 그 데이터를 모두 빠른 속력으로 소화해 내서 주가를 예측하고 선거결과를 예측할 수 있지 않을까? 즉 빅데이터에 기반한 인공지능은 환원주의적 한계를 뛰어넘는 새로운 세계를 열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세상에는 뛰어난 인공지능이 자아를 가지고 인간을 멸망시킬거라는 식의 공포가 떠돌아 다닌다. 여기서 굉장히 강조되는 부분은 자아다. 즉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공지능이 인간을 해하면 어떻하냐는 것이다. 나는 이에 대해 늘상 비판해 왔는데 그런 공포는 문제의 본질을 비켜나고 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본질은 비환원주의일 수 있는데 자아니 자유의지니 하는 것에 눈이 팔리면 그것을 보지 못하게 된다. 

 

여기 인간이 만든 모든 데이터 베이스를 다 기억하고 그것을 학습한 인공지능이 있다고 하자. 사실 더 개량되어야 할 뿐 그런 인공지능은 이미 있다. 오픈AI가 만든 GPT-3는 바로 이런 빅데이터를 학습한 인공지능이다. 아래의 예들을 보면 알겠지만 이 인공지능은 이미 상당히 심오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질문을 인간과 나눌 수 있다. 여기서 이 인공지능이 자아나 자유의지가 있냐라는 질문은 흥미롭지만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니다. 심지어 저 대화가 부자연스럽다던가 아무 심오함이 없다던가 하는 것도 핵심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엄청난 크기의 데이터베이스를 읽고 학습하는 인공지능은 이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 인공지능의 답이 수 많은 인간들이 한 말을 종합하여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걸 '지나지 않는다'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확실히 미래에도 어떤 특정한 분야에 대한 의견을 들어야 할 때 인공지능의 의견은 그 분야 최고의 전문가가 내는 의견보다 못할 수 있다. 전에 소개한 경우처럼 가수의 노래를 재현하는 인공지능의 노래가 최고의 가수의 노래보다는 못한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성과 전문화때문에 우리 모두는 모든 분야가 아니면 대부분의 분야에서 최고 전문가가 아니다. 다시 말해 인공지능은 거의 대부분의 분야에 있어서 우리들 중의 하나보다는 더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답을 내놓을 수 있다.

 

이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인공지능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해내는 인간이 있다는 말과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못하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 자동차는 지능분야에서는 인간보다 못하지만 당연히 인간보다 훨씬 더 빨리 달린다. 덕분에 운전을 하는 인간의 능력은 크게 강화된다. 정보처리분야에서 인간이 몇가지 더 뛰어난 곳이 남는다고 해도 대부분의 것은 인공지능이 인간의 한계를 빠르게 추월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인간의 강화다. 

 

알파고가 이세돌을 이긴 이래 바둑을 둘 지 모르는 나라도 인공지능프로그램만 있으면 세계 최고수를 이길 수 있게 되었다. 즉 인공지능이 어떻게 그렇게 바둑을 두는지 이해를 못하는데 나는 세계 최고수를 이긴다는 것이다. 방대한 데이터 베이스에 기반한 판단은 이미 인간의 판단능력과 인지능력의 한계를 넘어선다. 만약 경험적으로 통화정책 같은 것을 인공지능에게 판단하게 했더니 훨씬 더 결과가 좋더라고 하면 우리는 인간관리가 통화정책을 결정하게 해야 할까 아니면 인공지능이 시키는 것을 인간이 실행해야 할까?

 

자유의지라던가 기계에 의한 인간의 지배같은 주제에 몰입하는 사람은 이런 질문을 받으면 그쪽으로 생각이 마구 펼쳐지겠지만 진정해야 한다. 사실 사진기가 처음 나왔을 때 사진을 찍으면 영혼을 빼앗긴다고 믿었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때문인지 요즘도 사람이 보면 보이지 않는 심령현상이 사진에는 찍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SF 작가인 아서 C 클라크는 충분히 발달한 과학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과학의 3법칙 중의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인공지능을 이해한 사람들은 인간처럼 말하는 기계에 놀라지 않는다. 계산기는 계산기를 만든 인간보다 계산이 더 빠르지만 그것때문에 인간이 공포를 느껴야 할 필요는 없다. 인간이 원자폭탄을 만들었을 때 공포를 느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공포이지 원자폭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인간을 지배할 것을 걱정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환원주의는 어쩌면 이미 우리 시대에 그 한계에 도달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환원주의와 비환원주의의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지점에 우리가 도달한 것일 수도 있다. 전통적인 환원주의의 한계는 인간의 한계다. 인간이 문자라는 미디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를 현대인은 이미 넘어섰다. 더이상의 정보처리가 한계에 도달해서 19세기이래 전문가만들기를 도입했고 온갖 분야의 전문화가 이뤄지고 컴퓨터의 발달도 있었다. 그래도 최근까지는 여전히 인간이 정보를 컴퓨터에 수동으로 입력해줬다. 

 

이제 컴퓨터는 스스로 읽는다. 음성인식과 문자인식이 보편화되어 요즘 사람들은 그걸 당연시 여기지만 사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이 기술의 보편화 이전에 전세계의 도서관에 있는 책들을 디지털화하려고 했을 때 그 말은 인간이 그걸 전부 타이핑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환원주의의 벽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이미 깨어지고 있다. 우리가 도달하려고 하는 세상은 인간의 인식능력과 기억능력을 한참 상회하는 복잡성을 가진 데이터들이 저절로 움직이면서 합성되어지고 압축되어지는 곳이다.

 

나는 내가 10년 이상동안 쓴 글을 블로그에 가지고 있다. 그리고 10년 이상전에 쓴 글을 읽으면서 이따금은 내가 이런 생각을 했구나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만약 내가 한 말과 내가 쓴 글을 모두 기억하고 그것에 따라 대답하는 기계가 있다면 그 기계는 일정부분 나 이상으로 나다울 수도 있지 않을까? 

 

이 비환원주의적 나는 누적되어 구축되어진 것이다. 나는 끝없이 더 많은 데이터를 생산해서 그 데이터 베이스에게 내가 누구인지를 학습시키고 있다. 과거에는 어떤 사람이 그걸 전부 읽기도 어려웠을 테지만 설사 그렇게 한다고 해도 그 사람의 제한된 기억력과 분석력으로 나에 대해 이해했을 것이다. 그는 아마도 효율적으로 그렇게 하기 위해 나라는 사람에 대한 환원주의적 분석을 진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훨씬 더 잘 그런 과업을 할 수 있다면 그 인공지능은 나를 다른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이같은 작업을 여러가지 문제에서 진행할 수 있다. 우리의 환원주의적 이론말고 데이터를 기계에 누적시키고 그 기계가 현실을 모사하게 하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데이터를 모두 집어넣으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 중국의 사회적 불안이 생겨나는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구에 대한 데이터를 모두 집어넣으면 우리는 과학자의 이론이 아니라 이론없는 데이터와 인공지능을 통해 지구환경의 미래에 대해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오래된 난제인 단백질 접기 문제를 인공지능이 해결했다는 뉴스가 있었다. 일단 이렇게 인공지능과 데이터베이스로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례가 계속 나오기 시작하면 환원주의의 패러다임은 무너질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익숙한 환원주의적 패러다임을 벗어나 있다. 이것은 이론이 없는 답이고 비환원주의라는 유령의 보다 또렷한 얼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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