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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장자의 AI, 플라톤의 AI

by 격암(강국진) 2021. 3. 16.

2021.3.16

세계가 서구에 의해 주도되는 세상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서구의 사고를 수입하고 내재화하는 일이 많다. 좋은 예가 AI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는 서양이 가진 AI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수입하고 그 질문을 우리도 추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동양 문화와 서양문화는 다른 점이 있다.  서양사람들은 이러한 차이를 동양사람들은 순응하고 복종하는 사람들이라고 비하해서 말하는 일이 많지만 그것은 그들의 오만과 환원주의적인 사고가 합리적 사고의 전부라고 믿는 그들의 문화적 편향때문이다. 완전히 새로운 수준의 문화가 펼쳐지는 미래에서 그것은 서양의 발목을 잡을 것이며 AI 분야가 그 부분에서 대표적인 분야가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AI에 대해 물어보자. 서구가 가진 AI에 대한 관점은 어떤 것인가? 서양 사람들은 사회를 생각할 때 먼저 개인을 생각한다. 문학을 말할 때도 개인을 말한다. 이것은 전형적인 환원주의적 사고로서 일단 세상을 구성하는 부분에 주목하고 그 부분을 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사고의 전개를 생각해 보자.

 

여기 하나의 수소원자가 있다. 이 수소원자는 외부로부터의 모든 영향에서 일단 고립되어 있다. 이 고립계속에서 수소원자를 이해하고 우리는 나중에 이 수소원자가 세상과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를 생각하자. 

 

우리는 이 예에서 수소원자를 한국인으로 바꾸거나 AI로 바꿀 수도 있다. 즉 우리는 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상황을 고립계를 생각해서 단순화시킨다. 세상의 한 조각이 홀로 그 고립계에 있을 때 그 조각의 정체성이 무엇인가라는 본질주의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심지어 추상적인 대상에도 적용되는데 예를 들어 사회주의나 국가에 대해 먼저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라던가 국가란 무엇인가같은 본질주의적인 질문을 던지고 그것을 정리한 후에 한국사회에서의 사회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던가 유럽사회에서의 사회주의는 어떻게 작동하는가라는 식으로 질문을 펼쳐나가는 것은 그 방식이 정확히 같다. 이러한 사고 방식은 서구 문명의 시조라고 할 수 있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에서부터 발견할 수 있으니 이것은 서구 문명에 아주 뿌리 깊이 박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비환원주의적인 사고 방식은 이것과 어떻게 다른가. 비환원주의적 사고 방식은 환경을 배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며 애초에 세상의 많은 것을 관계의 결과물이나 표현으로 생각한다. 내가 좋아하는 예는 이런 것이다. 여기 토끼 모양의 풍선이 있다고 하자. 환원주의적 생각은 저기 어떤 특정지점에 토끼 모양의 풍선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풍선의 토끼 모양이란 풍선의 내부압력과 풍선의 외부 압력이 가지는 동적 평형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래서 진공으로 그 토끼 풍선을 가져가면 풍선은 터져버리거나 적어도 매우 다른 모양을 가지게 될 것이다. 즉 풍선은 바깥과 안쪽의 경계선이며 토끼 모양이라는 것은 그 자체가 존재가 아니라 안과 바깥의 관계에 대한 하나의 표현이다. 

 

우리가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둘러보기 시작하면 많은 것들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기 시작한다. 개인이 그렇고 국가가 그러하며 AI가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여 본질주의적으로 파악되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치 풍선의 토끼 모양처럼 안과 바깥의 동적인 평형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것이며 존재라기 보다는 관계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고립계에서 파악하는 것은 때로 큰 오류를 범할 수도 있는 근사에 불과하다. 인간을 진공속에 놓으면 시체가 되어 버린다. 공기가 있어도 인간을 장기간 절대적 고독속에 놓으면 미쳐 버리거나 마찬가지로 죽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파악한 인간의 시체를 사회환경에 되돌려 놓아봐야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 

 

언제나 내가 하는 경고지만 이런 말들이 과학이나 서구 문화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다. 환원주의는 서구만의 것이 아닐 뿐더러 환원주의는 위대한 성공을 만들었다. 그것은 다른 무엇보다 수학이라는 정밀한 언어가 서구에서 발달한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알파벳이라는 문자가 중국의 한자보다 더 좋은 문자라서 그런 것이기 때문일지 모른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환원주의나 수학의 힘이 무한정은 아니며 적어도 유일한 관점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AI의 시대에 중요한 문제다. AI의 보편화는 사실 환원주의적 사고의 한계가 극에 도달했기에 나타나는 현상일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데이터를 다 처리할 수 없는 것이다. 

