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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휴버트 드레이퍼스의 인터넷의 철학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23. 5. 9.

23.5.9

미국 버클리대학의 교수였던 휴버트 드레이퍼스가 쓴 인터넷의 철학을 읽었다. 초판이 1999년에 집필되었고 그것을 2008년에 수정하여 2판을 내놓은 이 책은 인터넷을 통한 간접접촉에 대해서 강한 경고를 내놓고 있는 책이다. 그러니까 이 책이 주고 있는 1차적 메세지는 말하자면 스마트폰이나 컴퓨터 중독에서 벗어나서 직접 사람을 만나라는 말이 되겠다. 

 

 

어찌보면 시시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 메세지는 그 시대에 의해서 만들어 진 면이 있다. 월드와이드웹 그러니까 인터넷의 출발초기에는 인터넷에 대한 기대가 너무나 강렬했고 세상에는 그것이 모든 직접적 접촉을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너무 높았던 것이다. 그래서 대학강의는 전부 온라인 강의로 대체되고 사람들이 얼굴을 맞대는 회의는 전부 화상 회의나 온라인 커뮤니티 활동으로 대체될 것이라는 식의 주장이 높았고 지금은 그걸 모르는 사람도 많은 세컨드라이프같은 혁신이 당대의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곧 사이버 공간안에서만 활동할 수 있을 것같다는 기대가 높았던 것이다. 

 

이런 기대에 대해서 메를로 퐁티나 하이데거, 키에르케고르나 니체같은 철학자들에게 정통해있던 철학자는 그것이 지나친 기대라는 것을 지적할 필요가 있었다. 언제나 문제는 세부사항에 있다. 그저 인터넷도 그저 도구중의 하나이니 장단점이 있고 적당히 인터넷을 하고 현실세계에서 사람도 좀 만나자는 식의 결론을 얻기 위해서라면 이런 책을 읽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진짜로 위험한 때는 우리가 뭔가를 모른다고 느낄 때가 아니라 뭐야 그런 걸 누가 몰라라고 생각할 때이다. 우리는 모르면서도 안다고 착각하기에 간접접촉의 문제를 지나치게 사소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주제는 몸의 철학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라고도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던 철학자들은 어떠한 보편적 관념에 눈이 멀어서 자기 눈앞에 있는 현실을 직시할 수 없게 되는 것, 그런 보편적 관념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철학자들은 인터넷의 시대 이전의 시대를 살았다. 다시 말해서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나 몸의 철학의 문제는 인터넷의 존재 이전에도 존재했고 그것이 심각한 철학적 오류라고 지적당했다는 것이다. 다만 드레이퍼스는 이런 문제가 극대화되는 것이 직접 접촉을 완전히 배제하는 인터넷을 통한 간접접촉이라고 파악했다. 

 

사실 책을 쓰면서 인터넷을 비판하는 것에는 미묘한 균형이 필요하다. 책 자체가 간접접촉이기 때문이다. 모든 간접접촉을 철저히 부정할 것같으면 책도 쓰지 말아야 한다.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서 대화를 하는 것을 책읽기가 대체할 수는 없다고 말하면서 말이다. 이 부분에서 약간 진부하지만 나는 한가지 유명한 이야기를 인용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이야기는 장자의 천도편에 나오는 이야기다. 

 

제나라 환공이 성인의 말씀이 쓰여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루아래서 수레바퀴를 깍고 있던 윤편이 그 성인이 이미 죽고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자 그 윤편이 말한다. “그렇다면 공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 사람의 찌거기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왜 그런가 물었더니 윤편이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도 바퀴를 깍고 있는데 그 비결을 아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어서 여전히 이 늙은 나이에도 바퀴를 깍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도 분명히 자기가 체득한 것을 책에다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의 책이란 옛사람의 찌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간접적인 접촉을 통해서 진리는 전부 전해질 수 없다는 것은 적어도 동양에서는 이미 장자시대때부터 알려져 있었던 셈이다. 사실 책의 말미에서 소개되는 바에 따르면 그래서 플라톤도 글로 합의에 이르는 것은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대체할 수 없을 것이라고도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드레이퍼스는 문자와 인터넷은 다르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첫째로 문자를 쓰는 사람들이 문자가 직접 대면을 완전히 대체할 수 있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부분은 앞에서 말했듯이 인터넷의 초기에 사람들이 가졌던 과도한 기대를 말하는 것같다. 2023년현재 인터넷 간접 대면이 직접 대면을 전부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엄청나게 성장했던 메타버스의 선조 세컨드라이프도 실패했고 메타버스의 2차붐도 최근 있었지만 그것도 시들해진 참이다. 그간에 발전한 기술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앞으로도 우리는 또 무슨 기술적 발전에 따라 그런 광신에 빠져들 수 있고 직접 사람을 만나고 세상을 체험하는 것의 중요성을 너무 사소한 것으로 여기게 될 수 있다. 

