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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영화 드라마 다큐

지금 우리 학교는을 보면서

by 격암(강국진) 2022. 1. 31.

2022.1.31

최근에는 넷플릭스의 지금 우리 학교는 (지우학)을 보고 있다. 개봉되자 마자 오징어 게임이나 지옥처럼 세계 1위를 한 작품으로 나는 전체의 절반을 본 상태다. 총평이나 비판을 할 생각은 없기에 다만 약간의 소개와 함께 이 드라마를 통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 한국 학교의 현실에 대해 몇 자 적어두고 싶다. 여기에는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져 있다. 

 

 

이 좀비 드라마가 단순한 재난 영화 수준의 것 이상이 되게 된 것은 한가지 사실에 크게 기인한다. 그것은 좀비가 된 인간이 어떤 상태를 은유하는 가가 명확하다는 것이다. 이 점은 또 다른 좀비 드라마인 킹덤에서도 마찬가지인데 킹덤에서 좀비는 마치 어떤 사이비 종교나 사상을 주입받은 사람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사이비 종교나 사상이 번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적 불의와 가난 때문이다. 최초의 전염력있는 집단 좀비 창궐이 인간의 고기를 먹은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인간이 인간을 먹게 하는 사회가 좀비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지우학에서 좀비가 생기게 되는 이유는 1차적으로는 학교폭력때문이다. 그러나 그 학교폭력이 방치되는 이유는 더 크게 보면 학교를 인간의 사회가 되지 못하도록 방치해 버린 사회때문이다. 학교의 교장은 학생들을 신경쓰기 보다는 대외적인 평가에만 몰입하고 범죄를 감추려고만 하고 그 교장에게 아부하는 교사들은 그런 교장을 대개 지지한다. 몇몇 피해자들은 학교 바깥에 이 사실을 알리지만 절차에 따라서 한다는 말만을 들을 뿐이다. 절차에 따른다는 말은 시스템을 말하는데 시스템은 바꾸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결국 학생 하나 하나의 사정을 잘 구분하지 못한다.  폭력이 폭력인지 아니면 장난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므로 더 어렵고 복잡한 시스템을 만들어 봐야 그 시스템의 구멍을 뚫고 학교라는 폐쇄된 사회를 지옥으로 만들 방법은 얼마든지 있기 마련이다. 더구나 시간이 걸리는 절차는 이미 위기속에 있는 학생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도움은 제때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좀비들에게 둘러쌓인 아이들이 버티는 교실은 난파된 배를 연상시킨다. 선생님도 없이 그들은 끊임없이 희망을 가지고 부모와 사회에게 재난신호를 보내지만 그 대응은 너무 느리거나 너무 무책임하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물려서 좀비가 되고 재난을 담당하는 공무원은 재난신호를 보낼 방법인 인터넷이나 전화를 끊어버리면서 이 것이 재난에 대처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우리는 이미 세월호사건에서 이걸 실제로 느꼈다. 아이들에게는 제 자리를 지키라고 말하는 어른이 있고, 진작에 구호는 포기한 채 탈출해 버린 어른들이 있었으며, 무엇보다 모두가 재난에 대처하리라고 생각한 담당자들이 실은 사회로부터 세월호를 격리하는데에만 신경쓸 뿐 구호는 포기상태였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고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수백의 아이들이 죽은 것이다. 

 

대다수 기성세대를 바보와 무책임한 인간들로 묘사하는 이 드라마에서 거의 유일하게 아이들을 지키려고 하는 선생님이 있다. 잠시 아이들과 합류하고 위안을 주던 그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죽지 말라고, 더이상 누가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말하며 스스로 이것을 희생하는 행동으로 보인다. 다만 그런 선생님은 거의 없다. 그런 선생님이 다수였다면 학교는 달랐겠지만 그렇지 않기에 그들도 결국 피해자가 되고 만다. 이것은 자식을 구해보겠다는 몇몇 부모들이 피해자가 되는 현실과도 마찬가지다.

 

결국 아이들은 다시 혼자가 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분명해 지는 것은 아이들은 스스로가 혼자라는 것, 스스로가 스스로를 구하지 않으면 생존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성을 가지지 않은 듯한 괴물들이 자신들을 공격하고 자신들을 좀비로 만들려고 하는 것을 스스로 방어해야 한다. 학폭으로 말하자면 학폭의 피해자가 되던가 아니면 학폭의 가해자나 방관자가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겨우 겨우 그것을 피해가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때문에 자살을 하려고 하는 학폭피해자는 좀비창궐이 일어나기 전이나 후가 모두 지옥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학폭의 중심에 있는 한 학생은 좀비창궐이 있고 나서 그것을 천국이라고 부른다. 

 

드라마는 현재의 학교 시스템은 학생들로 하여금 괴물이 되라고 방관하거나 오히려 부추킨다고 말한다. 학교바깥도 천국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떤 어른들은 학교때가 좋았다고 거듭 말한다. 샐러리맨의 비애도 존재하고 어른으로서의 책임이라는 것도 존재한다. 학교 바깥에도 괴물들은 존재한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학교라는 테두리는 학생들을 사회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학교안에는 이미 세상에 존재하는 나쁜 것들이 들어와 있다. 무한 경쟁도 들어와 있고 바보같거나 서툴러서 다수의 사람들을 지옥에 빠뜨리는 사람들도 득실댄다. 그건 학생일 수도 있고 선생일 때도 있다. 반면 학교안에는 오히려 학교 담장 바깥에 존재하는 법률이 없어서 더 무법지대다. 어른이 어른을 때리면 폭행사건이지만 학생이 학생을 때리면 장난이 되고 촉법소년의 일이 된다. 어른들은 이러니 저러니해도 가진 것이 많아서 그것을 잃어버릴까봐 제한을 받는다. 한국 사회는 조폭이 길거리를 활개치고 다니는 곳이 아니다. 하지만 학교안에서 일진은 조폭보다 훨씬 더 자유롭다. 

 

드라마가 보여주는 이런 학교안의 현실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공감하건 그런 현실을 효과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미 이 드라마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리고 넥플릭스 1위를 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단순히 한국만의 문제는 아닌 것같다. 어떤 사람들에게 초중고의 학창시절은 인생 최고의 멋진 시기이지만 분명 어떤 사람들에게 그 시기는 그저 견뎌야 했던 지옥이었고 학교의 담장을 탈출하고서야 삶은 살만한 것이 되었다. 

 

학교는 뭘 위해 있는 것이고 뭘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학교와 사회와의 관계는 어떠해야 하는가? 빠르게 변하고 다양한 현실속에서는 무능한 거대한 시스템의 문제는 오늘날 아주 보편적이다. 그것은 구멍이 많고 너무 느리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이런 문제를 다시 부각시키는 것만으로도 이 드라마는 볼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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