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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글쓰기/책 이야기

돈 아이디의 테크놀로지의 몸을 읽고

by 격암(강국진) 2024. 2. 17.

미국의 철학자 돈 아이디가 2001년에 쓴 테크놀로지의 몸을 읽었다. 한국에서는 2015년에 출간된 이 책의 영어 제목은 bodies in technology로 테크놀로지에 있어서의 몸들 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합했을 것같지만 지금의 제목도 틀리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이 책이 답하고자 하는 질문은 테크놀로지 (이하 그냥 기술이라고 하겠다.)를 통해 체현된 자아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변형되었는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술이 우리의 자아 감각을 바꿀 때 그 기술은 이미 우리의 자아의 일부로 통합되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의미에서 이 몸이란 기술이 만들거나 확장한 몸이니 기술의 몸이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나는 혹은 우리는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질문들 중의 하나인 이것은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느끼는가하는 것과 관련이 있고 이는 타고난 감각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회와 경험으로부터 배운 것들에 관련되어져 있다. 타고난 감각으로 구성된 몸을 메를로 퐁티의 몸 1이라고 한다면 사회적으로 구성된 몸을 미셜 푸코의 몸 2라고 할 수 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실질적으로는 우리의 몸은 이 두 가지 차원의 혼합으로 즉 순수히 육체의 감각신호만으로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또 완전히 사회적으로 결정되는 것도 아니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기술은 우리의 몸을 바꾼다. 아마도 아주 흔하고 좋은 예는 안경일 것이다. 나같이 오랜동안 안경을 쓴 사람은 적어도 몇번인가 본인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고 세수를 한 경험을 가지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나는 아무런 도구가 없는 몸의 감각만으로 세상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나는 사실상 안경과 융합된 몸을 나로 여겼기 때문에 그런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즉 나의 감각이란 언제나 안경을 통과해서 변화된 신호라는 사실을 잊게 된 것이다. 

 

단순하지만 소위 가상현실이라고 하는 주제와 깊게 연관되어 생각해 보면 사실 안경은 지금까지 나온 어떤 가상현실 도구보다도 더 성공적인 가상현실 도구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최근에 애플에서 내놓은 비전 프로2는 가격이 5백만원이 넘으며 굉장히 신기한 디스플레이 기술을 보여주지만 비전 프로2를 쓰고 있다가 자신이 그걸 쓰고 잊다는 사실을 잊고 세수를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즉 비전 프로2같은 기기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화면을 보면서 우리는 여전히 그것이 '가상'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안경을 쓰고 보여지는 세상이 '가상'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러한 예를 생각하면서 과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던 망원경을 생각해 보자. 갈릴레오는 근대과학의 개척자중의 하나인데 그는 많은 망원경을 만들어서 행성과 달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할 때 우리는 그것을 망원경이라는 도구와 결합된 인간의 인식능력이 확장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즉 망원경을 들여다 보는 인간의 눈은 기술덕분에 굉장히 좋아졌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된 것이다. 우리는 가상 현실 기계가 보여주는 그림과는 달리 그것을 그냥 사실이라고 여긴다. 즉 가상이 아니라 현실 그대로 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 자외선이나 적외선 영역의 신호를 가시광선 영역의 신호로 바꿔서 보여주는 장치를 생각해 보자. 이런 장치가 보여주는 것은 '가상'인가 '사실'인가? 이런 장치가 보여주는 것은 이제 그냥 사실이라기 보다는 사실적 정보라는 점이 분명해 보인다. 왜냐면 맨눈으로는 우리는 자외선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비전프로2가 지금 내앞에 주가 그래프를 보여준다면 그건 왜 '가상'일까? 그것도 사실적 정보가 아닌가? 설사 그것이 유니콘의 그림이더라도 그것은 누군가의 상상에 대한 '사실적 정보'를 주는 것이 아닌가? 초음파 검사가 보여주는 태아의 모습은 가상인가 사실인가? 

 

사실과 가상에 대한 이분법적 구분을 비판하다보면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을 사실로부르고 어떤 것을 가상으로 부르는 것은 그냥 우리의 믿음, 몰두에 달린 것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 사실 아무런 인위적 도구가 없다고 해도 외부의 신호를 우리의 뇌가 해석하고 변형하여 우리에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우리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상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안경이나 망원경만 도구가 아니라 우리의 눈이나 대뇌의 시각피질도 도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도구내지 기술을 쓰면서 우리의 몸의 인식이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의 현실은 기술 때문에 바뀔 수 있다. 안경을 쓰고 또렷하게 보이게 된 세상이 현실이라고 느끼는 사람처럼 우리는 때로 도구가 없을 때 느꼈던 것이 허구이며 도구를 가지고 세상을 해석하고 볼 때 느끼는 것이 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몸의 변형이나 자아의 변형을 너무 쉽게 일어나는 것으로 말할 것은 아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2024년의 최신기술을 써도 우리는 여전히 현실을 망각하지 않는다. 본인이 안경을 쓴 것을 잊는 사람은 있어도 본인이 가상 현실 고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사람은 없다. 이는 단순히 기술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어떤 기술과 우리가 얼마나 가깝게 그리고 완벽하게 융합되는가의 문제다. 

