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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지루하다면

by 격암(강국진) 2022. 8. 9.

22.8.9

정도의 문제일 뿐 누구의 삶이나 힘들고 지루하다. 하지만 때로는 더 그럴 때가 있는데 그럴 때 우리는 무엇부터 확인해야 할까? 이야기고 역사고 의미다. 우리는 놀랍도록 힘든 일을 하면서 살 수 있다. 단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삶이 의미가 있고 우리의 현재가 어떤 이야기의 한조각으로 명확히 파악된다고 생각할 때 그렇다. 의미나 목적이 있는 삶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삶이 힘들 때 종종 어떤 객관적이거나 물질적인 조건때문에 우리가 힘들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건 대개 그렇지 않다. 세상에는 권태속에서 죽을 것처럼 고통스런 사람도 많은데다가 사실 우리보다 훨씬 그런 물질적 조건이 나쁜 상황에서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사랑의 이름으로 노예처럼 살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을 여러분은 세상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지루하다면 여러분이 가장 먼저 확인해 봐야 하는 것은 여러분의 이야기가 약해지고 부족해 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목표가 있을 때 우리는 몇년이고 책상에 앉아서 공부만 할 수도 있고, 날마다 육체노동을 하면서도 그 생활을 보람차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상상하기 어렵다는 출산의 아픔같은 것도 이길 수 있다. 우리는 심지어 죽음의 공포조차 그 의미와 목표로 극복하는 사례를 본다. 우리는 대개 이런 일을 알고 있지만 이 목표나 의미라는 것을 어떤 운명적인 것이나 타고난 재능같은 것으로 파악하는 사람이 많다. 즉 어떤 사람의 삶이 목적의식과 의미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그들을 마치 로또복권에 당첨된 행운아처럼 보거나 타고난 재능이 나와는 애초에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운도 없고 타고난 재능도 평범한 나의 삶은 지루하고 무의미할 수 밖에 없게 되어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대로 이야기 없는 삶이란 너무나 힘들고 지루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런 태도를 유지하면서 스스로 우리가 자신의 이야기를 찾고 이야기의 재고분을 채워놓지 않으면 우리는 누군가가 주입한 이야기에 빠지게 된다. 흔한 예가 종교와 출세욕, 물욕에 빠지는 것이다. 세상에는 이런 이야기를 당신에게 주입하여 당신을 어떤 큰 이야기의 일부로 편입시키려는 시도가 많이 있다. 당신이 불교신자나 기독교신자 혹은 사이비 종교의 신자가 된다면 당신의 삶은 신자로서의 의미를 가지게 되며 그것은 그 종교를 믿는 다른 사람에게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당신이 축구의 광팬이 되는 것은 당신의 삶을 더 견딜만한 것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다른 축구팬들에게도 의미가 있다. 따라서 사람들은 성공과 경쟁의 토너먼트에 당신을 초대하거나 투기와 탐욕의 경기장에 당신을 초대하는 것이다. 왜냐면 피라미드 사기가 그러하듯이 언제나 더 많은 참석자가 있어야 그런 게임들은 유지될 수 있고 미리 거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편하게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투기에 미친 사람이 많아야 당신의 매물은 계속 팔리고 가격이 높아질 것이다. 

 

우리는 원하던 원하지 않던 어떤 이야기의 일부로 살아간다. 그런데 원하지 않는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 사람들은 아무래도 집중이 잘 안된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같다. 따라서 당신의 참여는 열정적이지 않으며 당신은 광신도가 되지도 그렇다고 거기서 완전히 빠져나온 것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엘리트 코스를 따라 성공을 향해 달리는 길위에 있지만 때로는 이게 다 뭔가 싶고 그저 다 때려치고도 싶은데 그런 길 위에 있을 때 우리는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성공의 길을 때려 치기 위해서는 성공이 필요하다.' 

'돈 걱정을 하지 않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

'성욕을 잊고 살기 위해서는 그것을 완전히 충족시키는 경험이 필요하다.'

