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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유태인의 교육과 말하기

by 격암(강국진) 2024. 3. 3.

말하기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이 당연한 지적을 말하는 책에 대한 소개를 듣다가 내가 이스라엘에서 살던 시절이 떠올랐다. 나는 1999년에서 2001년까지 이슬라엘의 히브루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데 그때 유태인 학부생이나 대학원생들이 공부하는 방법이라던가, 유태인 학생들이 발표하는 태도같은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 인상의 핵심에는 말하기가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시험기간이면 캠퍼스가 아주 시끄럽다. 그 이유는 학생들이 모여서 서로 질문하고 떠들면서 공부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국 학생과는 크게 차이가 나는 점이었는데 한국학생들은 대개 시험기간이면 교과서를 외우거나 문제푸는 법을 혼자 연습하느라 시끄러운 것을 싫어한다. 하지만 유태인 학생들은 말한다. 도대체 혼자 어떻게 공부하냐고 말이다. 그러니까 유태인에게 있어서는 공부란 두 사람 이상의 사람들이 서로 서로 떠들면서 하는 것이었다. 이건 한국인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태도다. 한국인들은 종종 대화란 시간낭비라고 여기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나는 유태인의 성공비결중의 하나가 바로 이 대화에 대한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면 우리는 대화를 한다. 그러니까 말을 잘하는 사람,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은 경쟁력이 높다. 이는 한국의 학교에서는 거의 완전히 무시되는 부분이다. 한국 학교도 경쟁으로 가득하지만 그 경쟁이란 건 선생님이나 교과서가 말하는 것을 누가 더 완벽하고 빠르게 재생산하는가에 대한 것이고, 학생들이 토론을 벌여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고 주도권을 가지고 오는 것이 아니다. 한국은 말하기에 대해 적대적이기까지 하다. 한국에서는 '말만 잘한다' 라고 다른 사람을 비꼬면서 입닥치고 그저 몸이나 열심히 움직이거나 남이 주는 명령을 열심히 수행하라는 태도가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국식 교육은 학교 바깥에서는 문제가 있다. 말하기를 강조하는 유태인 교육이 책임자나 사장을 길러내는 것이라면 매뉴얼을 열심히 외우는 것에 몰두하는 한국 교육은 공장 직원을 길러내는 것에 가깝다. 물론 어떤 사람이 어떤 집단안에서 가지는 영향력의 크기는 여러가지에 달려 있다. 단순히 말솜씨가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변호사와 요리사와 택시 운전사가 만나서 이야기를 한다고 할 때 그 주제가 법률적인 것이라면 모두 변호사에게 귀를 기울일 것이고 그 주제가 길찾기에 대한 것이라면 택시 운전사에게 모두 귀를 기울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건 학교안의 상황과 비슷하다. 그리고 학교 바깥의 현실적인 상황은 이런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학교안에서의 상황은 대개 정답은 정해져 있고, 누군가가 그것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문제이며, 답은 그저 옳다 그르다로 양분된다. 그런데 학교 바깥에서는 문제들이 이렇게 정확히 정의되고, 그 답도 정확히 존재하는 경우가 별로 없다. 친구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고 하자. 그런데 언제 어디서 만나야 할까? 만약 이번 주말에 만나기로 했으며 요리는 회를 먹기로 했다면 질문은 좋은 횟집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시간도 메뉴도 절대 그런 것이어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좁은 영역에서 답을 구하는 것은 보다 큰 영역에서 질문이 설정되는 것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지도자나 사장같은 사람이 큰 틀의 주제를 잡고 나면 그 다음에 작은 질문에 유능한 사람은 남의 잡일이나 하게 되기 쉬우며 지나고 보면 별로 하는 일도 없는 것같은 사람이 이것저것 정하고 여기 저기를 연결시켜서 마치 사장처럼 다른 사람에게 일을 시키고 끝에 가서는 제일 큰 감사를 받게 된다. 이런 과정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이 비슷한 일들이 현실 사회에서는 날마다 일어나고 이런 상황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말하기라는 것을 알게 된다. 뒤에서도 말하겠지만 말하기와 사고는 깊이 연관이 있다. 학교공부만 열심히 할 뿐 사적인 대화는 거의 못하는 사람은 종종 학교 바깥에서는 바보취급을 받으면서 남에게 이용만 당한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한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의 교육이 말하기를 무시한 것 때문에 더욱 이렇게 된다는 것이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말을 잘 하는 것과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말하기란 정보를 처리하고 소통하는 기술이며 나는 이것이 가장 원초적인 지능을 결정한다고 믿는다. 즉 인류의 지능은 결국 말하기를 통해서 발달했다는 것이다. 말을 잘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을 속이는 기술정도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말하기에 대한 한국인들의 태도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다. 

