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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장님, 원자론 그리고 기계의 마음

by 격암(강국진) 2021.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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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3.22

장님이 무지개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있을까? 확실히 이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뭔가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을 너무 쉽게 단언해서는 안된다. 좀 더 깊게 생각하면 이야기는 달라지기 때문이다. 시각적 체험을 하지 못하는 장님은 정말 이 세상에 대해서 절대로 얻을 수 없는 정보가 있는 것일까? 현실적인 인간의 한계나 시간의 한계따위를 논하는 차원이 아니라 정보적이고 원천적인 차원에서 말이다. 

 

우리가 물리학의 원자론을 생각하면서 인간의 오감을 생각하면 이러한 질문은 새로운 관점을 얻게 된다. 이 세상은 원자로 이뤄졌다는 물리학에 따르면 사실 인간의 오감을 통한 체험이란 다 같은 것이다. 왜냐면 실제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은 원자의 움직임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자 그 자체는 오감의 체험 너머에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소리라는 것은 원자론에서 보면 그 자체로 존재하는  물질이 아니라 현상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즉 공기분자들이 움직여서 우리의 고막을 두드리는 현상을 우리는 소리로 체험하는 것이다. 우리가 소리를 들을 때 거기 존재하는 것은 공기 분자의 움직임이다. 여기서 우리가 움직인다라는 동사를 소리라는 명사로 파악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처럼 실제로는 어떤 과정이고 균형인 것 즉 동적인 움직임인 것을 우리는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파악하는 일은 자주 일어난다. 나의 사랑을 너에게 준다같은 표현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혼란이 자주 생긴다. 

 

다시 오감으로 돌아가서 이번에는 촉각을 생각해 보자. 뜨겁다라는 우리의 촉감은 뭘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원자나 분자의 움직임이 빠르다라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물질의 온도란 물질이 에너지를 전달하는 정도를 말하는 것이다. 후각이나 미각도 결국 어떤 분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지했다는 뜻에서 분자의 움직임과 존재에 대한 것이며 시각은 원자에 대한 것이 아니지만 광자 혹은 빛이 우리의 망막에 도달했다라는 물리적 현상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본질적이다. 그것은 꼭 시각적 체험일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스 부호같은 신호를 스피커에 연결하면 우리는 뚜뚜뚜 뚜뚜 하는 식의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 소리자체가 모르스 부호의 정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종이위에 써져있는 신호를 봐도 우리는 그 신호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다시 장님의 문제로 돌아가 보자. 우리는 정말 장님은 시각적 정보가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떤 부분은 결코 알 수 없다라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질문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인다면 장님이 무지개의 아름다움을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은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마치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 수학적으로 표현된 물리학 법칙을 봐도 그 법칙의 의미를 모른다는 말과 같다. 즉 의미자체는 그 물리학 법칙 내부에 있는데 그걸 보는 사람의 분명한 한계가 그 법칙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을 뿐이다. 원자론적으로 말했을 때 인간의 오감이란 똑같은 세계를 보는 여러가지 다른 방식이며 비본질적이다. 청각이 없어도 종이위에 써져있는 모르스 부호를 읽고 이해할 수 있듯이 장님이 모를 정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것으로도 장님의 문제 혹은 감각질(퀄리아)의 문제는 다 끝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두가지 점을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표현의 문제다. 모르스 부호가 소리로 표현될 수 있고 혹은 종이위의 점으로 표현될 수 있듯이 같은 것은 여러가지 다른 표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장님은 종이위의 점을 읽지 못하고 청각장애인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모르스 부호의 소리를 듣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의 표현은 어떤 존재에게는 이해가능한 것이지만 어떤 존재에게는 이해불가능한 것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와 다른 표현을 통해 세상을 느끼는 존재가 있다고 할 때 우리는 그 존재가 결코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는 없다. 

