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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이 보수를 지지하는 이유

by 격암(강국진) 2021. 11. 16.

2021.11.16

최근에 두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20대 남성을 의미하는 이대남이란 단어가 요즘 자주 쓰인다는 말이 하나고 또 하나는 그 이대남이 보수후보였던 홍준표를 지지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요즘 2-30대에서는 보수진영을 지지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이에 대해 몇몇 친여당 성향의 사람들은 요즘 젊은이들이 생각이 없다는 말을 자주 하는데 생각이야 서로 다르기도 한 것이고 생각이 없는 사람은 어느 세대에나 있으므로 이것은 제대로된 의견이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는 2030 세대의 상황과 입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그들의 눈으로 정치를 보려고 시도해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중년 이상의 세대는 2-30대의 사람들은 그들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에 비해 3가지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 부분을 너무 사소하게 다루면서 그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기성세대와 입장이 다르고 어느 정도는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이 기성세대다. 

 

먼저 2-30대는 독재에 대한 체험이 없다. 한국 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종종 말해지는 1987년은 2021년으로부터 34년전의 일이다. 지금 40살이 된 사람도 그때 겨우 6살이었으며 1987년에 세상이 일순간에 바뀐 것이 아니라고 해도 많은 30대들 특히 20대는 군사독재의 문화, 가난하던 시절의 한국을 체험해 본 적이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런 말도 안되는 시대가 다시 돌아올 수도 있다는 공포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것은 마치 북한 공산당이 쳐들어왔던 6.25 전쟁을 겪었던 노인 세대와는 달리 민주 세력의 몸통을 이루는 386세대 내지 베이비붐 세대가 그런 체험이 없었던 것과 같다. 민주세대는 전쟁의 공포에 빠져서 빨갱이 잡기에만 몰두하는 노인 세대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물론 민주세대도 전쟁에 반대하지만 전쟁에 대한 공포에 지나치게 눈이 멀면 합리적인 판단이 불가능해지며 이용당하기 좋은 사람이 된다. 그들은 노인 세대들이 바로 그렇다고 자주 느꼈다. 

 

지금의 2-30대도 아마도 민주세대를 보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할 것이다. 즉 민주세대가 군사독재에 대한 과민반응에 빠져 있다거나 그때문에 이용당하기 좋은 어리석은 상태에 있다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민주세대는 민주화를 그들이 이룩한 가장 큰 업적으로 여김과 동시에 겨우 빠져나온 그 군사독재를 이 세상의 가장 큰 악으로 여기고 있다. 그들은 일찌기 그것을 겪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그런 세상으로 우리나라가 다시 돌아갈 수 있다는 공포에 빠져 있다. 다시 필리핀이나 미얀마가 되는 것이다. 박정희나 전두환을 옹호하는 보수 정치권을 민주 세력이 용납할 수 없는 것은 이때문이다.

 

그런데 2-30대는 그런 세상을 겪어 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를 지지한다고 해도 역사책에 나오는 그런 시대가 돌아올 거라고는 잘 생각하지 않는다. 진정한 권위주의 시대는 그들이 태어나기 전에 끝났고 따라서 그들은 불만이 있으면 항의하고 설사 정당한 것이 아니라더라도 일단 떼를 써보는 것이 유리하다는 태도에 익숙하다. 그래도 손해는 아니니까 그렇다. 그래도 나라는 망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보수와 민주세력은 그렇게 큰 차이가 없는 사람들이다. 민주화 세대라고 하지만 그들도 권위주의적이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우리나라의 정치사는 옳고 그름은 없이 서로 다른 파벌들이 그냥 권력 다툼을 한 것이다. 그들에게 노무현과 이명박은 거의 차이가 없다. 

 

2-30대에게는 교육조차 없었다. 이것이 베이비붐 세대와도 다른 점이다. 보수세력은 베이비붐 세대에게 철저한 반공교육과 집단주의교육을 시켰다. 고등학교에서 총검술을 배우고, 날마다 애국가를 부르고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게 했으며 1980년대에는 그저 책몇권을 읽었거나 재일교포를 접촉했다는 이유로 간첩으로 몰릴 수도 있었다. 베이비붐 세대는 북한사람들이 돼지나 늑대로 나오는 똘이장군 영화나 공산당이 싫어요를 외쳤다는 이승복 어린이 이야기를 들으며 컸다. 그 시절의 티비에서는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기여한 산업화 세력의 미화드라마가 방송되었고 대통령에 대한 묘사는 지금의 북한 김정은에 대한 묘사와 다르지 않았다.