 

말은 혼자서도 할 수 있다. 즉 혼자서도 자기 자신에게 말을 하면서 생각을 정리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종종 생각을 정리할 때면 스스로에게 목소리를 내서 말을 한다. 물론 우리는 자주 생각을 입바깥으로 내뱉지 않으면서도 하기  때문에 말이 없이도 생각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머릿속의 생각은 말을 하거나 글을 쓸 때 훨씬 더 명확해 진다. 자기가 말을 하고 자기가 들으면서 자신의 말에 대해서 다음 말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하기란 반드시 내가 이미 아는 것을 표현하는 행위가 아니다. 말하기나 글쓰기라는 것은 결론을 모를 때도 할 수 있다.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이 문제에 대해서 교수가 설명한 말의 핵심은 뭘까라고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의 답을 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말하기이다. 그리고 말을 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명확히 몰랐던 것들을 짜맞추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은 글쓰기로도 할 수 있지만 글은 혼자서 쓰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여러명이서 할 수 있는 말하기라는 기술은 말하자면 집단지능을 발현시키는 기술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렇게 볼 때 말을 잘한다는 것은 그 집단의 지능을 최대한으로 이끌어 낼 수 있는 기술이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그 집단의 집단적 선택을 주도하는 능력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어떤 집단안에서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 즉 대화의 문화는 그 집단의 집단적 지능을 결정하게 된다. 바보같은 말하기 문화를 가진 집단은 작은 문제를 크게 키워서 결론을 엉망으로 만들고 문제의 핵심을 말하는 사람을 억압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말을 못하는 사람은 과연 남의 명령이나 듣는 노동자일 뿐 지도자나 사장같이 어떤 집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사람이 대단한 일을 하는 것은 결국 사람들이 집단으로 모여서 일을 분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컴퓨터도 전기가 없으면 돌아가지 않는 것처럼 혼자서 대단한 사람도 정말 혼자서만 일하는 사람이라면 사소한 필요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의존해서 결국 다른 사람의 명령대로 움직이는 컴퓨터처럼 될 수 있다. 

 

그러니까 공부를 어떻게 혼자서 할 수있냐고 말하는 유태인들의 태도는 한국인들이 보고 배워야 할 부분이 아주 많은 것이다. 또한 말하기를 단순히 이미 머리속에 있는 답을 소리내어 전달하는 것으로만 여기거나 심지어 다른 사람들을 혼란에 빠트리는 속임수 정도로 여기는 태도가 아주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말하기를 그런 식으로 여기는 것은 한마디로 반이성적이다. 왜냐면 생각이 머릿속에 존재하는데 그걸로 말만 하는게 아니라 말하기가 곧 생각하기의 중요한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글을 억압하고 말을 억압하는 것은 생각 자체를 억압하는 것이다. 뭐든지 말하고 쓰면서 우리는 생각을 하는 것이다. 말도 글도 없을 때에는 실질적으로 생각도 없다. 

 

한국인은 똑똑하다. 한국인들 중에 특히 어린애들에게서 나는 말을 잘하는 아이들을 종종 본다. 그 아이들은 뛰어난 지능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국의 학교에서 강조하는 지능은 그 아이들의 지능과 충돌한다. 우리는 아이들을 침묵시키고 질문하지 말고 외우라고 많이 말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선택하고 똑같이 생각해야 좋은 거라고 여기는 일이 종종 있다. 

 

지능은 단순히 말하기로만 만들어 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글쓰기도 있고, 한국에서 그토록 강조하는 지식의 습득도 매우 중요하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으면 지능은 AI를 어떻게 활용하는가에 따라서도 크게 달라질 것이다. 우리는 지능을 0에서 100이나 200까지 증가하는 1차원적인 양이라고 여기기보다는 우리에게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 여러가지 방식들으로 여길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높은 지능을 위해서 우리는 여러가지 수단, 여러가지 기술을 습득해야 한다. 하나의 패러다임, 하나의 수단에만 매몰되어서 다른 수단들을 적대시 하는 수준에 이르르면 우리는 공부를 해서 더 똑똑해지는 것이 아니라 더 멍청이가 될 수 있다. 유태인을 볼 때 한국 교육은 크게 다른 길을 가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반성해야 할 점은 없는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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