 

서구의 환원주의적 관점은 AI를 고립적으로 파악하여 AI가 의식을 가지는가 그렇지 않은가같은 질문을 던지게 한다. 그러나 비환원주의적 관점은 AI를 일종의 매우 추상적인 문자나 언어로 파악할 것이다. 즉 AI는 존재가 아니라 관계를 만들어 내는 통로다. 이를 책의 예로 생각해 보자. 세상의 고전이 된 책들은 인간 정신의 핵심을 담고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어떤 의미로 우리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이라던가 장자의 장자같은 책들이 세상을 지배하고 뒤집는 것을 보아왔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한 권의 책이 자의식을 가지는가 아닌가, 이 책이 미래에 인간을 지배할 것인가 아닌가 같은 질문에 몰두하는 것은 명확히 우스운 일로 보인다. 아무리 위대한 책도 읽는 사람이 없으면 쓸모가 없다. 즉 인간사회와 독립적으로 파악한 책의 의미란 거의 있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는 AI가 인류를 지배할것이다같은 말을 단순히 웃어넘기지는 말아야 한다. 거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비슷한 잘못을 지금 범하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자는 사람의 마음을 홀리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면서 그것을 경계하고 반대한다고 주장하는 고대의 사람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은 그런 태도때문에 멸망했을 것이다. 살인의도를 가진 터미네이터가 세상을 멸망시키는 상상을 하면서 인공지능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공지능을 우리가 키우는 개나 고양이처럼 생각하면서 그들의 감정과 권리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가? 

 

자율운전 자동차에 대한 수많은 논의에서 질문은 종종 이 AI 자동차가 사고를 낼 것인가 아닐 것인가에 촛점이 맞춰져 있다. 사람들은 운전자를 대체하는 AI가 사고를 내면 어떻게 하냐는 식으로 말한다. AI를 인간과 인간을 이어주는 환경과 관계로 파악하기 보다는 인간과는 완전히 독립되어 행동하고 인간을 완전히 대체하는 어떤 것으로 파악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말하는 진정한 자율주행 AI는 절대로 절대로 사고를 내지 않는 기계를 말한다. 그런데 그런 건 지금 없고 미래에도 세상에 없다. 그런 사고는 극단적이다. 덕분에 사람들은 지금 열배는 안전한 길이 있는데 저 길에서도 사람은 죽는다면서 열배는 더 위험한 길로 가자고 말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의 오류를 범하기 시작하고 있다. AI의 자율주행은 이미 그런 것이 아니라면 빠른 시일내에 특정한 환경속에서는 인간의 운전보다 더 안전한 것이 될 것이다. 사실 AI가 아니라 우리는 자동차 자체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사람을 죽이는 자동차가 도로를 달리게 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 통했다면 세상에 자동차가 없을 것이다. 자동차는 백년동안 발전했지만 지금도 전쟁으로 죽는 사람의 수 이상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 우리는 자동차를 잘 쓰려고하고 있을 뿐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AI가 인류를 지배하거나 멸망시킬 것이라는 예측은 웃어넘길 수 있는 예측이 아니라 정확한 예측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AI가 천국을 가져올 것인가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둘 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문자나 책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표현과 인공지능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표현을 나란히 놓은 다음에 문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표현에 대해 웃게 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문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비환원주의적 사고방식이 뭔지를 생각해 보라. 인간은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핵심은 DNA가 아니다. 인간은 동적평형의 결과이고 세상이 만들고 유지하고 있는 관계의 표현이다. 지금 우리가 말하는 인간은 특히 정신적으로 말했을 때 다른 어떤 것보다 문자라는 발명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이 존재하는 동적평형의 균형점이 문자의 발명이래 크게 움직였다고 할 수있다. 얼마나 크냐면 침팬지나 다름없이 초원에서 살던 인간이 화성까지 로켓을 보낼 정도로 크게 바뀌었다. 