 

1980년대에는 청년들이 지금보다 훨씬 더 국가나 민족같은 집단을 생각하면서 말하고 사고했다. 나는 그것을 생생히 느낀 적이 있었는데 내가 교환학생으로 영국으로 건너가 반년을 보내는 동안 한국에 있던 내 친구들과는 달리 훨씬 더 자기의 욕망과 생활과 미래에만 신경쓰는 영국의 청년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라고해서 물론 한국사람들이 개인적인 것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한국청년들은 보수건 운동권학생이건 민족의 미래같은 말에 파뭍혀서 지냈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은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배웠다. 

 

민주세력은 외국에서 들어온 책과 영화에서 세계적 보편성을 배웟지만 사실 그들을 가르친 선생님들은 거의 철저하게 반공보수세력이었다. 그러한 현실은 아직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오래된 많은 사학재단들은 지금도 보수에 의해 지배된다. 만약 1987년의 6월혁명이 정말로 군부구데타같은 것이라서 이 나라의 모든 것을 혁명적으로 바꿨다면 어쩌면 교육도 철저히 바뀌었을지도 모른다. 젊은이들은 한국의 민주화 역사를 교육받으면서 그 이전의 시대가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상식으로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부와 교육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주로 보수였다. 그러니까 2-30 세대가 학교교육을 통해서, 어른들을 통해서 배운 것은 결코 민주화운동이 성스럽다는 교육이 아니었다. 적어도 전적으로 그렇지는 않았다. 세상에는 민주화를 찬양하는 목소리만큼이나 박정희 전두환때도 나쁘지 않았다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게다가 사실 지금의 2-30대는 유치원때부터 대학입시에 빠져들었다는 바로 그 세대다. 그들이 이날 이때까지 배운 것은 그냥 고개 처들고 세상공부따위 하지 말고 교과서 죽도록 외우라는 말뿐이었다. 무엇때문에 그렇게 해야 한다고 그들은 배웠던가? 국가를 위해? 정의를 위해? 아니다. 그들 스스로의 성공 즉 자기 욕망때문이다. 잘먹고 잘살기 위해 고개 처박고 시험이나 잘보라고 유치원때부터 세상으로 부터 격리되어 공부만 시켰다. 공동체나 민족교육따위가 공백으로 남은 가운데 그들은 이전의 세대보다 훨씬 더 개인주의적인 사람으로 컷다. 그렇지 않고 학창시절에 정치나 이데올로기에 관심이 있던 사람은 무슨 말을 들었을까? 대개 뒤통수나 맞으면서 중간고사나 잘 보라는 말을 들었을 것이다. 촛불집회에 부모와 함께 참석해서 정치의식을 배웠던 세대는 아직 20대에 도달도 못했다. 

 

젊은 2-30대가 가지고 있지 못한 마지막 것은 바로 경험이다. 이는 그들이 젊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것이며 특히 입시와 취업공부만 하느라 세상을 보지 못하고 격리된 곳에서만 살았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다. 본래 젊은이들은 경험이 부족하기에 선입견에 빠지지 않을 수 있고, 기성세대는 경험이 풍부하기에 흔한 실수를 알고 있다. 그래서 이 둘의 조합이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이유가 뭐건 경험이 부족한 젊은 사람들은 단순 명쾌한 이론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아직 세상이 그렇게 명쾌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할 만큼 많은 일을 겪어 보지 못했고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해 지나치게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면 젊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질문이 있다. 지금의 진보 혹은 민주세력이 더 명쾌한 이론을 제시할까 아니면 보수세력이 더 명쾌한 이론을 제시할까? 정치가마다 차이가 있고 사안마다 차이가 있지만 나는 그 답이 주로 보수라고 생각한다. 젊은이들에게 기성세대는 모두 잔소리쟁이 꼰대지만 더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은 민주세력일 것이다. 민주세력내지 진보세력은 뭐든지 하지 말라고 하고, 규제하겠다는 말을 잘하는 경향이 있다. 즉 긍정적 비전대신에 뭐뭐하지 말라는 부정적 규칙을 내세우는 진보주의자가 훨씬 더 많다. 

 

미국의 민주당 지지자 마크 릴라가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에서 지적한 것처럼 낡은 정체성 정치에 몰두하는 경향이 한국의 민주와 진보진영에서도 흔하다. 그것이 잘 들어난 것이 바로 페미니즘 이슈내지 여성가족부 이슈다. 한국의 20대 남성들 즉 이대남의 입장에서 이 여성 차별 이야기는 분개할 만한 부분이 있다. 왜냐면 여성 차별 이야기가 나오면 주로 나오는 이야기가 몇십년전의 여성들이 남자보다 가사노동이 시달린다던가, 오빠는 교육시키지만 여성은 교육에서 배제되었다던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지금의 20대 남성은 지금의 20대 여성이 그렇게 사는 세상을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군대 문제는 청년들에게는 굉장히 민감한 문제다. 그런데 그렇게 군대를 다녀와도 그 것에 대해 아무런 혜택을 주장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 지금의 페미니즘 진영이다. 군복무를 한 남성이 가산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여성이 가산점을 받는다. 같이 대학에 들어간 여자 동기는 군복무를 마치고 취직해 보면 상사가 되어 있다. 

