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읽고

by 격암(강국진) 2023. 10. 9.

23.10.9

1982년에 출간된 월터 옹의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를 읽었다. 구술문화와 문자문화는 기본적으로 다르고 그것이 사람들의 사고에 있어서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메인 메세지로 하는 이 책은 문자사용을 중요하게 생각하던 나에게는 매우 흥미로운 책이었다. 미디어의 이해를 쓴 마셜 맥클루언의 제자이기도 한 월터 옹은 맥클루언이 그렇게 했듯이 기본적으로 인간의 사고가 도구를 만드는 것이상으로 도구가 인간의 사고를 만들어 낸다는 관점을 가진다. 그리고 다른 어떤 기술적 발전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쓰기와 인쇄라는 기술의 출현이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책이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는 것은 생각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을 기억하고 변형하는 등 다룰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안에 표현할 수 없는 생각이 이미 존재하는데 그것이 말이나 글이라는 매체를 통해서 표현된다는 생각은 옳지 않다. 그건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모르는데도 우리가 이미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었다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말과 글은 우리의 생각을 만들고 제한한다. 말로 소통하고 생각할 때는 구술문화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고 글을 쓸 때는 문자문화안에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철학이 글로 표현되고 기록되는 것이 아니다. 문자가 철학을 만든다. 문자 문화 이전의 것은 철학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이다. 

 

사진기가 출현하기 전에 사실처럼 그릴 수 있다는 기술은 대단한 의미가 있었다. 쓰기가 출현하기 이전에는 생각을 하고 기억을 한다는 것은 주로 말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문자 문화가 나타나기전에는 말하기 기술이 지적인 활동의 중심에 있었고 그것을 우리는 수사학이라고 부른다. 그런 수사학을 연구하고 가르치던 것이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였다. 그리고 그 소피스트를 극복하고 철학의 아버지가 된 것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시인을 부정했다고 전해진다. 월터 옹에 따르면 이것은 문자문화적 입장에서 구술문화를 부정하는 행위였다. 이미 문자문화가 세계를 가득 채운 오늘날과는 달리 당대의 시인이란 구술문화속에서 사고하고 기술을 전승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차적 구술문화라고 말하는 순수 구술문화는 문자이전의 것으로 까마득한 오래전에 사라졌다. 하지만 생각보다 깊게 구술문화의 영향은 지금도 우리안에 남아있다. 구술문화는 역사에 흔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사실 대중이 글을 읽고 쓰기 시작한 것은 몇백년전에 불과하다. 그것은 인쇄기술이 널리 쓰이고 나서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남아있는 이런 저런 흔적을 통해서 구술문화를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연구에 따르면 구술문화속 사람들의 사고와 표현에는 여러가지 특징들이 있다. 우선 그것은 첨가적이다. 즉 구약성서에도 나오는 표현처럼 누구는 누구를 낳았고, 누구는 누구를 낳았으며 같은 같은 패턴의 말을 반복해서 이어간다. 표나 목록을 만들어 전체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하는 것은 문자 문화의 결과물이다. 또 구술문화속의 말은 전형적인 관용구가 반복되는 일이 많고 장황하고 다변적이며 보수적이다.

 

이 책은 서양의 작가가 쓴 것이지만 구술문화에 대한 내용을 듣고 있으면 티비나 라디오가 나오기 전에 있었다는 이야기꾼들이 생각난다. 이들은 삼국지같은 옛날 이야기들을 재미있게 들려주는 사람들로 일본에는 만담가같은 사람들이 지금도 활동한다. 또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한국에서도 예전에는 4자성어를 반복해서 쓰는 일이 많았다. 그건 사필귀정이지라던가, 오비이락이라던가 같은 말을 쓰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들은 구술문화의 특징들이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과거에도 남아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구술문화의 특징들은 정보를 구술을 통해서 기억하고 이어나가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다. 앞뒤를 살피면서 전체를 구조를 보고 고칠 수 있는 글과는 달리 인간의 기억력에 의존할 뿐만 아니라 일단 한번 하고 나면 내가 한 말이 사라지는 구술은 이미 기억하고 있는 기존의 것에 새로운 것을 첨가하는 형식이 되고, 알아 듣는 입장에서도 반드시 효율적으로 압축되어져 있다는 것이 편하지만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말은 장황해지고, 단어의 수는 제한된다. 논리나 보편적 개념따위도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것은 통신으로 말하자면 압축률이 좋지 않은 통신이라고 할 수 있는데 말과 글의 차이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하다. 쓰기가 보편화되면 소리로만 기능하는 언어 이용자보다 사람들은 몇백배나 많은 어휘를 사용하게 된다.

