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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혼시대는 정말 올까?

by 격암(강국진) 2022. 1. 2.

2022.1.2

결혼제도가 없어지는 비혼시대가 오고 있다. 적어도 통계로 보면 이걸 부정할 수 없어보이고 외신도 21세기에 없어질 제도로 결혼제도를 말하는 곳이 이미 있었다. 바로 이런 추세가 한국에서도 지극히 낮은 출산률을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고 있다. 정말 비혼시대가 올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사람들의 반응은 양극화하고 있다. 그렇다고 말하는 사람은 앞에서 말한 통계같은 것을 보여주며 이건 당연하다고 말하며 그럴리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결혼제도가 얼마나 오래된 제도인데 그게 없어지냐고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느 쪽이든 자신들의 입장이 확실하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다시 물어보자. 정말 비혼시대가 올까? 

 

사실 결혼제도의 붕괴는 또다른 공동체 붕괴의 사례일 뿐이다. 이제까지 많은 공동체가 사라져왔다. 지역공동체가 유명무실해 진 것이 일 예이고 가족제도만 해도 전에는 친인척을 함께 아우르는 대가족제도가 힘을 썼지만 그것이 점차로 핵가족화해 온 것도 또다른 예다. 그러니까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는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가정이 아예 사라지는 시대가 온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공동체는 필요의 산물이다. 사회적 분업이 발달하지 않고 안정화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자급자족을 위한 최소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흔히 존재하던 마을공동체 안에서는 사람들은 많은 것을 공유하면서 서로 돕고 살았다. 서로 돈을 빌려주고 음식을 빌렸고 서로가 서로에게 노동을 제공하고 기술을 제공했다. 왜 이웃을 믿을 수 있었을까? 한가지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한가지 이유는 그들이 만약 공동체를 배신하고 그 공동체에서 축출된다면 그들이 가지게 되는 불편함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기껏 이웃간에 신용을 얻어 사이좋게 살고 있는데 거기서 나쁜 평판을 얻어 낯선 다른 동네에 이사를 가봐야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가정이란 지역공동체보다 훨씬 작은 최소의 공동체일 뿐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가정에 의지하는 이유, 가정이 고마운 이유도 상당부분 마을공동체와 다르지 않다. 그 공동체 내부에서는 훨씬 더 많은 것을 투명하게 공유할 수 있다. 

 

그런데 시대가 여러모로 바뀌었다. 기술이 발달하고 법치가 안정화되면 이런 작고 사적인 공동체 서비스를 대체할 수 있는 국가적 서비스가 많이 늘어난다. 인터넷 쇼핑이나 대출도 있다. 연금이나 생활보조금 같은 것도 그런 것이다. 예전에는 어른들의 노후 대책이란 어린 자식들이었다. 지금은 국가가 그런 서비스를 대신해 준다. 요즘은 놀거리 할 거리도 많이 늘어났고 따라서 작은 공동체라는 것은 불편한 테두리에 지나지 않게 느껴지는 일이 많다. 그러므로 사회적으로 여러 공동체가 무력화되거나 사라지는 경향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비혼시대가 오는 것일까? 이 예측은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할 것이다. 앞으로 어떤 세상이 올까를 생각해 볼 때면 나는 자동차가 주는 교훈을 떠올리고는 한다.  자동차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멀리까지 걸어야 했다. 그런데 자동차가 흔해진 세상에서는 차를 타면 된다. 그러니까 자동차가 실제로 흔해지기 이전의 사람들은 미래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 쉽다. 미래에는 걸어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겁니다. 걷는다는 행위는 점차로 사라지고 사람들은 점차로 더 발달된 탈것을 타고 다니며 다리가 앙상해지는 체격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자동차가 아니더라도 이와 비슷한 미래 예측을 들어 봤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그 미래를 살고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지금 어떤가?

 

진짜로 일어난 일은 양극화였다. 현대인이 운동부족 문제를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과거의 사람들보다 더 근육량이 많다. 요즘은 짐승남, 근육녀가 대세다. 반세기전의 미남 미녀는 요즘 기준으로는 근육도 없고, 살이 너무 없어서 매력적이지 않아 보인다. 비만인 사람이거나 앙상한 체격을 가진 사람들은 오히려 예전보다 요즘 더 부끄러워해야 할 판이다.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 조깅을 하는 사람, 자전거나 등산을 하거나 윈드 서핑이나 골프같은 운동을 하는 사람은 전보다 더 늘었다. 특히 사회적으로 여유있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더 그렇다. 

 

가정을 포함하는 공동체들의 미래도 이와 같지 않을까? 확실히 시대적 변화는 작은 공동체들을 위협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공동체들이 다 사라지고 국가같은 거대 공동체 하나만 남을 거라는 식의 보편화, 균질화의 목소리는 반드시 정해진 미래의 목소리가 아니다. 걷기에서와 같은 일이 똑같이 일어난다면 그런 목소리에 쉽게 항복하는 사람들은 시대의 패배자가 될 것이고 시대의 승자들은 오히려 더욱 더 크고 작은 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안정된 가정은 미래에 더욱 더 강력한 사회적 승리자의 증표가 될지도 모른다.  쉽게 비혼논리에 빠지는 것은 차도 있는데 운동은 뭐하러 하냐는 사람과 같은 입장에 서게 되는 일일 수 있다.

