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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젊고 지친 사람들에게

욕망과 능력의 균형

by 격암(강국진) 2023. 1. 21.

23.1.21

행복하기란 참으로 쉽지 않고 여러가지 이유들이 그것을 막지만 행복이 힘든 것에는 아주 흔하고 중요한 한가지 이유가 있다. 그건 욕망과 능력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룰 때만 행복이 가능하며 그 균형이 깨지는 경우에는 어느 경우든 불행하게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이 순환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지키고 남과 비교하는 일도 없이 사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고 적어도 이 균형의 의미를 생각도 안해본 사람들은 그럴 수가 없다.  

 

욕망이 큰데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 사람이 불행한 것은 이해하기 쉬워 보인다. 그런데 욕망이 작고 능력이 넘치는데 왜 불행한 걸까? 욕망이란 건 그냥 생기는 게 아니다. 그것은 대개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야의 넓이와 관계가 있고 우리가 스스로를 누구와 비교하는가와 관련이 있으며 다시 말해서 이정도가 평범하고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기준과 관계가 있다. 만약 우리가 하루 세끼를 먹는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가난한 동네에서 태어난다면 우리는 물론 배불리 먹는 꿈을 꿀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도 한끼에 수십만원 하는 스테이크를 먹거나 멋진 바에서 진귀한 술을 마시는 꿈을 꾸지는 못할 것이다. 그런 것은 우리의 시야에서 너무 멀기 때문에 상상도 안가고 실제로 갑자기 그런 고급 음식이나 술을 마신다고 해도 별로 맛도 못느끼기 쉽다. 결국 우리의 욕망과 상상력은 이렇게 우리의 환경과 현재 위치가 주는 체험에 의해서 제한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욕망이 작은데 능력이 넘치는 사람이란 대개 가진 바 재능을 다 펼치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본인은 눈이 두개인데 눈이 하나인 사람들 사이에서 살면서 그들은 괴짜라거나 바보취급을 받으면서 산다. 맛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미각이 발달된 사람이고, 미적 감각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미적 취향이 있는 사람이며 일관성도 없고 기억력도 없는 무식한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지적이고 합리적으로 사고 하는 사람이다. 능력이란게 어떤 환경에서건 넓은 시야를 스스로 확보하고 그런 세상으로 스스로 나갈 힘을 말한다면 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나 한계가 있다. 모짜르트나 아인쉬타인도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서 살지 못했다면 불행하게 살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늘을 날 수 있는 새로 태어났는데 운이 좋지 못해 그 날개가 부러지고 말았다면 그 새만큼 불행한 존재도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서 그걸 다 발휘하는 것같은 사람도 있으며 그렇게 되기까지의 그들의 노력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운의 역할을 부정할 수는 없다. 성공에는 운과 노력 모두가 필요하다. 세상에는 거의 비슷한데 실패한 인간들도 얼마든지 있을 것이다. 물고기로 태어난 존재는 물로 나가야 행복할 수 있다. 그런 걸 포기하고 산다고 행복해 지지 않는다. 

 

욕망이 큰데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는 이해는 하기 쉽지만 피하기가 어렵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그렇다. 사실 부모세대는 자식들에게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려고 하고 더 큰 욕망을 심어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욕망이 있을 때 노력이 있고 성장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까지 어린이 장난감이나 만화책에만 만족하고 산다면 그 아이는 충분히 성장할 수 없을 거라고 믿기에 어른들은 자신의 아이들이 책을 읽게하고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 세계를 여행도 하게 한다. 아이가 야심을 가질 때 기뻐한다. 

 

게다가 요즘에는 어른들이 딱히 그런 걸 하지 않아도 발달된 미디어 때문에 아이들은 전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들으면서 큰다. 내가 어렸던 1980년대에는 자동차를 가진 집이 부자 였다. 그래서 나는 자가용을 가진 사람이 부러웠고 학교에 자가용을 타고 온다는 것은 엄청난 부자나 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빌게이츠나 일론 머스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큰다. 한국의 재벌조차도 시시하게 느껴질 정도의 엄청난 부자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꼭 돈만 이런게 아니다.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요즘 아이들은 너무나 빨리 그리고 너무나 쉽게 엄청나게 넓은 세상의 이야기들을 듣는다. 내가 어릴 때에는 해외의 학술지에 논문을 낸 것만으로 훌룡한 학자로 여겨졌지만 요즘은 노벨상이라도 받아야 그런 사람으로 여겨질 것같다. 미국의 빌보드 차트에 100위안에라도 한국 노래가 들어간다는 것은 믿기 힘든 엄청난 일이었다. 요즘의 젊은이들은 선진국이 된 한국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같은 한국인이지만 후진국에서 태어났던 나로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사치를 하면서 큰다.  하지만 그들이 받는 기대치, 스스로 가지는 기대치의 높이도 한정없이 높다. 월드 베스트가 되어야 한다. 