 

구술문화속에서 사람들의 사고는 자신들의 일상에 밀착되어 있고 추상화나 보편화, 일반화 되지 못한다. 관찰에 따르면 문맹들은 톱, 망치, 낫같은 도구를 나열하면 거기서 도구라는 공통점에 주목하는 일이 어렵거나 불가능하다고 한다. 이런 차이도 말과 글의 차이가 만든다. 또한 구술문화는 상대방에 대한 의식이 강하다. 말은 하고 나면 사라지므로 항상 그것을 듣는 상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글을 쓰는 작가는 그것을 읽을 독자와 분리되어져 있다. 따라서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앞의 문장을 읽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모르고 다음 문장을 쓰게 된다. 이때문에 구술문화는 논쟁적 어조가 강하다. 상대방에게 반응을 이끌어 내기 위하고 나아가 어떤 마술적인 힘을 발휘하기 위한 것이 말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글은 누가 그것을 읽는지 모르고 그 반응도 모르면서 쓰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런 논쟁적 어조가 약해지기 마련이다.

 

결국 문자문화가 철학을 만들고, 과학을 만들어 현대 문명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는 구술 문화적 특정을 물려 받고 있기도 하고 언제나 문자문화가 옳고 당연한 것은 아니다.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위에서 말한 분리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문자 문화가 만들어 낸 극한의 결과물이 수학이나 과학이다. 그리고 이것은 사람들간의 소통에 쓸 수 없다. 수학이나 과학으로 친구를 만들고 사랑을 할 수는 없다. 극한의 보편성이 수학이나 과학을 가치 중립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은 문자로만 소통하지 않는다. 토론회를 열고, 강연회를 연다. 이것은 대중을 행해 글을 쓰는 것이 청중을 앞에 놓고 말을 하는 것을 다 대체하지 못하기 대문이다. 

 

우리는 종종 인류가 집단적으로 할 수 있는 것과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착각한다. 인간이 달에 갈 수 있다는 것이 내가 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닌 것처럼 현대는 과학 기술이 발달해 있고, 문자 문화로 가득 차 있다는 말이 반드시 내가 과학 기술을 알고 있으며, 나의 행동이 오로지 문자 문화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내부에 있는 문자 문화와 구술 문화를 모두 인식하고 그 각각의 것이 어떻게 우리를 지배하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낡은 구술문화적 특징이 우리를 쓸데없이 논쟁적이고 비논리적으로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을 얼마나 하는가? 나는 얼마나 다양한 개념들을 배우고 쓰는가? 우리의 생각은 어느새 매우 단순해져 있지 않은가? 그러면서 나는 반드시 선사시대의 사람들과 다를 거라고 믿고 있지 않은가? 문자 문화에 지나치게 빠지고 그것을 당연시 여긴 나머지 우리는 보편성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는 환경을 잊고 눈앞의 상황을 직접 느끼는 것을 포기하고 어떤 추상적 개념으로만 세상을 보는 나머지 모두와 분리되어지고 있지는 않은가? 

 

문자 문화가 완전히 힘을 얻었던 것은 낭만주의 이후라고 월터 옹은 말한다. 평면적인 인물, 인물의 외향적 면만 말하던 구술문화적 전통은 탈피되고 사람들은 이제 입체적인 인물을 소설에서 묘사하고 인간의 내부로 들어간다. 다시 말해 문자 문화의 자기 성찰적 특성이 본격적으로 들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쓰지 않는 사람은 좁은 세계에 갇힌 나머지 자신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뜻일 수도 있다. 자기 성찰은 역설적으로 더 큰 세계를 보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낭만주의는 기계적 계몽주의에 반발하여 인간을 지키려는 운동이었고 그렇기에 쓰기는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낭만주의 이후 사람들은 철학자보다 소설가에게서 삶을 배우게 되었다. 

 

문자가 그렇게나 오래전부터 쓰인 것이지만 구술문화는 끈질기게 버텼다. 더 효율적인 문자체계가 필요했고 특히 인쇄기술같은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야 비로소 문자문화가 보편화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월터는 한글을 거론하면서 최고의 문자로 칭송하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한국인으로서 거론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출간되던 1982년만해도 한국은 한자와 한글을 같이 쓰고 있었고 월터는 그것을 아쉽게 거론한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이 기술과 인간 정신을 분리해서 말하고 생각하는 경향은 지금도 있다. 그들은 선사시대의 사람이나 현대인이나 기본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이야기 한다. 그들이 인간이나 인간의 본성을 말할 때 그들은 마치 인간이라는 것이 인간의 DNA에 기록되어져 있는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언어나 문자는 인위적으로 인간이 만들어 낸 발명품이고 기술이다. 인간이 그것에 관한 어떤 본능을 타고난다고 해서 그런 기술의 영향력을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은 실수다. 

 

월터 옹은 거꾸로 말과 글이 인간의 사고를 형성한다는 시각에 가까운 관점을 보여준다. 즉 인간은 인위적 기술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서 각각의 기술의 특징이 우리를 어떻게 변화시키는가를 고민할 때 우리는 철학과 문학등 여러 분야에서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철학의 탄생이 결국 구술문화에서 문자문화로 넘어가는 사건이었다는 해석이 그 한 예일 것이다. 동양인으로서 우리는 공자같은 고대의 철학자와 문자문화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도 유익할 것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