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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봉건주의자와 평등주의자

by 격암(강국진) 2022. 11. 14.

22.11.14

살다보면 물건을 받거나 살 때가 있다. 혹은 물건이 아니더라도 어떤 도움을 받거나 노동을 부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럴 때는 자연히 그럴만한 것인지 그래서는 안되는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일에도 좀 깊게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 있다.  우리는 어떤 것을 주고 받아야 할까? 어떤 것이 소중한 것일까? 여기서 그 배후의 철학과 신념이 어떤 역할을 하게 되는가? 이 고민이 깊어지는 것은 물건의 가치란 사람마다 다르다는 사실에서 주로 기인한다. 사실 물물교환이 이뤄지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우리에게 덜 중요한 것을 주고 돈을 받거나 다른 물건을 받는다. 그런데 물건의 가치란 사람마다 다를 뿐 아니라 같은 사람에게도 다른 시기에는 다를 수 있다. 아플 때는 약이 매우 귀한 것인 것처럼 말이다. 

 

사람마다 때에 따라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더 입체적인 문제로 만들어 주는 것은 요즘 세상에는 많은 것들에 가격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다. 즉 내게는 전혀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 다이아몬드라고 해도 그것의 가격이 천만원 일억원이라면 나는 그 것이 무가치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다. 게다가 그걸 팔거나 교환할 생각이 없다고 하더라도 가격은 심리적 의미를 가진다. 누군가가 술을 마시지 않는 자신에게 쓸모 없는 고급 양주를 나에게 준다고 하자. 그런데 사실 나도 그 양주를 마실 생각이 없으면 그 고급 양주는 그 사람에게나 나에게나 별로 가치가 없다. 그런데도 그 양주의 가격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 수십만원의 가치를 지닌 것을 주거나 받았다는 부담을 남긴다. 마치 송로버섯의 맛따위는 모르는데도 천만원짜리 송로버섯을 먹어버린 느낌이랄까. 

 

문제는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도움이나 노동은 종종 형태를 지니지 않으며 정확한 시장가치를 따지기 어렵다. 워렌버핏과의 점심은 천구백만 달러로 이백오십억이나 하는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그게 그런 가치가 있을까? 딸과 엄마의 식사는 그럼 얼마나 가치가 있는가? 그것이 무한한 가치가 있다거나 별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어떤 문맥에서 말하는가에 따라 다 옳은 이야기다. 사실 투자에 관심없는 엄마에게는 워렌버핏과의 점심보다 딸과의 점심이 더 중요할 것이다. 

 

가치의 문제가 복잡하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 복잡성은 충분히 고민되고 있는 것같지는 않다. 나는 특히 이 돈이라는 매개를 통해 가치에 대한 평가가 굳어져 있는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심각한 충돌을 만들어 내는 것도 보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끼니를 걱정할 정도의 가난한 사람을 만났는데 차를 한잔 대접받거나 귤을 대접받는다고 하자. 이것은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매우 융숭한 대접을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이런 귀한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해 미안하고 황송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이재용이나 주커버그같은 엄청난 부자에게는 먹다가 남은 와인이나 과일도 엄청나게 비싼 것일 수 있다. 그렇다고 할 때 먹다 남은 걸 나에게 던져줘도 나는 미안하고 황송하게 생각하며 그것을 받아야 할까? 

 

소위 객관적 가치에 몰두하는 사람들중에는 사실 그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물의 가치를 고정되고 객관적인 것으로만 본다. 그러니 쓰레기통에서 건져준다고 해도 그게 바깥에 나가서는 비싼 것이 될 수 있다면 기쁘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이런 사람들은 사물의 가치나 행동의 가치 뿐만 아니라 사람의 지위도 마치 질량이나 높이처럼 객관적으로 존재하며 따라서 누가 누구 보다 더 높은지 낮은지를 딱딱 따져야 하고 따질 수 있다고 믿는다. 나는 이 글에서 이들을 봉건주의자라고 부를 것이다. 이들은 사실상 세상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내지 왕과 머슴의 관계로 파악하기 때문이다.

