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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by 격암(강국진) 2022. 8. 29.

22.8.29

배가 고프면 밥의 소중함을 알고 추우면 옷의 소중함을 알며 잠잘 곳이 없으면 집의 소중함을 안다. 이것은 자명한 일 같지만 사실 사람은 이보다도 더 어리석을 때가 많다. 다시 말해 추워서 떨다가 옷을 걸치고 그 추위에서 벗어나도 옷의 가치를 배우지 못하는 것이다. 왜 이런가? 인간의 머리속에는 보잘 것없는 생각들이 가득 차 있어서 그렇다. 도박으로 가정파탄을 겪은 도박중독자는 다음 번 도박에서 이기면 모든 보상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즉 그는 그의 아픈 과거로부터 도박을 하면 아프고 소중한 것을 잃게 된다는 것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 도박중독자는 여전히 과거의 경험을 운이 없던 것뿐이라고 '해석'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박 중독자의 일일 뿐이랴. 얼마전에 나는 인구가 점점 줄어들어서 소수의 노인들밖에는 없는 지역 사람들을 인터뷰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사는데 힘든 일이 없는가를 묻는 사람에게 그 노인 분은 젊은 사람이 없으니 전구 하나 가는 것이 어렵고 동네에 할 수 없는 일이 너무 많다고 말씀하셨다. 물론 한국에서 젊은 사람들이 노인을 도와주는 것은 미덕이요 의무에 가까운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 노인분이 말씀하시는 어투에서 뭔가 이질적인 것을 느꼈다. 머릿속에서 만약 좀 젊은 사람이 그 동네에 이사가면 그 동네 노인들이 필요로 하는 잡일을 전부 해주고 고구마나 김치 같은 걸 받는 장면따위가 그려졌다. 아름다운 것같지만 이런 그림이 비현실적인 것은 '시골에 낙향하여 뿌리박고 살면서 온동네일을 대신하는 젊은이'에게 감사하다는 말이나 김치쪼가리로 보상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어느 정도의 부담을 상대에게 줄 것이며 그것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그들에게 진지한 생각이 정말 있을까?

 

이 노인들은 젊은이들의 절망으로 고향이 죽어가는 경험을 오래오래 하셨음에도 젊은이의 가치를 여전히 과소평가하고 있다. 어떤 지역이 죽어가는 핵심적 이유에는 바로 이런 낡은 관념이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들은 이들이 젊었을 때 혹은 그 이전에 만들어진 관념에 따라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보상한다. 동네에 젊은 사람들이 넘쳤을 때는 젊은 노동력을 그런 식으로 구하기 쉬웠을지 몰라도 지금은 전혀 그런 때가 아닌데 이웃이니 어른이니 손윗사람이니 하는 식의 관계에 대한 관념으로 다른 사람을 대하려고 한다. 옛날에 비 많이 올 때 물한바가지에 10원이었다고 해서 당장 목말라 죽을 것같은 가뭄인데도 10원을 들고 물한바가지를 팔라고 하면 물을 구할 수가 있겠는가? 세상이 변했는데 낡은 생각만 가지고 그 지역을 예전처럼 굴러가게 하니 지역은 망할 수 밖에 없다. 지역이 장사좀 잘된다고 가게세를 계속 올려서 젠트리피케이션이 일어나고 동네가 망해도 집주인이 뛰어난 세입자가 없어서 아쉽다고만 하고 있으면 동네가 살아날 희망은 없지 않은가? 아인쉬타인이 말했듯 똑같은 일을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가 나올 것을 기대하는 것은 미친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리의 시야가 고정되고 좁아져서 뭔가를 당연한 것으로만 여기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도박중독자가 아니라도 많은 사람들은 돈에 중독되어 있다. 그래서 젊었을 때와 지금이 상당히 다른데도 별거 아닌 보살핌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 자기에게 소중해진 것의 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어떤 노인의 재산을 관리해 주고, 그의 의식주를 보살펴 주며, 그가 여행을 가거나 외식을 한다고 할 때 혹은 병원에 가야 할 때 상담도 해주고 예약도 해주는 그런 모든 서비스를 잘해주는 전문적인 서비스가 있다면 그것에 우리는 어느 정도의 보상을 해야 할까?

 

완전한 타인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둘째치고 사실 그런 서비스는 돈으로 보상하려고 하면 어마어마하게 비쌀 수 밖에 없다. 잠깐만 생각해도 그것은 수십개의 전문서비스들의 종합이다. 그런데 친절한 이웃이 있거나 친척이 있거나 착한 자식이 있거나 혹은 좋은 지역 정치가가 있거나 하면 그런 서비스를 거의 공짜로 받는다. 아는 사람이 준 정보 하나가 때로는 생사를 가른다. 나이 많은 노인들은 대개 그래서 고독하게 살면 말그대로 생사의 위기에 처하는 일이 많다. 전자렌지나 전기주전자 다루는 법을 몰라서 화재가 날 수도 있다. 엉터리 계약으로 매달 많은 돈을 낭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돈에 중독된 사람은 눈에 보이는 돈만 본다. 그러니까 한달에 몇십만원 용돈주는 아들이 효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들여다보고 사소한 것을 챙겨주는 것이 훨씬 더 가치가 큰데도 심지어 돈이 부족하지 않을 때도 누가 현금을 주면 현금준 사람이 고마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선거때 푼돈이나 악수정도에 표를 팔아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런 짓을 한다. 그들은 누가 진정으로 자신을 보살펴주는가를 보지 못한다. 진짜 일꾼은 도둑놈이라고 하고 진짜 도둑놈은 고마운 사람이라고 하다가 결국 난처한 상황에 처하는데 안타깝게 자신이 왜 살기 힘들어졌는지를 이해도 못한다. 

