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6.6
후안 엔리케스는 TED 강의들로 유명한 미래학자다. 그가 윤리에 대한 책을 썼다. 그러나 이 책의 의도와 결론은 결코 올바름을 가르쳐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모두가 낡은 윤리에 늘어붙어있는 자신을 깨닫고 우리에게 정말 맞는 윤리적 원칙을 찾아내고 수정하기를 바하는 것이다.
우리가 윤리에 대해서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윤리는 모두 우리의 인식과 생활의 테두리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 테두리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는다. 과거와 지금이 다르고 미래에는 더더욱 다를 것이다. 기술적 발전에 의해서 세상이 변해가는 속력이 더욱 빨라지고만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 어떤 절대적인 근거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을 부정하기를 두려워하고 심지어는 강하게 비난하기도 한다. 다시 말해 상대주의라는 길로 일단 들어서기 시작하면 우리는 좀 더 합리적인 윤리적 원칙들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파산에 들어서게 될 것을 걱정하게 되며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여러가지 근거들을 대며 자명한 윤리적 원칙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르면 과거의 공동체들은 미래에도 여전히 그대로 존재할 것이다. 결혼은 결혼이고 국가는 국가다.
이러한 걱정이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부모와 자식이 같은 윤리적 원칙을 가지고 살아가기가 힘든 세상을 살고있다. 한세대 동안의 기술적 발전은 그 이전의 시기였다면 자명하고 절대적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관계와 테두리를 더이상 그렇지 않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예들을 무수히 나열하고 있는데 아마도 가장 삼키기 좋은 예는 수혈이나 심장이식수술 그리고 시험관 아기같은 것들일 것이다. 지금도 수혈을 거부하는 종교인들이 있지만 한때 피는 신성한 의미가 있는 거라고 여겨졌다. 심장은 말할 것도 없고 자궁도 그러하다. 그러니까 누군가의 심장을 꺼내어 내 심장과 바꾼다던가 아이가 몸바깥에서 수정되어 부모아닌 누군가의 자궁에서 자란다던가 하는 식의 이야기는 심각한 윤리적 충격을 준 것이다. 여기서도 테두리가 문제다. 그런 기술이 없던 시대에 자명하던 어떤 것이 바뀌었다. 피는 곧 혈연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수혈은 윤리적 충격을 주는 것이다. 그녀의 몸안에는 내 피가 돈다라는 말은 여전히 어떤 감정적 충격을 준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들을 삼키기 위해서는 우리는 속도조절과 심호흡이 필요하다. 너무 빨라서도 너무 느려서도 안된다. 너무 빠르면 우리는 윤리적, 가치관적 변화를 무시하게 될 것이고 너무 느리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테두리에 집중해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의 테두리가 우리의 윤리적 원칙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부자집에 태어난 아이는 자신이 특권을 가지는 것을 자명하게 생각할 수 있다. 게임의 법칙이란 묘한 것이다. 권투경기를 하는데 누가 총을 들고 나가서 상대방을 쏘아죽이면 반칙이다. 하지만 정작 총을 들고 있는 선수는 그 사실을 이해 못할 수도 있다. 그는 그 총을 자기 몸의 일부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각자의 몸을 써서 싸웠는데 뭐가 반칙인가? 그 사람에게 자아의 테두리는 그 총을 포함한다. 그래서 걸핏하면 내가 누군지 아냐고 하는 것이다. 특권이란 이 총과 같다. 이쪽에서 보면 반칙인데 저쪽에서는 그게 반칙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건 그냥 원래 관습적으로 그런 것, 법에 정해져 있는 것이다.
그 관행이나 법은 누가 언제 만든 것일까? 그래봐야 대부분 얼마 안된 것이 법이고 관행이며 그래봐야 그걸 만든 건 인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대개 우리가 그 관행이나 법의 피해자가 되기 전에는 그 법과 관행이라는 테두리 앞에서 생각을 멈춰버린다. 그건 원래 그런 것이다. 한걸음을 걸어서 그 테두리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때로 그런 기회가 생겨도 그게 두렵다. 대개 사회적으로 그런 행위는 비난받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장자상속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아직도 한국에는 가문따위를 생각하면서 부모가 자식에게 뭔가를 물려줄 때는 딸은 출가외인이고 가장 나이가 많은 아들이 더 많은 것을 물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시는 노인들이 있다. 이러한 관행은 가문이라는 것이 의미가 있었고 그 가문의 수장을 혈연으로 물려준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 때 생겨난 것이다. 그런데 21세기에서는 적어도 많은 집안에서 그런 말이 무의미하거나 적어도 비현실적이다. 형제끼리, 자매끼리 도울 수는 있지만 누가 누구를 책임진다는 말인가? 그런 약속이 통하는 세상이기는 한가? 하지만 이런 식의 말은 많은 사람들을 노엽게 할 것이다. 아마 이미 가문이 의미가 없다라는 말에서 화가 났을 법하다. 기존의 테두리를 넘어선다는 게 이렇게 어렵다.