 

평등주의자는 왕을 만나면 왕이 되고 거지를 만나면 거지가 된다. 록스타를 만나면 록스타의 규칙을 이해하려고 하고, 대학교수를 만나면 대학교수의 세계를 이해하려고 한다. 나를 잃어버리지는 않지만 상대의 세계도 이해하려고 하고 두 사람의 만남은 두 세계의 만남이며 두 세계는 모두 평등한 입장에 있다고 여긴다. 그래서 거지의 차 한잔은 황송하게 받지만 엄청난 부자의 스테이크는 대단치 않게 여기는 것이다. 사물의 가치는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세계와 내 세계라는 기준으로 평가되며 따라서 그에 관련이 없으면 가격이 어떻든 유명세가 어떻든 관심이 없다. 

 

반면에 봉건주의자는 세상을 이런 다양한 게임내지 작은 세계의 총합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큰 게임내지 하나의 세계로 본다. 모든 사람이 그 하나의 세계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오직 하나의 가치관, 하나의 질서, 하나의 가격체계가 통한다. 그래서 사실상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 위계질서로 위에서 아래로 나열 할 수가 있다. 마치 몸무게 순으로 사람을 나열하듯이 말이다. 

 

순수한 평등주의자가 되고 봉건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모두 비현실적이다. 현대사회는 봉건주의자로 살 수 있을만큼 단순하지 않다. 작은 동네의 왕처럼 산다고 해서 직장에서도 말단사원일뿐인 자신이 왕인줄 알다가는 큰 코 다치기 마련이다. 회사사장도 업무시간이 끝나고 동호회에 가면 업무시간에는 자기 직원이었던 사람의 명령을 받는 초보 회원일 수 있다. 물론 돈이 너무 많아서 그런 장학금을 준 것정도는 기억도 못하는 사람이 나에게 장학금을 줬다고 해서 그런 도움은 전혀 가치가 없다고 여길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봉건주의자와 평등주의자의 차이가 이 정도 문제로 모두 사라지지는 않는다.  

 

봉건주의자는 만원은 만원이라고 생각한다. 평등주의자는 거지의 만원과 부자의 만원은 서로 다른 것으로 여긴다. 사람과 사물의 가치는 그것이 놓여지는 문맥에 따라 다 달라진다. 이때문에 봉건주의자는 평등주의자를 객관적이지 못한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볼 수도 있지만 그건 뭐가 가치가 있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이며 오늘날의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가치에 대해 우리는 뭘 상상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평등주의자는 사실상 나는 내 세계안에서 거의 충분히 행복하니 그저 다른 사람과 무난히 공존하고 싶다고 여긴다. 그러니까 누군가가 자신의 세계에서 전봇대로 이를 쑤시던 다이나마이트를 집어삼키던 그걸 전부 내 문제로 여길 생각이 없다. 물론 다른 사람과 함께 사니까 질문도 하고 소통도 하면서 세상에 대해 배우고 비판하고 조언도 하는 일이 있겠지만 어차피 남의 사정과 세계를 다 아는 게 아니니까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특히 나에게 큰 피해가 되지 않는다면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일일이 간섭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봉건주의자들은 타인을 만나면 상대방을 주인으로 섬기거나 자기의 머슴으로 만들려고 한다. 그들은 서로간의 차이를 인정하며 평안하게 공존할 수가 없다. 그들은 내 문제를 선을 넘어 상대방의 문제로 만든다. 그들은 마치 제국주의자처럼 상대방을 식민지로 만들지 않으면 스스로가 식민지로 변하는 것이 세상이라고 파악한다. 

 

앞에서 말했듯 100% 평등주의자는 비현실적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평등주의자에게는 거지의 한시간이나 부자의 한시간이나 똑같다. 물론 나의 관심사와 그들이 무관한 사람들이라면 말이다. 내가 기타를 배우고 싶다면 기타를 잘 치는 사람과의 한시간은 평등주의자에게도 각별한 가치가 있다. 내가 과학자라면 탁월한 학자와의 한 시간은 각별한 가치가 있다. 그러나 어쩌다 참석한 사교적인 자리에서 만난 누군가라면 유명하던 부자던 나이가 많던 적던 학벌이 높던 낮던 당장은 그런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그 사람이 산처럼 돈을 가지고 있다고 한들 그게 내 돈은 아니니 그런가 싶다할 뿐이다. 