 

예를 들어 과학적 도구들은 과학적 정보와 지식을 낳고 인간과 매우 강력하게 융합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과학과 우리 자신의 거리를 두지 않는다. 과학 도구가 보는 것은 그냥 인간이 보는 것이며 사실 그 자체다. 원자 사진이라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는 그냥 사실 그 자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보는 것과 사실 사이에는 수없이 많은 정보 변형이 있었음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고글을 벗을 생각도 없고 어떻게 벗을 수 있는지도 잘 모른다. 

 

이에 대해서 돈 아이디는 재미있는 지적을 하고 있다. 우리는 과학을 어떤 문화적 사회적 구성물로 여기기 보다는 가치 중립적인 것으로 여기지만 과학의 발전을 보면 과학은 시각적인 면을 강조하면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그의 지적을 단순히 옳다 그르다로 이분법적으로 말할 것은 아니겠지만 이는 설득력이 있는 지적이다. 만약 인간이 모두 장님이며 후각과 촉각만으로 살아가는 존재였다면 어쩌면 인간의 과학은 전혀 다른 형태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대개 시각화된 데이터를 보면서 과학적 결과에 납득하지만 음악을 듣듯이 소리를 들으면서 어떤 과학에 납득하는 세상도 상상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점은 이런 과학이라는 고글을 우리는 쓰고 있으며 그것은 가상현실 고글과는 달리 벗을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자아에게 가까워서 우리는 과학적 세계를 그냥 현실 그 자체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예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우리가 기술을 씀에 따라 쉽게 우리의 몸이 마구 확장된다고 말해서도 안되고 또한 그렇지 않다고 말해서도 안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자동차를 운전할 때 사실 우리의 몸은 자동차의 차체로 확장된다. 그렇기에 좁은 골목을 달리거나 후진을 할 때에도 우리의 감각은 아슬아슬하게 자동차가 어딘가에 부딪히게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고 우리의 손과 발은 예민하게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차에서 내리게 되면 그런 감각은 사라진다. 자동차가 발명되었고 그걸 쓴다고 해서 우리 몸의 변형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우리가 자동차와 하나가 된 사이보그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과장이다.

 

이는 여전히 인간과 완전히 융합되었다고는 할 수 없는 가상현실도구들에서도 사실인데 현실이 이런 것은 기술이전에 그렇게 하고 싶은가의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말 가상현실고글이 보여주는 것들을 현실 그 자체로 여기며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 영원한 꿈을 원하는가?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모든 인류의 꿈이라면 어쩌면 그걸 가능하게 하는 기술은 이미 나와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걸 원하지 않는가? 그 이유는 그런 고글이 없어도 세상을 사는데 큰 불편함이 없기 때문이고 그런 고글과 하나되는 것에는 불편함이라는 댓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항상 쓰고 읽기도 기술이라는 점을 말한다. 우리가 만약 읽고 쓰는 능력이 없이도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면 우리는 결코 쓰고 읽는 능력이 보여주는 즉 문자라는 기술이 보여주는 사실을 현실 그 자체로 여기면서 사는 가상현실세계로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 문명 사회에서 태어나 문자를 무시하고 산다는 것은 너무 큰 댓가를 요구한다. 따라서 우리는 읽고 쓰기를 포함하는 긴 교육을 받는 댓가를 치루면서 까지 교육받은 인간이 되어 살게 되었다. 이때문에 인간은 기술과 결합한 사이보그인 것이다. 

 

인간은 감각신호를 통해 세상에 대해 알게 된다는 문장은 너무나 옳은 것같지만 그 감각이란 문화적 기술적 도움이 없이는 아무 것도 아니다. 그리고 어떤 기술은 우리의 자아상 혹은 몸을 완전히 바꾼다. 지구가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은 감각적으로 당연한게 아니다. 그랬다면 수천년전부터 모두가 지구가 둥글며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과학적 지식에 따라 지구가 자전과 공전을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세상을 본다. 즉 우리의 감각신호를 해석한다. 실질적으로 인간은 우리의 팔다리와 몸통을 말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 인간은 사회적이고 문명적인 네트웍에 연결되어 만들어진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태양계도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는 듯한 느낌을 가진다. 

 

돈 아이디는 기술의 발전에 있어서 철학자의 역할은 이미 기술발전이 일어나고 나서 그 이후에 그것에 대한 뒷처리를 하는 편이었지만 이제는 연구개발에 있어서 함께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20년전의 주장은 내 생각에는 당시에는 그저 철학자들 사이에서나 인기가 있을 법한 것이었지만 AI가 무섭게 발달하는 지금은 이 주장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AI는 우리의 자아에 아주 가까운 기술이기 때문에 과학혁명이 그러했듯이 문화적이고 철학적인 혁명을 요구할 것이다. 우리의 자아는 AI기술때문에 몰라보게 바뀔 수 있다. 즉 우리는 AI라는 고글을 영원히 벗을 수 없을 수 있다. 왜냐면 그것이 없이는 너무 살기 불편한 세상이 미래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AI의 도입에 대해서 극렬한 찬반의 전쟁이 사방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전쟁이 이미 일어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이 전쟁은 문화전쟁이고 자아전쟁이며 종교전쟁이다. 이 전쟁을 최소한의 비극으로 끝내는 일은 과학적이고 공학적인 과제일 뿐만 아니라 인문학적이고 문화적인 과제이기도 하다. 아마 누구도 이 전쟁과 무관한 사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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