 

여성가족부는 성평등 세상을 만든다면서 온갖 교육 지침을 내리는데 그걸 듣다보면 남성은 언제나 가해자로 여겨지고 여성은 피해자로 그려진다. 여기에는 분명 성급한 일반화의 문제가 있다. 살인강도범의 90%가 흑인이라는 말이 흑인이 위험하다는 말이 아니며 그런 논리적 비약이 인종차별의 뿌리가 된다. 우리는 흑인의 대부분은 살인강도범이 아니라는 사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즉 강간범이 신월동 주민이라는 말을 신월동 주민은 강간범이라고 이해하면 안된다. 꽃뱀범죄나 매춘범죄를 저지는 여성 사기꾼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고 꽃뱀범죄를 없애자고 중고등학교에서 여학생들을 모아놓고, 왜 꽃뱀범죄가 나쁜지, 왜 매춘을 하면 안되는지에 대해 교육을 한다면 어떨까? 모든 여자를 잠재적 매춘부로 본다고 여성단체가 난리가 날 것이다. 그런데 정확히 그 반대의 일을 남성들에게는 여성단체가 자주 한다. 남성은 일종의 인종차별을 받고 있다. 그리고 특히 이에 대해 피해의식을 많이 느낄만한 세대가 바로 이대남이다. 그들은 남성우월적인 시대를 누려본 적도 없는데 늘상 여자들에게 더 잘하고 양보하라고 교육을 받기 때문이다. 

 

복잡한 시스템에는 언제나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 시스템을 만드는 사람들은 진보건 보수건 기성세대다. 그들이 만든 법에 청년의 시각이 얼마나 들어갈까? 청년을 인적 자원운운하면서 무슨 공산품 재료 취급하는 기성세대들이 세상에는 가득하다. 결국 더 복잡해진 법은 대개 사회적 약자들에게만 자꾸 제약을 가한다. 그리고 대표적 사회적 약자는 바로 젊은이들이다. 지금의 징글징글하게 복잡한 대학입시는 누구에게 좋을까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다. 부모가 잘 도와주지 않으면 그 복잡한 시스템은 약자를 돕는게 아니라 젊은이들에게 장벽이 된다. 꼭 필요한 사람을 꼭 필요한 만큼 돕는 시스템과 규칙을 만들겠다는 생각은 얼핏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사람은 사람이 돕는 것이다. 법좋아하다보면 오히려 피해자를 만든다. 

 

시스템을 복잡하게 만들자는 것은 진보의 가치도 아니고 보수의 가치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에 매달려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더 시스템 복잡하게 만드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이 지금의 민주세력인 것도 사실인 것같다. 그들은 많은 분야에서 규제를 없앤 것이 민주세력이라고 주장할지 모르나 언제나 언론에 나오는 민주세력은 무슨 무슨 법을 만들려고하고 있다. 만들기도 어렵고 그걸 만들어도 결국 잘 작동하지도 않는 것같은 법을 말이다.

 

보수에 대한 지지는 그렇다치고 여권의 대선후보인 이재명을 보라. 이재명의 지지자들은 법을 바꾸지 않아도 시장이나 도지사가 할 수 있는 일이 이렇게 많은줄 몰랐다고 한다. 이재명은 다음 정권의 큰 과제중의 하나가 관료장악이라고 말한다. 즉 지금의 법이나 시스템 안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은 아주 많은데 인간을 도외시하고 자꾸 복잡한 법으로 문제를 풀려고 하는 태도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관료사회가 마치 이익단체처럼 굴고 있는 것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보수는 정책 주장이 거의 없는데도 지지받는다. 사실 그들의 정책은 암묵적으로 하나다. 욕망에 충실하게 해주겠다는 것이다. 복잡한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에 대항하는 여권의 대선후보도 그 추진력이 가장 큰 장점으로 지적되는 사람이다. 한다면 하는 사람이 이재명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이런데 더 복잡한 정책만 자꾸 들이밀 것인가? 복잡한 정책을 마치 인터넷 서비스 회사의 복잡한 계약서처럼 함정으로 보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같다. 이 문제를 고민하지 않으면서 책상앞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사람, 관료천국을 꿈꾸며 미래를 그리는 사람들은 2-30는 물론 국민 대다수의 지지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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