 

사람들은 예전에는 운동보다는 노동을 했다. 그런데 요즘은 노동보다는 운동을 한다. 그걸 위해서 전문기관도 많이 늘었다. 무거운 바벨을 들어올리고 달리기를 하루에 10km씩 한다고 그 자체가 돈을 벌게 해 주는 것은 아니다. 아마도 반세기전의 사람들이 요즘 시대를 사는 그런 사람들을 본다면 그래봐야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쌀이 나오는것도 아닌데 뭘 저렇게 몸을 가꾸냐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다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현실이다. 그 결과 자동차를 비롯한 탈 것이 넘쳐나는 요즘 사람들이 오히려 겉으로보기에는 더 젊어보이고 오래산다. 60살을 의미하는 환갑은 노인이 되었음을 말해주는 상징적인 나이지만 요즘은 환갑노인도 겉으로 보면 노인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젊어보이는 사람들이 흔하다.

 

미래는 확실히 환상적인 '탈 것'이 지금보다도 더 많이 넘쳐나는 시대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탈 것이란 기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주로 정신적인 서비스를 말한다. 클릭한번이면 배달음식이 우리 집앞에 놓여지는 서비스같은 것이 미래에는 훨씬 더 많아져서 다른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일에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사람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이상한 사람들로 보일지 모른다. 아니 편리한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왜 저렇게 불편하게 직접 일을 하냐고 말하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동차가 주는 교훈에 따르면 미래는 그런 사람들이 주도하게 된다. 

 

사람은 능동적으로 시대적 변화에 맞서 나간다. 불편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은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일부러 운동을 할 건 없었다. 만보걷기를 노력하지않아도 매일 만보걷기가 되던 시대였다. 하지만 요즘처럼 편리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운동을 한다. 스마트폰이나 스마트워치로 자기 발걸음수를 세면서 산다. 어떻게 보면 운동을 하니까 운동을 안할 때는 차도 타고 비행기를 타도 되는 것이다. 컴퓨터앞에서 앉아서 하루 종일을 보내도 되는 것이다. 운동을 하지 않고 시대의 변화에 휩쓸려 버리면 좋은 꼴을 보지 못한다. 

 

미래의 삶은 매우 비물질적이고 추상적일 것이다. 우리가 뭘 하려고 해도 세상은 우리에게 말할 것이다. 그거 다 필요없다고, 말만 하면 이런 저런 서비스가 그걸 대신해 준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시대에서야 말로 우리는 자기를 지키는 일이 필요하고, 가정을 지키는 일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자동으로 할 수 있지만 기꺼이 스스로 요리하고 흙을 만지는 일을 해야 한다고 느끼게 된다. 옛날 방식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식사를 준비 하는 일이 오히려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필수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그렇게 해야 추상적인 세상에서 자기를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자동차가 나오기 전에는 억지로 걸어야만 했던 시대적 상황이 억압으로 느껴질 수 있다. 매일 아침에 자가용으로 학교앞에 가는 요즘 아이들은 산넘어 학교에 아침마다 걸어야 했던 옛날 세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불쌍하게 여길 수 있고 어느 정도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걷는다는 것을 반드시 억압이라고 판단하는 일은 옳지 않다. 그건 그 걷는다는 행위가 어디에 어떻게 놓여지는가에 따라 즉 문맥에 따라 다른 이야기가 된다. 

 

한국 사회는 전통적 사회관계를 억압으로 파악하는 습관이 있다. 낡은 봉건적 사회의 관행이 남아 우리를 억압해왔는데 그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라는 것이다. 이는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다. 하지만 과거의 것이나 지금 있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을 파괴하고 없애는 것이 반드시 억압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러다보면 시대적 변화에 의해 자동차가 생겼는데 걷는 일을 억압으로 말하는 실수를 하게 된다. 자동차가 진짜로 넘쳐나는 시대가 되면 걷는 것은 억압이 아니다. 자유로운 선택이고 특권이다. 

 

앞으로의 시대는 과연 결혼도 필요없고 아이를 키우는 일도 필요없어 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조성될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 비혼시대로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유다. 그러나 실제로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은 점점 더 소중하고 필수적인 일이 되기 쉽다. 적어도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물론 그건 쉽지 않다. 하지만 그럼 현대에 운동하는 일은 누가 쉽다고 하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상상할 수 있는 일은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시대로 들어가고 있다. 어린애가 유튜버로 빌딩을 살 돈을 벌 수도 있는 시대가 코앞에 있다고 하면 그 일이 일어나기 10년전의 사람들은 믿지 않았을 것이다. 비트코인이니 NFT니 해서 돈 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명문대학을 졸업해서 어렵게 취직해서 그리고 밤낮으로 일해서 번 월급이 허무하게 느껴질 수 있다. 땅은 이미 물렁물렁해지고 있다. 이럴 때 자동차가 나오기 이전에 미래를 예측한 사람들과 같은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 미래는 그 반대이기 쉽상이다. 특히 성공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이다. 우리가 패배자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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