 

이런 예에는 물론 장님이 있을 것이다. 소리로 세상을 느끼는 장님은 눈으로 세상을 보는 우리가 아는 어떤 것을 결코 모를 것이라는 단언은 원칙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할 수 있는 다른 재미있는 예에는 인공지능도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이 아니다. 그것은 전혀 다른 신호를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인다. 그런데 이런 사실로부터 많은 사람들은 인공지능은 인간이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현실적으로 그것은 쉽지 않은 문제다. 어쩌면 아주 먼 미래에도 그런 인공지능은 출현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절대 불가능하다라는 단언은 위험하다. 게다가 이 논점을 뒤집으면 우리는 인공지능이 알고 있는 어떤 것을 인간은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을 말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렇게 잘난 척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표현의 문제는 표현에 따라서 누군가에게는 느껴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느낄 수 없는 것이 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정보가 독점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 표현이란 형식일 뿐이다. 그 안의 의미와 정보는 다른 방식으로도 흐를 수 있다. 물론 현실적으로 표현의 차이로 만들어지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이 때로 불가능에 가까울 정도로 어려울 수도 있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는 표현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비록 원자론과 같은 물리학은 어마어마하게 강력한 정신적 성취이지만 그것은 여전히 실재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이론 혹은 관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실재 그 자체에는 영원히 도달하지 못한다. 우리는 언제나 그것에 가까이 도달하려고 하는 근사를 만들어 낼 수 있을 뿐이고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위대한 근사중의 하나가 바로 원자론이다. 

 

이 점은 간단한 것이지만 패러다임의 탈출이 필요하기 때문에 때로 이해하기 어렵다. 원자론이라는 패러다임은 특히 그런데 그것은 아직 깨어지지 않는 패러다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에게 충격을 줬던 다른 예를 들어보자. 그 것은 바로 유클리드 기하학이다. 이것도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아직도 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즉 사람들은 유클리드 기하학이 현실 그 자체라고 생각하며 따라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말을 현실이라고만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을 정도니까 그렇다. 하지만 비유클리드 기하학이 나오면서 널리 알려진 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은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그냥 인간의 이론, 인간의 관념적 구조물일 뿐이다.

 

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은 놀라울 정도로 사실에 가깝다. 그래서 물리학의 우주론분야가 아니면 누구도 유클리드 기하학과 현실의 차이를 구분하지 않으며 수많은 기하학의 공식들은 편리하게 사용되고 있다. 마치 뉴튼 물리학을 수정한 양자역학이 나왔지만 자동차나 비행기를 만들면서 양자역학 방정식을 풀지는 않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유클리드 기하학이 사실 그자체는 아니라는 점 그리고 때로 존재할 수 있는 미세한 차이가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을 엄청나게 바꿀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좋은 예가 바로 뉴튼 물리학과 양자역학의 차이인데 이 차이는 대개 매우 미세하다. 말했듯이 우리는 양자역학같은 걸 신경안쓰고도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자효과라는 것이 없었다면 태양은 진작에 식어버렸을 것이고 고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고 DNA라는 것도 흐물흐물해져서 진화도 있을 수 없었으니 생명도 존재할수 없었다. 따라서 뉴튼 물리학과 양자역학의 차이가 정말로 아무 의미가 없는게 아니다. 어느 분야에서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는 것이다. 

 