 

두번째의 이유는 무비판적으로 사용할 때 웹의 사용으로 우리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매우 다를 것이라는 점이다. 우리는 높은 기량을 얻을 수 없을 것이고, 현실감각도 가지지 못할 것이며, 유의미한 삶을 살 수 있는 능력 자체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드레이퍼스는 말하고 있다. 이같은 점은 웹의 중독성이 더 강하기 때문일 수 있다. 적어도 오늘날에는 누구도 여행기가 직접 그 지방을 여행하는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멀티미디어 자료를 보여주는데다가 무한한 양의 자료를 보여주는 웹에 중독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이 현실 체험 그 자체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더 쉽게 빠지지 않을까? 티비나 보면 되지 여행은 뭐하러가냐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공평하게 말하자면 문자와 인터넷에 대한 이같은 단언은 완전히 명확하지는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의 직접적 관찰을 강조했던 것이 근대 문화 혁명아니었던가? 그러니까 어떤 의미로 문자라는 매체에 빠져서 그것이 현실이라고 생각했던 시대가 적어도 서양에는 오랜동안 있었던 셈이다. 자료만 보지말고 직접 가서 관찰하라는 시대가 열리자 이것이 극복되었다. 드레이퍼스의 말은 인터넷이라는 매체는 지금 시작되고 있으며 그래서 우리가 근대 이전의 상태에 있다고 말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같은 관점에서 말하자면 문자는 안전하고 인터넷은 위험하다는 흑백론적인 말은 할 수 없다. 모든 간접체험은 직접체험에 비해 놓치는 것이 있다. 그리고 감동적인 책이 그러하듯이 감동적인 영화도 단순히 현장에 가본다는 것 이상으로 주는 것이 있다. 즉 그건 단순히 우열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예를 들어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라 온라인 교육이란 것에도 다른 부분이 작동할 수도 있다.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중에 흥미로운 것은 인터넷 공론화장에 대한 부정이다. 드레이퍼스는 간접접촉을 통한 공론화란 바로 키에르케고르가 극히 싫어했던 일반화의 극대화라고 말한다. 인터넷 시대 이전에 대중과 언론을 통한 일반화로 나의 특수한 상황이 희석되고 마는 것에도 반대했던 키에르케고르라면 인터넷 공론화의 장이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를 바로 남의 부부싸움에는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는 교훈의 예를 통해 이해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에는 우리 남편이, 내 아내가 이러저러하게 한다, 이게 옳은 것이냐같은 말이 올라오면 이런 저런 지적을 하고 참견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이것은 꼭 인터넷의 일만이 아니다. 세상에는 남의 가정일에 참견하여 이러니 저러니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다. 문제는 이런 참견은 가정 폭력이나 불륜같은 극한의 사례가 아니라면 정당화될 수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참견할 능력 이상으로 남에게 참견한다는 점이다. 그런 조언들은 바로 일반화라는 관념적 참견이 된다. 사실 부부로 살았던 것이 자기 자신이 아니며 상황자체를 그냥 말로 혹은 글로 전해 듣기 때문이다.

