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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교권이란 무엇인가?

by 격암(강국진) 2023. 7. 21.

23.7.21

자살한 선생님, 폭행당한 선생님 문제로 안 그래도 시끄러운 세상이 더욱 시끄럽다. 이 사건들로 부각된 문제는 내가 아는 한 이미 20년 정도 이상 전부터 이야기 되던 것이다. 그것은 피상적으로 보았을 때 권위적이고 체벌도 가할 수 있었던 선생님들의 시대가 끝나면서 생겨났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무슨 짓을 해도 그러려니 했던 과거와는 달리 점차로 선생님의 행동은 규칙으로 묶였고 그에 맞춰서 학생들의 행동은 거칠어 졌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도 선생님이 뭘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체벌의 시대로 역행할 수도 없지만 학생들을 교칙에 의거해서 처벌하는 것도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회피되어졌다. 그 한가지 이유는 처벌하면 할 수록 학교의 평가가 나빠진다는 것이겠지만 다른 이유는 선생님의 권위를 인정하던 과거의 학부모들과는 달리 선생님을 뒤흔드는 학부형들, 법과 영향력으로 선생님을 조종하려는 학부형들이 등장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처벌받는 것을 흔히 학적부에 빨간줄이 간다고 말하는데 내 자식의 학적부에 빨간줄 그어놓고 당신이 책임질거야 운운하는 학부형들이 엄청난 압력을 가하고 있는 것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는 저학력의 노인 세대로 그들은 선생님의 권위를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21세기 아이들의 부모, 그 베이비붐 세대는 다르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그들중 몇몇은 학교 선생님을 종종 자기 아래로 본다. 내가 더 잘 안다는 식이다. 

 

학생이 엉망이라서 수업에 방해가 되어도 간섭할 수는 없지만 수업은 잘해야 한다는 모순적인 요구는 결국 흘러 흘러 힘없는 신입교원들에게로 미뤄지고 있다고 들었다. 과거에는 담임선생님이란 경험있는 나이든 선생님이 하시는 것이었지만 요즘은 할 수 있으면 담임은 안하려고 하기 때문에 젊은 선생님들이 담임을 맡고 심지어 임시 교사가 담임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 사건들에 관련된 선생님들이 젊다는 것이 적어도 이런 사정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분석은 매우 피상적 수준에 머물고 있다. 문제의 더 깊은 층위에는 획일적인 교육이면 충분했던 20세기와는 달리 지금은 보다 창의적이고 개성적인 인간을 사회가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이 있다. 20세기의 학교는 단순하게 말하면 수용소고 군대였다. 어떻게 말하면 지적으로는 단순한 시대에 있었던 후진국의 학교였으며 거기를 졸업한 학생들이 하버드나 MIT 학생들과 경쟁할 것이 기대되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가수들이 BTS처럼 빌보드 1등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었듯이 말이다. 

 

그런데 사회가 더 대단한 인재를 요구하면 할 수록 학교는 한계에 처하게 된다. 군대식의 권위적 학교로는 그런 인재를 길러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죽이게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파격을 용서한다고 훌룡한 음악이 되는 것이 아니듯 권위를 무너뜨리면 인재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학교는 예나 지금이나 무법지대고 정글이지만 과거의 정글에는 그래도 권위있는 선생님이 있었다. 그 선생님이 언제나 지혜롭고 공평한 것은 아니라도 그래도 질서의 기반이 될 군대교관같은 사람이 있었던 셈이다. 지금은 그냥 아무도 없어보인다. 성인과 같은 범죄를 저질러도 촉법소년이라 처벌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악용하려는 악당들이 돌아다니는 정글인데 말이다. 그래서 차라리 대학이나 일반인들의 사회가 훨씬 더 안전하다. 조폭이라도 일반시민을 함부로 괴롭히지 않는다. 경찰이 있으니까 말이다. 일진이라고 불리는 불량학생들에게 학교는 그냥 천국이다. 

 

사회는 학교에게 인재를 길러내라고 요구한다. 요구는 쉽다. 하지만 정말 지금의 선생님들이 그걸 해낼 수 있을까? 아니 그걸 해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고 해도 그 사람이 얼마나 되며 지금의 선생님들의 처우에서 그 일을 왜 할까? 그런 대단한 사람은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있지 않을까? 교권이란 낡은 단어다. 그건 지금보다 훨씬 단순한 세상이었던 시절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지식뿐만 아니라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도 가르 칠 수 있다고 믿어졌던 시대의 단어이고 선생님은 노동자이기 이전에 스승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단어다. 노동자라면 커피숍에서 일하다가 고객에게 폭행당하면 고소하면 된다. 그런데 스승은 제자에게 맞아도 고소하면 안된다(라고 보통 말해진다). 군사부일체라는 말처럼 마치 부모같은 존재라고 여겨지는 스승은 아이를 포기하지 말 것을 요구당하기 때문이다. 