 

봉건주의자들은 이렇지 않다. 그들은 일단 상대방이 서열에서 자기보다 위라고 여기면 마치 타고나길 귀족으로 태어난 사람을 머슴이 만나듯 쓸데없이 굽신거리고 그 귀하신 분의 사소한 도움이나 짧은 시간을 마치 금과 은처럼 귀한 것으로 여긴다. 이건 상대방에 대한 존중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게 입장이 반대가 되면 반대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기보다 지위가 낮다거나 덜 유명하다거나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면 상대방의 시간은 무의미하며 상대방이 나에게 해주는 도움따위는 제 아무리 자기에게 도움이 되고 상대방에게 무리한 것이었더라도 별로 대단한 것이 아닌 것처럼 판단한다. 그래서 봉건주의자들은 나이니 재산이니 직장에서의 직위이름이나 학벌을 소중히 여긴다. 사람을 만나면 서로 서로 꼬박 꼬박 김박사, 조이사라고 부르거나 사람 만나면 나이부터 확인하거나 비싼 차를 타고 다니며 그걸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바로 이 봉건주의자들이다. 걸핏하면 주변사람에게 형제라는 둥, 아들딸이라는 둥하고 말하는 사람도 이 사람들이다. 그들은 또한 그게 뭐가되든 많이 가지면 좋은 거라고 생각하며 자기 기준이 없기 때문에 시장가격이나 브랜드에 몰두한다. 자기에게 필요없는 거라도 시중에서 가격표가 붙은거라면 산처럼 쌓아놓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신분들은 대개 눈치챘겠지만 나는 평등주의자에 가깝다. 그리고 내 관점에서 보면 봉건주의자들은 대개 불행하다. 봉건주의자들은 객관성운운하지만 결국 자기 세계를 만들지 못하고 남의 세계에 기생하며 사는 사람이다. 그리고 생각만큼 객관적이지도 않다. 그들이 보기에 이 세계 안에서 자기가 가지고 싶은 것은 대개 자기가 굽신거려야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 봉건주의자들은 자신이 굽신거리고 봉사하는 댓가로 왕이나 주인에게서 댓가를 받고 그걸로 사람은 산다고 여긴다. 행복이 남에게 굽신거리는 것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리고 물론 그 스트레스는 자신보다 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갑질을 하는 걸로 푼다. 그리고 그렇게 살다보면 자신도 자신의 왕국에서 정점에 올라 계속 갑질이나 하며 살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런데 99칸 집을 짓고 살던 조선시대의 양반도, 거대한 성을 짓고 살던 유럽의 귀족도 이제는 모두 과거가 되었다. 적어도 대개는 그렇다. 그래서 요즘은 부자들도 호텔에가서 자며 그 호텔바깥에서는 물론 호텔직원과 그 부자의 관계는 그냥 평등하다. 호텔에서는 호텔게임을 했을 뿐이다. 이렇게 이미 세계는 수없는 게임들이 독립적으로 행해지는 곳으로 나뉘어 졌다. 내 왕국을 만들어 뭐든지 나에게 굽신거리는 머슴을 두고 살겠다는 생각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매우 비효율적이고 그런 왕국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한 사람만 왕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머슴으로 사는 세계가 경쟁력이 떨어지기에 오늘날 모두가 공화국의 시민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봉건주의자는 객관성 운운하면서 잘난체하지만 시대에 뒤져도 한참 뒤진 것이며 세상을 모르기는 자기가 제일 모르는 것이다. 

 

공화국의 시대에 이제 와 봉건주의자들의 문제점들을 길게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가지만 이야기하자면 바로 이 경쟁력의 퇴조때문에 대부분의 작은 세계에서 왕은 아무 머슴도 없이 혼자만 왕국에 남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는 왕이 아니라 작디 작은 자기 세계에 스스로 갇힌 죄수가 된다. 아무도 그 사람의 신하나 머슴이 될 생각이 없는데 모처럼 호의로 그와 만나주는 평등주의자가 있어도 자기 세계가 온 세상인줄 아는 그는 그 사람을 머슴으로 만들거나 자기 주인으로 섬길 생각을 한다. 하지만 주인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책임질 생각도 없고 누군가의 머슴이 될 생각은 더욱 더 없는 그 사람은 그냥 가버릴 것이다. 그러다가 보면 그가 만날 사람은 결국 사기꾼 뿐이다. 주변의 좋은 사람들은 전부 쳐내고 그런 사람만 남을 것이다. 그것이 그 왕국의 끝이다. 수많은 왕국들이 그런 식으로 망했다. 

