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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교육에 대하여

우리가 아이들에게 잘못 가르치고 있는 한가지

by 격암(강국진) 2018. 11. 30.

교육에 있어서는 중요하지만 잘못되기 쉬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은 안다고 해도 피하기가 어려운데 특히 오늘날의 한국교육의 현실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을 짧게 쓴다면 이렇게 된다.


현실적인 인생의 문제는 대개 규칙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라 최적화의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 없다. 우리는 거의 항상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뭔가를 포기해야만 한다. 좋은 성적을 얻기 위해서는 노는 즐거움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만큼은 한국에서 매우 강조되고 있는 말이지만 우리가 타협하고 조정해야 하는 것은 그런 것에 멈추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학생은 지각을 하면 좋지 않다. 하지만 학교에 오는 길에 누군가가 길에 쓰러져 있었다고 해보자. 그 사람은 사실 내버려둬도 아무렇지도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걸 확인하고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고 하다보면 그걸 발견한 학생은 지각을 하게 될지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독자들은 지각이 나쁜 것이기는 하지만 사람의 생명이 달린 것이니 지각을 하더라도 사람을 구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이런 판단이 바로 최적화의 예이며 다른 말로 하자면 윤리적 갈등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더 중요한 것을 하기 위해서 다른 것을 희생한다. 윤리적 문제가 단순히 옳은 일을 하라 같은 것이면 우리는 그것을 갈등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윤리적 갈등의 문제는 서로 충돌하는 두개의 규칙들속에서 나온다. 




그런데 여기에는 미묘하지만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위의 상황을 최적화의 문제가 아니라 규칙을 지키는 문제로 바꿀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다음을 규칙으로 하면 된다.


등교길에 길에 쓰러진 사람을 보게 되면 지각을 하더라도 그 사람을 구하라.


이러한 새로운 규칙의 도입으로 우리는 더이상 규칙의 충돌문제를 겪지 않게 된다. 지각을 하면 안된다는 규칙, 쓰러진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규칙만 있을 때는 두 개의 규칙이 충돌했는데 제 3의 규칙이 등장해서 그 두 규칙이 충돌하면 사람을 구하는 일을 우선하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새로운 규칙의 도입은 따라서 최적화의 문제를 규칙을 지키는 문제로 다시 만들고 있다고 할 수 있으며 이 예에서 보듯이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얼핏 겉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잘 구분할 수 없다. 이건 그 상황이나 그에 대한 대처의 문제가 아니라 그 상황에 직면한 사람의 내적인 상태의 문제다. 그 사람이 완전히 새로운 상황을 만나고 그에 직면하여 최적화의 판단을 하면서 결정을 내리고 있다면 최적화의 문제로 그 상황을 본 것이고 반면에 내부적으로 그런 상황에서는 이러저러하게 행동하기로 한 규칙을 따른 것이라면 규칙을 따르는 문제로 그 상황을 본 것이다.


이게 바로 우리가 교육을 실패하는 이유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모든 문제를 규칙을 따르는 것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 아이들은 미리 말해주지 않은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는 것은 매우 어렵거나 혹은 불가능하다고 느끼므로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메뉴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른들은 어른들대로 잔소리하기를 좋아해서 혹은 아이들을 걱정하는 마음에서 온갖 가능한 모든 상황에 대해서 규칙을 만들고 그걸 미리 말해주고 싶어 한다. 


그런데 현실적인 상황은 절대로 규칙을 따르기만 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언제나 우리는 규칙에 없는 상황과 부딪히게 된다. 사실 내가 말하고 있는 최적화의 상황이나 윤리적 갈등의 상황에는 대개는 정답이 없다. 도시에서 살면서 공부하고 싶어서 A대학으로 가고 싶지만 사실은 내가 배우고 싶은 교수님은 B대학에 있다고 하자. 여기서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해 절대적인 정답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규칙이 있기 힘들다. 그러니까 우리가 '현실적인' 세계에 산다면 우리는 최적화를 하는 방법을 저절로 배우게 된다. 말하자면 호랑이를 피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적 세계라면 결국 호랑이를 종종 만나가면서 호랑이를 대처하는 법을 배우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사회에서 우리들이 하고 있는 짓들은 불행히도 매우 매우 비현실적인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다. 그 비현실적인 공간의 이름은 가정일 수도 있고 학교일 수도 있으며 학원일 수도 있다. 그 공간은 매우 엄격히 통제된 공간이다. 그리고 그 공간안에서는 모든 것이 규칙에 따라 이뤄진다. 예를 들어 그 공간에는 이런 규칙도 있다. 