 

교권이 낡은 단어라는 것은 초중고는 물론 이미 대학에서 조차 선생님이나 교수가 학생들에게 인생의 의미를 가르치는 전인교육을 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라서 그렇다. 그걸 할 수 없는데 그 단어에 매달리면 모순이 생긴다. 대학교 시간 강사의 처우는 고등학교 선생님보다 못하다. 박사학위를 가진 선생님이 고등학교 선생님보다 못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사는 이유는 교수라는 이름이 가지는 과거의 의미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다. 초중고 선생님들이 노동자로서 감내하기 어려운 일들에 부딪히는 근본적인 이유는 사회가 그걸 강요하기도 하지만 본인들이 스스로 우리는 노동자라는 생각이 없어서다. 그 이상이니까 참아야 한다는 것이다. 교직은 단순히 노동이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누굴 비닌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흑백으로 교직의 숭고함을 부정할 생각도 없다. 나는 다만 지금 학교에 가해지는 압력의 원인은 사회적인 근원을 가지고 있으며 이걸 외면 하면 선생님은 물론 학생들 그리고 한국 사회 모두가 피해를 받을 거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배울 수 없는 것, 가르 칠 수 없는 것을 하라고 강요하고 눌러대면 학생은 그걸 배울 수 있고, 선생님은 그걸 가르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학교를 잘 다니면 인재가 된다라는 이 문장에 대해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지금 마치 조선시대의 서원에게 압력을 가해서 빨리 열심히 더 유학을 공부해서 산업혁명을 일으키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과학을 배울 시간을 없애면서 말이다. 

 

지금의 한국은 40년전의 한국과는 너무 다르다. 하지만 내가 알기로 초중고의 교육내용이나 수준이 40년전과 달라진 것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 지금의 고등학교 수준이나 40년전의 고등학교 수준이나 실질적으로 같다는 것이다. 입시의 중심과목이라는 국영수나 과학과목에서 그때와 본질적으로 얼마나 다른 걸 가르치는가? 지금의 선생님이 40년전의 선생님보다 더 많은 걸 안다고 확신하는가? 세상이 엄청나게 변하는 것을 느끼면서 중학생은 중학생이 공부할 것, 고등학생은 고등학생이 공부할 것을 공부하고 있으면 된다고 누가 말하나. 

 

결국 나는 학교의 짐을 덜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생님도 학부모도 어느 정도 초중고와 대학 교육이 줄 수 있는 것에 대해서 한계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논어 맹자를 열심히 배워서 반도체 개발을 할 수 없다. 지금의 학교는 최신 지식을 가르치는 곳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생의 지혜를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런데도 단지 경쟁때문에 모두의 시간과 에너지를 다 빼앗아 가고 있다. 이게 세상은 산업혁명을 일으키고 있는데 열심히 과거시험공부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사람들은 모두 대학입시에 목을 매는데 그 입시공부라는게 정말 과거시험공부처럼 아무 쓸데도 없는 것은 아닌가? 

 

차를 운전하려면 운전면허가 필요하다. 그러나 누구도 운전명허증 따려고 12년식, 16년식 공부해서 따지 않는다. 세상을 살려면 운전면허증은 필요한 것의 극히 일부이기 때문이다. 초중고 그리고 대학까지 포함해서 그 과정에서 학생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이 정말 뭘까를 생각해 보면 그리고 지금 세상이 필요로 한게 뭔가를 생각해 보면 한국은 지금 거대한 교육 거품속에 있다. 그리고 배울 것이 산처럼 많은 시대에 40년전, 80년전과 비슷한 내용을 반복해서 공부하느라고 밤을 샌다. 

 

나는 여기서 교육을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미래의 방향까지를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내가 뭘 말하건 변화는 힘들고 비판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나는 일찌기 한국 대학의 통폐합을 주장한 적이 있다. 그냥 대학공부 자격시험봐서 통과하면 전국 어디에나 있는 캠퍼스에서 알아서 공부하고 원하면 비디오 수업을 들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졸업시험 통과하면 대학졸업자격증 주는 것이다. 운전면허 시험 자격증처럼 말이다. 그런 졸업장으로 뭘 하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게 문제다. 대학졸업장으로 뭘 하겠다는 고집이 지금 점점 모순을 쌓아올리고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것의 핵심은 개혁의 방향보다 모순이다. 지금의 학교에 사회는 불가능한 요구를 계속하고 있다. 이런 모순을 계속 모른척해서 그것이 점점 더 심각해 지는데도 방관하는 일을 언제까지 할거냐고 묻고 싶다. 한국의 제일 큰 문제라는 출산율도 그 근본은 교육이 힘들고 비싼것에 있다. 초중고에 대학에 취업까지 부모가 따라다닐 생각하면 여유없는 사람들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단한 과정이 가치가 별로 없다. 시대에 엄청 뒤진 조선시대 성리학 공부같은 것이다. 물론 가치가 없다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유학도 지금도 가치가 있다. 다만 유학만 해서는 곤란하다. 마찬가지로 입시공부도 가치가 있다. 다만 요즘 시대에는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불충분하니까 다들 죽도록 고생하는 것이다. 그걸 하고도 모자라서 과외로 온갖것을 준비해야 하니까 바쁘고 힘든 것이다. 그리고 그 바쁘고 힘든 가운데 모순이 어딘가에 모이면 비극이 탄생하는 것이다. 

 

그러니 시간과 돈을 아껴서 각자 자기가 배울 수 있는 것을 다른 곳에서 배우게 해야 한다. 학교와 학교 졸업장의 권위를 깍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새로운 교육기관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바로 지금 사회에서 필요한 것을 가르치는 교육기관일 것이다. 지금처럼 옛날 틀을 고집하는 것은 바보짓이라서 결국 비극은 계속 일어나게 될 것이다. 버티면 버틸 수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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