다시 원자론 아니 나아가 유물론같은 것으로 돌아갔을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이 세상은 물질로 이뤄져 있다라는 말 자체가 비물질적인 관념이라는 것이다. 물질이란 무엇인가를 말하지 않으면 그런 문장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리고 여러분이 우주가 끝날 때까지 여러가지 경험적 실험적 사실을 늘어놓더라도 물질이라는 관념이 그 사실과 같은 것은 아니다. 관념은 사실에서 저절로 나오지 않는다. 인간은 언제나 이론을 가지고 정신적 도약을 통해 어떤 개념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물질도 관념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좋고 부정하기 어려운 이론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개미나 아메바를 내려다 보면서 받아들일 수 있다. 개미나 아메바같은 단순한 생명체가 생각이란 걸 한다고 하자. 그것이 이 세상에 대해 부정할 수 없는 너무나 확실한 이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도 인간인 당신은 개미나 아메바로서는 보지못하는 측면이 이 세상에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우주적 규모로 보면 인간이나 개미나 유한하기는 마찬가지다. 왜 인간의 관념은 최종적이고 절대적인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사실 이같은 절대성의 붕괴는 이미 개미를 논하지 않고도 앞에서 말한 유클리드 기하학이나 양자론이나 괴델의 불완전성원리같은 것을 통해 인간에게 충격을 줄만큼 준지 오래다. 20세기를 거치면서 너무나 오랜동안 너무나 확실히 진리나 사실 그 자체라고 믿었던 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밝혀졌던 것이다. 

 

인간의 오감을 원자론으로 비본질적인 것으로 만든 후에 나는 이제 원자론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도 인간의 관념이라고 지적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다시 비환원주의에 도달한다. 그런데 사실 내가 평소 말하는 비환원주의는 종종 말해지는 이 비환원주의와 그 의미가 좀 다르다. 이 세상은 물질로 환원될 수 없다라는 의미에서 이것은 비환원주의이고 평소에 내가 말하는 비환원주의는 전체를 부분으로 나누는 것이 문제가 있다는 의미에서 비환원주의이다. 말이 그렇게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 없으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그러니 다시 한번 말해보자. 인간의 오감을 원자론으로 비본질적으로 만든 후에 원자론이 사실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관념이라는 것을 지적하면 우리는 어디에 도달한 것인가? 우리의 도달장소를 말하는 한가지 단어는 기계의 마음이다. 마음은 인간만 가질 수 있을 뿐 기계는 가질 수 없다같은 말은 맞지도 않고 틀리지도 않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인간의 말을 넘어선 곳에 와있기 때문이다. 마음이 뭔가하는 질문을 파고들 필요는 없다. 

 

기계는 그 자체도 의미를 가진 것이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이해하게 만들어 주는 의미도 있다. 동물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가를 깨닫고 외국인을 봐야 우리는 한국인이 누구인지 알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던가 한국인이 외국인보다 우월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기계가 뭘 할 수 있네 없네하는 말로 인간의 우월한 지점을 강조하는 것도 부질없는 짓이다. 

 

충분히 발달한 기계인 인공지능은 인간과는 다른 표현방식을  가진 데이터를 사용해서 세상을 본다. 우리가 박쥐나 뱀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듯이 우리는 기계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아주 자주 박쥐나 뱀을 의인화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부정할 수 없는 간격이 있는데도 마치 그들이 우리이기나 한 것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얼마지나지 않아 같은일을 하게 될 것이다. 발달한 인공지능도 결국 인간이 되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의인화해서 이해하는 경우는 자주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서로에게도 그런 일을 하고 있다. 나도 당신과는 다르다. 그런데 당신은 내가 마음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당신은 내가 당신과 같다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 이해하고 진정으로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사실 그걸 믿을 수 없다면 우리는 기계속을 걷는 혼자된 사람처럼 절대적인 고독에 빠질 것이다. 

 

기계의 마음이 뭔가라는 질문은 거꾸로 인간의 마음이 뭔가를 가르쳐 준다. 그리고 우리가 거대한 혁명앞에 서있는가를 말해준다. 지금 이순간에도 엄청난 양의 데이터가 기계에게 흘러가고 있다. 데이터들은 여러가지 방식으로 처리되어 인간들에게 다시 돌아올 것이다. 장님이 눈을 뜨면 확실히 세상이 크게 달라져 보일 것이다. 없던 것을 보는 새로운 체험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가 알지 못했던 눈을 뜨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눈이자 기계의 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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