 

이건 마치 담배를 끊자면 일단 담배를 원없이 피워야 한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리고 물론 그런 식으로는 담배를 절대 끊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뭔가를 더 많이 가지려고 하는 것이나 그것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모두 일종의 집착이랄 수 있다. 그러므로 뭔가를 부정하는데 몰두하는 것도 대개는 결과가 좋지 않다. 마치 금식으로 살을 빼다가 요요현상이 오는 사람처럼 우리는 뭔가를 억누르고 참다가 결국은 다시 돌아와 그것에 몰두하는 일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야기의 부정도 긍정도 아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전부가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다. 돈을 긍정하지만 돈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는 다른 이야기가 필요하다. 계속 돈이 좋은가 나쁜가만 생각하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안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이 좋은 이야기로 채워지게 되는가?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중요한 질문을 잊지 않는 것이다. 때때로 그리고 계속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삶이 좋은 이야기로 채워질까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면 여러분은 그 답도 찾게 된다. 생각해 보면 여러분은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 우리는 대개 질문하기를 중단한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던 어떤 이야기에 너무 빠진 나머지 새로운 이야기를 찾을 수 있다라는 가능성을 잊어버리게 된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이 글에서 여러번 말했듯이 돈의 패러다임, 돈의 이야기에 빠져 있으면 모든 것을 그래서 돈이 좋다는건가 나쁘다는 건가하는 식으로 생각헤 된다. 새로운 이야기 따위는 다 헛소리로 들리게 된다. 

 

주말에 시간이 날 때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찾아가 보라. 아마도 거기에 있는 것은 대충볼 때 옛날에 학교 교과서에서 대충들었던 것들과 다르지 않아 보일테지만 여러분이 애정을 가지고 보게 된다면 여러분은 거기서 뜻밖에 당신의 이야기를 발견하게 될지 모른다. 고대 이집트의 문명에서 여러분은 스스로가 인간이라는 사실을 더욱 더 대단하게 느낄지 모르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사람들의 모습을 보다보면 여러분의 삶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게 될지도 모른다. 번화가의 음식점들 사이를 걷다가 당신은 냉면에 대한 열정에 빠지게 될 수도 있고, 당신의 삶은 이제 다 끝났다고 생각했지만 당신의 손녀와 이야기한 5분이 당신의 삶을 바꿔놓을 수도 있다. 

 

작가나 연구원은 하나의 작품이나 논문을 끝내면 다시 다음번 작품이나 연구주제를 찾아 헤매게 된다. 그걸 잘해내는 사람들을 창의적인 인간들이라고 부르는데 사실 겉으로는 아무 것도 안하고 빈둥거려 보이는 그런 시간이 알고보면 가장 중요한 경우도 많다. 모짜르트는 이미 음악은 머리속에 다 있는데 받아적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지만 작품이나 연구도 착상의 순간에 상당부분이 이미 결정되게 된다. 그 착상이 좋지 않으면 아무리 시간을 들여도 영 시원치가 않고 반대로 그 착상이 좋으면 모든 일은 마치 저절로 풀려가듯이 이뤄진다. 그렇게 일이 잘 될 때에는 몸을 움직여 글을 쓰거나 뭔가를 계산하고 실험하는 일 따위는 마치 일은 벌써 완성되었는데 그걸 받아적는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건 힘도 들지 않고 즐거운 시간이다. 

 

여러분의 삶이 힘들고 지루한 이유는 스스로 창의력을 포기하기 때문이고 그걸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이따금 겨우 찾아온 영감을 스스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버려버리기 때문이다. 작가는 노트를 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분도 사소한 그 생각을 적어보는게 어떤가? 여러분의 삶이 여러분의 손에서 창조되어지는 새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보다 세상의 압력에 의해, 혹은 그저 타고난 어떤 운명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라고 수동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글하나 썼다고 인생이 끝나지 않는 것처럼 세상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다. 

 

새로운 이야기로 삶의 목적으로 우리를 채우는 일은 운명도 재능도 아니다. 그런 것의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상당부분은 모든 일이 그렇듯 그저 성실하게 노력한 결과다. 다만 노력한다는 것이 어떤 이야기에 빠져서 허우적거리는 것을 노력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여기서 말하는 노력은 바로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 노력, 감수성을 지키려는 노력, 이따금씩은 멈춰서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노력같은 것들이다. 여행이든 독서든, 어떤 모임에 참가해 보는 것이든, 글쓰기든, 박물관에 가보는 것이든, 어린 시절의 고향에 가보는 것이든, 요리를 해보거나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고 책상속을 다 뒤집어 물건을 버리는 것이든 자기를 되돌아 보고 세상을 둘러보고 뭔가를 느끼려고 하는 노력이다. 몸이 뭘 하고 있는가 하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어떤 메뉴얼 따르듯 뭔가를 해봐야 남의 흉내를 내는 것밖에 안된다. 참선과 졸기의 차이는 질문을 멈추는가 멈추지 않는가의 차이라고 믿는다. 바로 이런 노력이 중단될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절망과 권태가 우리를 찾아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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