 

이런 환경에는 적어도 두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욕망이 너무 빨리 부풀어 오른다는 것이다. 그들은 너무 빨리 고급에 익숙해 진다. 그래서 당연한 것의 수준이 아주 높다. 그러니 욕망과 자기 능력간의 간극이 너무 엄청나서 그것의 충족을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은 종종 절대 불가능해 보이게 된다. 예를 들어 요즘 젊은이들이 결혼을 안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 이유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나는 그 중에 한가지 큰 이유는 그들의 눈높이가 스스로의 어린 시절에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기가 자란 것처럼 아이를 키우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하는데 자기는 자기 부모님처럼 아이를 키울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는 도저히 행복할 수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래야 행복할 수 있다고 말이다. 욕망과 자기 능력의 간격이 너무 큰 사람들은 결국 부자 부모님을 만나거나 어떤 대단한 행운의 도움을 받아야 인생이 살만한 것이 된다고 여기게 되기 쉽다. 인생은 한방이니까 도박을 해야 하고 어차피 차분한 노력으로는 욕망의 충족은 절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게 된다. 자기 능력에 맞게 사는 것은 비참하고 찌질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두번째 문제는 이런 환경에서는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현재의 욕망을 충분히 소화하고 그것의 의미를 살필 틈도 없이 자꾸 자꾸 더 큰 욕망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일찌기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인간의 성장에 대해서 3단계 설을 주장했다. 그것은 로맨스의 단계, 세밀화의 단계 그리고 일반화의 단계다. 이 3단계란 인간의 정신은 끊임없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성장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의 단계에 진입하고 그 안에서 성숙하며 거기에 익숙해지고 법칙을 느끼게 되면 즉 그 세계가 충분히 단조롭게 느껴질 단계가 되면 새로운 세계로 비약하게 된다는 것을 말한다.

 

새는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바깥에서 알을 깨서 더 큰 세상으로 내놓는다고 그 세계에서 무조건 잘살게 되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해서 무럭무럭 키워봐야 내실이 없고 세상을 껍데기만 보게 된다.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알에서 어른들에의해 너무 빨리 깨워진 미숙아처럼 보인다. 그들은 마치 제대로 첫사랑도 해보지 못했는데 결혼이나 이혼에 대해서도 자세히 아는 어린이, 10살밖에 안되었는데 80살처럼 인생이 이러니 저러니 하고 말하는 어린이 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들은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즐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맛을 느끼지 못하면서 산해진미를 먹는 사람과도 같다. 나는 입시 준비를 위한 학생들을 위해 매우 긴 소설들을 줄거리만 요약해서 축약본으로 파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 요약은 매우 능력있는 사람이 썼을 수 있다. 그래서 그걸 달달 외우고 어디가서 말하면 그 말들을 부정할 사람이 거의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여행기와 여행이 다르듯이 그게 그 소설을 읽은 체험을 대체할 수는 없다. 

 

이렇게 욕망과 능력의 균형은 어렵다. 타고난 자기와 자기를 둘러싼 환경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고 세상은 젊은이들에게 욕망을 불질러놓고는 그걸 해소할 능력은 알아서 구하라고 할 뿐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균형을 이룰 때만 우리는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성취감을 느끼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기도 쉽다. 그러니 행복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그래도 사람들은 이걸 향해 뛰면서 산다. 이런 걸 생각해 보지 않았더라도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오늘도 무의식적으로 이걸 위해 싸우고 있다. 세상과의 부조화를 해소하려고 싸우고, 왜 존재하는지도 모르는 욕망을 해소하려고 안간힘을 다해 능력치를 키우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누구인가를 살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그냥 세상과 불편한 느낌만을 가지고 그걸 해소하려고 하면 흔히 내가 잘못된 것으로만 여기게 되기 쉽다. 내가 아닌 남이 되려고 하고, 근거도 없는 평균이란 것에 자기를 맞추려고만 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욕망도 직시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으니까, 내가 그걸 원하니까 그게 당연하다고만 여기지 말고 도대체 그게 어디서 온 것인지, 그게 정말로 나를 행복하게 해 줄 것인지를 침착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억짜리 차를 사는게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할부를 갚기 위해 삶이 죽을 만큼 힘들어지는데도 1억짜리 차가 별로 행복을 주는 것도 아니라면 함정에 빠진 것이다. 취직도 결혼도 진학도 아파트를 사는 것도 이럴 수 있다. 직시하지 않은 욕망은 우리를 이런 함정에 쉽게 빠뜨린다. 필요없는 것은 필요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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