 

두 부부가 있는데 이쪽 부부는 남편이 설거지를 하고 저쪽 부부는 설거지를 안하니까 첫번째 부부가 보다 만족스러운 부부생활을 하고 있다는 식의 판단은 지극히 편협한 것이다. 애정이란 것자체가 논리적 행동이 아니고 삶의 의미나 가치라는 것이 논리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아닌데 여자는 아내이자 며느라라서 이런 저런 것을 당연히 해야 하고 남자는 또 가장이자 남편으로서 이러저러한 것을 당연히 해야 한다는 식의 낡아빠진 생각으로는 적어도 21세기에 남의 가정사에 참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도 없이 생각나는대로 말하고 있는 사람들은 사실 한가지 사실에 근거해서 말을 한다. 자신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냥 의견이 그렇다는 거지 내가 무슨 책임을 지냐고 하면서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하기를 좋아한다. 그런 의견들의 다수결적인 결론이 무슨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예를 들어 80% 사람들이 이 부부는 헤어져야 한다고 말하면 헤어져야 할까? 그런 조언을 따랐을 때 생기는 비극에 대해 누가 책임을 질까? 

 

우리는 맛있는 빵을 굽는 법에 대해 제빵사와 일반인을 뒤섞어서 다수결 투표를 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하면 압도적 다수인 경험없는 사람들의 의견이 결론을 좌지우지할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특정인의 인생에 대해 그 자신보다 더 전문가라고 자처할 수 있는가? 설사 경험과 지혜의 깊이가 한없이 높은 사람들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은 아주 소수일 것이다. 그리고 그 소수도 자신이 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할 것이다. 그런데 대중에게 이런 문제를 물어서 문제를 일반화를 통해 제시하고 다수의 의견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는 일은 매우 어리석고 위험한 것이 아닐까? 그 대중에게 그 문제의 토론은 책임질 일도 없이 하는 게임에 불과하다. 그들은 사실 충분히 진지해질 필요도 없이 집중하지도 않고 입에서 나오는대로 말을 하고는 자신을 부정하는 사람과는 그게 기분 나쁘다고 싸울 것이다. 그렇다면 부부싸움이 아니라 국가정책같은 것을 토론하는 공론의 장은 어떨까? 이것은 모두에게 관련된 것이므로 각자 자신의 입장을 말할 수 있지 않은가? 그 말은 옳다. 하지만 여기서도 같은 문제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직접 대면하는 토론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터넷 토론은 그보다 더 무책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터넷 공론장의 가치나 인터넷의 가치를 완전히 포기할 것은 없다. 사실 1999년에 초판을 쓴 후 이 책은 2008년에 크게 개정되었다. 특히 1장이 그랬는데 초기에는 인터넷 검색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므로 무의미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인간의 정보선택 자료를 바탕으로 검색을 하는 기술을 구글이 적용한 이후 그 입장이 철회되어졌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지금의 인공지능의 발달처럼 기술의 발달이 계속됨에 따라 새로운 상황이 발생할 가능성은 존재한다. 사실 이런 종류의 지적은 소금을 적당히 먹어라라는 말과 비슷한 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소금은 안먹어도 안되고 많이 먹어도 안된다. 문제는 그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를 고민하는 것이다. 그런 정도의 문제는 기술의 발전에 따라 환경이 변하면 또 바뀔 수 있다. 만약 오로지 직접 접촉만 중요하다면 우리는 아직도 편지도 쓰지말고 말만 하면서 살고 있어야 한다. 인간 사회는 점차로 더 추상적인 관념을 중요시하며 살게 된다. 민주주의같은 말이 안중요하다고 할 사람은 없겠지만 이 말을 단순히 서로 얼굴 들여다보고 있다고 배우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단순히 드레이퍼스가 옳다라던가 틀리다라는 식으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마치 정의란 무엇인가같은 질문을 던질 때처럼 올바른 인터넷의 사용법은 어디까지일까라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위한 참고적 자료로 이 책은 활용되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인터넷의 영향력이 더 커지면 커질 수록 이런 고민은 더 소중한 것이 된다. 그냥 막연히 적당히하자는 생각만으로는 충분치가 않다. 세상이 인간을 기계화하고 평균화하려고 할 때 아무런 생각이 없으면 우리는 우리가 뭐가 되는지도 모르고 그렇게 변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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