 

봉건주의자란 결국 정신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다. 직함이나 고급옷이나 나이로 하는 자랑따위를 던져버리면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으니까 그런 껍데기에 더욱 더 매몰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사실 하나의 작은 세계안에 너무 오래있던 나머지 그 바깥을 볼 수도 없고 그 바깥에 관심도 없으며 그 바깥에서 무능해지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누군가에게 의지하려고만 하거나 끝없이 지배욕을 발휘한다. 티끌같은 직함이나 명예에 몰두한다. 누군가가 자신의 무능을 꽤뚫어볼 것이 겁나는 것이다.

 

때로 평등주의자나 자기만의 감옥에 갇힌 외로운 봉건주의자나 겉으로는 비슷하게 외로워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매우 다르다. 평등주의자는 자기의 세계안에서 기본적으로 행복하다. 자기 삶의 의미를 알고 있고 허무주의에 빠지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그 세계는 그 자신이 만든 것이다. 그 세계를 만들고 키우는 것은 그 사람이 택한 모험이다. 하지만 봉건주의자는 대개 관습에 의해 그것을 물려 받은 것이다. 그 안에서 그나 그녀는 남에게 의지하고 남을 지배하지 않으면 불행한 사람이기 때문에 외로워지면 사실 아주 무능하고 불쌍하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그들의 가치관이 망해버린 왕국에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은 사물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가격표와 브랜드 이름만 볼 수 있는 사람이 옷을 보는 꼴이랄까. 관행을 자기의 정체성의 핵심으로 삼은 그들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 지극히 떨어진다. 

 

평등주의자는 이와는 완전히 반대다. 평등주의자는 여러개의 게임들내지 세계들이 공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자신이 세운 세계의 가치관에 충실할 뿐 아니라 여러가지 상상력으로 동시에 여러개의 세계를 만들기도 한다. 우리는 축구를 하다가 농구를 하고 바둑을 둘 수도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을 재해석해서 우리는 여러개의 게임속에서 사용할 수가 있다. 따라서 평등주의자는 당면한 문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결하는 것에 집중한다. 행복한 저녁을 위해 엄청난 비용을 꼭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달이 잘보이는 밤이면 안빈낙도의 즐거움을 즐길 수도 있어야 한다. 자기가 직접 고르거나 만든 술이 있다면 그것이 백만원짜리 와인보다 더 뜻깊을 수도 있다. 평등주의자는 창의적이며 문화적으로 훨씬 더 풍요로운 사람이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100% 평등주의도 비현실적이지만 봉건주의는 이 시대와 맞지 않고 따라서 점점 더 비현실적인 것이 되어가고 있다. 세상에는 마치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고 1인가구가 되듯이 여러크기의 세계들이 있고 어떤 사람은 혼자서 살고 어떤 사람은 남에게 의지하면서 살지만 그래도 비교적 작은 자기들만의 공동체에서 산다. 게다가 하나의 사람이 하나의 세계, 하나의 공동체에만 속하는 경우는 오히려 드물다. 사람들은 동시에 여러가지 집단에 속하면서 여러가지 정체성을 공유하면서 살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여전히 꽤 큰 왕국도 존재하는데 예를 들어 돈많은 재벌집안같은 것들이 좋은 예일 것이다. 미래에도 이런 현실은 어느 정도 같겠지만 추세는 분명하다. 대가족이 핵가족이 되듯이 왕국들은 무너지고 있다. 미래는 평등주의자들의 것이다. 

 

봉건주의나 평등주의같은 말들은 여러 선입견을 가지고 있다. 개인주의나 상대주의같은 말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문제는 단어가 아니라 그 뜻이다. 세상에는 봉건주의를 멸시하며 자신을 자유민주주의자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이 글의 문맥에서 말하는 봉건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아주 많다. 그리고 물론 스스로를 평등주의자라고 생각하며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평등주의자를 엘리트주의나 차별주의자로 생각하는 봉건주의자도 많을 것이다. 이 글에서 말하는 봉건주의자는 절대적이고 측정가능하며 객관적인 가치를 믿는다는 뜻에서 고전주의자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며 또한 평등주의자는 여러 게임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뜻에서 게임주의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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