 

AI는 우리가 말하는 지금의 인류를 멸망시킬 것이다. DNA차원에서 인간 종족이 멸망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한번 인간의 의식과 문화는 크게 비약하게 될 거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그건 인류멸망처럼 보일 수 있다. 고대의 원시인이 현대인을 볼 때 이게 똑같은 인간으로 보이지 않을거라는 점에서 그렇다. 미래의 시각으로 그걸 보면 AI가 인류를 지배한다는 생각은 다시 웃기는 생각이 될 것이다. AI가 인류를 지배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이미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지배라는 생각자체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지배란 말이 환원주의적 사고이기도 하다. 

 

서구는 환원주의적 사고로 아주 크게 성공했기 때문에 그것에 너무 중독되어져 있다. 우리는 그걸 이번 코로나 사태에서 잘 보았다. 코로나 질병을 대처하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문제다. 그걸 이해한 한국인들의 행동에 대해서 유럽인들이나 미국인들 중에는 한국인들은 집단주의적이고 공권력에 순응을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저렇게 행동한다고 말하는 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불과 몇해전에 전국적 시위로 대통령을 탄핵시킨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개인을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집단적으로 어리석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때 존경받던 유럽이나 미국의 정치를 아직도 존경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러한 존경은 적어도 이번 코로나 사태이후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마스크쓰기 같은 기본적인 것에 대해서도 논쟁을 하는 것이 그 잘난 서구의 정치인들이니까 말이다. 지금은 고립되어 어리석어진 대중이 멍청한 사이비교주같은 사람들을 국가의 정상으로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서양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이 코로나시대이후 말하고 있는 것을 들으면 도무지 이것이 21세기인지 알 수가 없다. 코로나 검사를 안해야 문제가 좋아진다는 식의 말을 믿는 일본인들은 참으로 많다. 민주주의의 본질도 독립적 개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건전한 소통에 있다는 것을 이번 코로나 시국은 잘 보여주고 있다. 

 

과학하기와 과학은 서로 다르다. 하지만 완성된 과학은 패러다임에 사람을 가두려고 하는 특징을 가진다. 즉 그 패러다임의 바깥을 볼 수 없게 만든다. 이것이 과학을 무시해야 할 이유는 아니다. 과학의 패러다임을 뛰어넘는 사람은 정말로 가끔 오랜 시간이 지나야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환원주의 문화의 정수라고 할 과학은 이런 성질을 가진다. 

 

비환원주의적 사고를 잘 보여주는 동양의 책중의 하나는 장자다. 장자는 틀을 깨는 것, 자신의 한계를 넘는 것, 새로운 세계에 살고 새로운 전망을 가질 때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 된다는 것을 계속 해서 말하고 있다. 게다가 장자는 정확히 비환원주의적으로 우리 모두는 독립적 존재가 아니라 비환원주의적으로 연결된 존재라고 말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장자의 제물론에는 피리소리를 듣는다는 자기의 말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하늘이 부는 피리소리를 이렇게 말한다.

 

"온갖 것에 바람을 다르게 불어넣으니 제 특유한 소리를 내는 것이지. 모두 제 소리를 내고 있다고 하지만 과연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한국인은 이런 메세지에 익숙하다. 비록 장자를 읽지 않는다고 해도 장자는 불교에도 영향을 주면서 이 땅에 수천년간 존재해 온 책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자기의 틀에 갇혀서 몰락하고 있는 나라들을 많이 보고 있다. 그 대단한 잠재력으로 그들이 다시 한번 자기 틀을 깨고 새로운 나라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의 선진국들은 대개 보수화되어 자기의 관점으로만 세상을 보게 된 것같다. 지금은 자기의 틀을 깨고 새로운 전망을 가지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 가는 것이 아주 중요한 시기다. 세상은 원래 이렇다는 생각에 빠져 들어서는 안된다. 환원주의의 틀에 갇힌 서구가 주춤할 때 과감히 앞으로 나갈 수있는 사회가 있다면 그 사회는 다가올 2천년을 지배하는 문명을 만드는 사회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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