하지만 그럼 꼭 넘어서야 하나? 그냥 살던대로 나 살고 싶은 대로 살면 안되나? 그렇다. 그런 태도는 불충분하다. 앞에서 말했듯이 대표적으로 기술적 발전에 의해서 세상이 바뀌기 때문이다. 전쟁이나 기후변화같은 것이 세상을 바꾸기도 한다. 민감한 우리 이야기를 떠나서 노예제도에 대해서 말해보자. 엔리케스는 노예제도가 사라진 것은 산업혁명이후 기계의 힘이 인간 노동력을 대신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증기기관같은 기계가 없는 세상에서는 인력이 그 사회를 유지하는데 너무 큰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인간을 사고 파는 행위가 나쁜 줄 알아도 노예제도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사회를 유지하려면 노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계가 노동력을 제공하기 시작하자 노예제도는 사라진다. 그래서 전세계에서 노예제도가 가장 먼저 없어진 곳이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일으켰던 영국이었다.
이러한 저자의 주장은 상당히 그럴듯하게 들린다. 그리고 지금의 세계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이 있다. 지금 세계에 노예제도는 없지만 실질적 노예들은 많다. 우리는 세계를 국경선으로 나누고 같은 노동을 해도 이쪽 사람은 푼돈을 받는데 저쪽 사람은 훨씬 더 많이 보상받는 세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 덕에 맥도널드의 해피밀같은 곳에 따라오는 싼 장난감이 가능한 것이다. 부유한 나라에서 태어난 우리는 가끔 어딘가 저 멀리서 아동학대나 노동력 착취를 통해 이런게 만들어진다는 말을 듣지만 그 테두리를 넘어서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런 소비가 그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만 생각한다. 게다가 자신은 노예주들과는 달리 정의로운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만약 인공지능을 가진 로보트가 많이 발달하여 더더욱 많은 단순노동을 대체하는 시대가 오면 세상은 어떻게 될까? 우리의 윤리의식과 국경선은 어떻게 될까? 노예제도의 폐지라는 역사는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남녀평등도 이런 면이 있다. 현대 사회가 노동자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남자 여자를 모두 동등히 착취해 주겠다는 것이 남녀평등의 진실일 수도 있다. 유목사회나 농경사회가 공장과 기업이 돌아가는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그 필요에 따라 윤리가 바뀐 것이다. 나는 지금 남녀평등에 대해 반대하거나 이러한 변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다만 애초에 변화의 동력이 단순히 인간의 호의따위가 아니었으므로 어떤 절대적 윤리라는 말에 속아넘어가면 더더욱 착취는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은 지적할만 하다. 평등이나 공평이란 무한히 추상적 개념이다. 여성해방이 왜 흔히 프리섹스일까? 남녀평등사상이 서구에서 먼저 실현되었다는데 미국 여성들의 삶은 정말 좋기만 할까? 그렇다면 미국여자들이 한류드라마 보고 마구 분노해야 하지 않을까?
세상을 바꾸는 예는 앞에서 말했다 시피 전쟁도 있고 환경 문제도 있고 중국의 부상같은 세계 경제 정치의 균형변화도 있으며 외계인의 발견이나 부정같은 과학적 발견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역시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기술들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윤리를 바꿀 기술들은 어떤 것일까? 우선은 생물학이다. 우리는 인간개조를 할 수 있는 시대에 이미 들어서 있다. 시험관 아기라는게 애초에 자연인의 경지는 넘어선 것이다. 미국에서 피임기구를 파는 것이 합법화 된 것은 1972년의 일이라고 한다. 앞으로 기술의 발전은 섹스와 결혼과 임신의 관계를 분리할 수 있고 따라서 가족의 의미를 바꿀 것이다. 유전자 선택과 조작에 의해서 만들어 지는 인간들, 예를 들어 아인쉬타인처럼 머리좋은 아기들은 사람인가 도구인가? 임신중절기술이 발달하면 할 수록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가열차게 토론해야 할 것이다. 쉽사리 태아를 제거할 수 있을 때 언제부터가 살인인가?