 

이것이 노인만의 일이랴 젊은 사람들도 온갖 생각에 빠져서 뭔가를 소중히 여기고 피해의식을 가지고 고마움을 느끼기도 한다. 예를 들어 차별, 구체적으로 남녀차별의 문제를 보자. 남녀가 평등하다, 인간이 평등하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똑같다는 말이 아니다. 그러면 인간이 다 평등한데 왜 누구는 대통령을 하고 누구는 백수인가? 왜 누구는 모델이고 누구는 모델을 할 수 없는가? 차별이 존재한다는 말은 누군가가 어떤 자리에 적절한 자격을 갖췄는데 그걸 가지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뛰어난 능력을 가졌는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사장이 될 수 없다면 그것은 차별이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명확하다. 그런데 여기서 회색지대가 나타난다. 어떤 여자가 나는 차별당했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 안에 자신이 어떤 자격을 갖췄다는 말을 기정사실로 여기는 것이다. 그런데 자격을 갖췄다는 말이 애매한 경우는 많으며 어떤 사람들은 아예 자격따위는 생각도 안하고 남자와 여자는 똑같아야 한다고 주장할 때도 있다. 그래서 페미니즘이나 인종차별 주장이 거꾸로 독이 될 때도 있다. 여자나 흑인이면 자기 실패는 전부 사회적 차별 때문이라는 생각을 쉽게 하고 떼를 쓰기 시작해서 그걸로 득을 보기 시작하면 실패의 구덩이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인종차별이나 페미니즘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전부 이렇다고 말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진짜 차별은 존재한다. 그러나 차별을 주장하는 사람이 모두 옳으며 그럴 때마다 진짜 차별이 존재한다고 믿는다면 당신은 바보다. 

 

남녀차별이 아니라도 당신은 당신이 어떤 차별의 피해자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누군가는 나보다 더 사랑받았고, 나보다 더 많은 기회를 받았고, 나보다 더 많은 재산을 상속받았다. 내가 겨우 여기 서있는 것은 그 차별들 때문이다. 그 말들은 상당부분 옳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차별에 대한 주장은 근거가 없을 것이고 무엇보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돈만 아는 노인이 눈이 멀어서 자신을 위험하게 했듯이 우리가 눈이 멀어서 뭔가 소중한 것을 등한시 한 것은 아닌가? 당신이 아이스크림을 적게 받은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실은 스스로 던져 버린 더 소중한 기회는 알지도 못하고 아이스크림을 적게 받은 것만 분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당신은 정말 진심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부러워 하는가? 혹시 그 사람이 가진 것중에서 달콤한 것만 부러워 하고 쓰디 쓴 나머지 부분은 무시하고 있는거 아닌가? 

 

우리 인간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는 타인에 대한 사랑으로 인간은 산다고 말한다. 이 말도 옳지만 옳은 말은 많을 것이다. 나는 인간은 성장을 위한 기회로 산다고 믿는다. 우리가 가진 것은 계속 변하고 여러가지 이유로 우리 손에 들어왔으며 무엇보다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그 의미가 자꾸 변한다. 어린 시절의 좌절이나 아픔이 나중에 보면 그 사람이 성공하는데 결정적으로 소중한 발판이 되는 이야기는 세상에 너무 많다. 일부러 좌절이나 실패를 초래할 것은 없으며 지금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도 물론 소중한 것일테지만 우리가 살다보면 그게 변하는 때가 온다. 그 때는 어떻게 보면 좌절과 방황의 시기다. 

 

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우리가 옳은 선택을 하고 새로운 것에 눈을 뜨면 우리의 삶은 더 의미있고 행복하고 폭넓은 것으로 변한다. 젊은이의 졸업이 대표적인 성장을 위한 기회의 순간이지만 사실은 은퇴나 노화도 그렇다. 나이가 드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다. 오히려 드디어 자유롭고 행복한 새 삶을 살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이런 예가 아니더라도 살다보면 우리는 이런 크고 작은 파국의 시간을 자꾸 만나게 된다. 이때 우리가 뭘 하는가가 정말 중요하다. 둥지에서 뛰어내린 어린 새는 날지 못하면 죽을 것이다. 하지만 둥지에서 뛰지 않는 새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환경은 이미 바뀌었는데 낡은 생각과 방식만 고집한다는 것은, 낡은 시각과 피해의식만 고집한다는 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다. 살기 위해서는 성장을 위한 기회앞에서 새로운 것에 눈 떠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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