먹는 것도 그렇다. 우리는 소나 닭을 먹는다. 하지만 세포를 공장에서 키울 수 있다면 고기를 먹는 행위가 소나 닭을 죽이는 행위와 분리되게 될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소나 닭을 키워서 그들을 죽일까? 당연하지 않냐고? 반세기 전에는 섹스가 임신을 의미하는 것은 당연했고 임신중절은 그냥 살인이었다. 세포를 먹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짐승을 죽이는 행위를 더 비난하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짐승의 의식이나 감정에 대해 더 많은 걸 이야기하게 되지 않을까? 이것도 일종의 노예해방 아닌가?
테두리는 우리의 윤리를 결정한다. 그런데 날로 발달하는 IT 기술은 반드시 우리의 정신적 테두리를 확장시키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축소시킨다. 자신의 작은 세계를 지켜낼 무기를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듣고 싶은 가짜 뉴스만 들으면서 어떤 과학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지구가 평평하다던가 빌 게이츠가 백신으로 사람들을 조종한다고 한다던가 하는 것을 믿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렇다고 할 때 발달하는 IT 기술은 파편화를 가속화시키고 세계를 윤리적으로 무능하게 만들수도 있다. 한국에서도 사람들이 끼리끼리 모여서 카톡으로 열심히 가짜 뉴스를 전달하는 일이 흔해지지 않았는가?
나는 여기서 이 책의 모든 내용을 나열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정신적 생활적 테두리를 봐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의 사람들은 그게 우리와 달랐고 지금의 사람들도 서로가 그게 다르다. 앞으로도 그 테두리는 달라질 것이고 달라져야 한다. 이런 지적의 끝에서 따라서 모든 테두리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이지 않으므로 그것들은 허무하고 우리는 윤리적 허무에 빠질 수 밖에 없다는 흔한 결론으로 빠져들어서는 안된다. 흔히 삶의 부조리함이라고 불리는 이런 특성은 이미 지적된지 오래다. 그걸 아직도 몰랐다면 당신은 늦은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저자는 우리가 궁리해야 한다고 말할 뿐 어떤 답을 주지는 않는다. 이것만으로도 중요한 메세지이며 그것이 정답이겠지만 나로서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하나뿐이라고 생각한다. 첫째로 우리는 각자의 테두리를 존중하고 자신의 테두리를 아껴야 한다. 여러분이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은 우연이지만 한국인으로서의 삶을 소중히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 그걸 보편성에 근거해서 무의미한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된다. 여러분의 손은 사실 어떤 다른 사람의 팔에 달릴 수도 있었으나 당신의 팔에 달려서 당신과 함께 살아왔다. 우리는 정과 인연의 문화가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손에도 배우자에도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도 정을 가져야 한다. 그것은 이미 오랜간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쓸모있는 것들이었으며 우리 자신의 일부다.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의 테두리를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세상은 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변해야 한다. 그 모순이 지나치게 누적되면 언젠가 그것이 우리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남의 발을 밟고 서서 그걸 모르는체 하고 오래 서있으면 언젠가는 두들겨 맞을 것이다. 세상의 변화를 무시하는 것이 이렇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게임의 세계에 살게 될 거라고 나는 믿는다. 게임의 세계란 우리가 다수의 테두리를 동시에 수용하는 세계를 말한다. 축구를 할 때는 축구의 룰을 지키고 농구를 할 때는 농구의 룰을 지키다가 경기장을 나오면 그걸 멈추는 것이 바로 이 게임의 세계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합의 된 룰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룰은 사실 바뀌지 말아야 하고 그 룰이 비현실적이라면 아에 새로운 게임을 해야 한다. 하나의 게임만 하려고 하고, 그 게임의 룰은 절대적이고 보편적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태도로는 21세기를 살기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이것은 이것나름의 장점이 있고 이것나름의 문제점이 있다. 하지만 그에 대해 논하는 것은 이 책의 독후감의 일부가 아니므로 여기서 멈추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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