모르겠으면 엄마에게 물어볼 것.


즉 항상 규칙을 따라야 하고 규칙에 없는 모든 상황은 엄마에게 물어라라는 규칙까지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부모나 선생님들은 그 제한된 공간안에서 자꾸 규칙을 추가해서 아이들이 외우고 따라야 하는 규칙은 점점 늘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규칙에 없는 상황이란 발생하지 않는다. 아이는 이 비현실적인 공간안에서 인생의 문제들은 규칙을 따르는 것에 대한 것이라고 배우게 된다. 어딘가에 가게되면 먼저 규칙을 알아내고 그것을 잘 지켜야 한다. 그 중의 하나라도 어기는 것은 큰 처벌을 받게 되는 아주 나쁜 짓이다. 이렇게 큰 아이는 규칙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면 단순히 잘못된 선택을 하는게 아니다. 아예 어느 쪽도 선택하지 못하고 무작정 고장난 로보트처럼 서있거나 말도 안되는 행동을 한다. 규칙이 없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교육의 또 한가지 문제는 경중의 구분능력이 없으므로 살인죄와 소매치기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그저 단순하게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다라는 흑백논리에 의존하기를 좋아하게 된다. 엉성한 몇개의 규칙만 외우고 그것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데 규칙에서 벗어나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기 때문에 경범죄와 패륜적 범죄도 구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들키면 엄마에게 혼나기는 매한가지였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학교나 가정을 3-40년전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나는 그 비현실성이 오히려 크게 증가했다고 느낀다. 어른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여러가지 지식을 기반으로 더 좋은 교육을 하기 위해서 학교나 가정을 더 비현실적인 곳으로 만들었다. 이제 세상에는 더 많은 규칙이 있어서 아이들이 방과후에 길거리로 나가서 자기가 놀고 싶은 아이와 놀고 문제가 생기면 되도록 자기들끼리 해결하는 그런 과거와는 다르다. 학생이나 아이들의 문제는 금새 법이나 어른들의 문제가 된다.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상당부분이 현대사회의 다양성이 전과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집성촌의 예를 자주 드는 편인데 온 마을 사람이 다 친인척인 집성촌에서는 부모는 아이들이 마을 안에 있는 한 별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온갖 종류의 이방인들이 모여사는 현대도시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어른들은 청소년이 청소년을 협박해서 매매춘을 시킨다는 뉴스를 들으면 화들짝 놀라서는 아이들이 따라야 할 규칙을 또 하나 추가하게 된다. 즉 사회의 다양성과 복잡성이 증가하니까 아이들을 보호한다는 이유로 우리는 더 '호랑이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비현실적 공간을 만들게 되는 것이다. 


고백하자면 나는 외국의 여러나라들을 돌아다니며 살았고 그러면서 아이들을 키웠는데 그러다보니 나도 이런 문제를 피할 수가 없었다. 주변이 모두 이방인이고 나도 주변이 어떤지 잘모르는 타지에서는 아이들을 마구 풀어 키우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은 인생이 규칙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아이들을 많이 만들게 된다. 문제는 이런 아이들도 결국 사회로 나가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결국은 부모의 가정에서 나가고 학교에서 나가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을 잘 키우기 위해 엄청 애를 썼던 그 가정과 학교는 이제 치명적인 문제를 노출한다. 아이들이 현실사회를 견디기가 어렵다. 대학생이고 심지어 직장인인데도 초등학생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요즘 흔하다. 


대학교수에게 대학생의 부모가 전화를 걸어서 자식의 성적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경우도 있다. 나아가 심지어 직장상사에게 부하직원의 부모가 연락하는 상황도 세상에는 있다고 한다. 캥거루족이라고 해서 어른이 되었는데도 부모를 떠나지 않는 사람들도 있는 모양이다. 


통상 대학생 이상의 나이를 가진 사람은 성인으로 여기는 사회적 관행으로 생각하면 이것은 나이는 되었지만 어른이 되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어른이 되지 못했다는 것은 바로 그들은 규칙을 따르는 일밖에는 배우지 못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어릴 때 규칙을 어기면 지각을 하거나 무릎이 까지거나 하는 것인데 이미 어른이 된 그들이 규칙을 어기면 일이 너무 엄청날 수 있다. 그러니까 늦게 최적화의 방식으로 인생에 접근하는 것을 배우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물이 위험하다고 개울에도 못들어가게 하다가 어느날 처음부터 수심이 수십미터는 되고 격류가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가라고 하는거나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의 자연스런 반응은 낯설지 않고 규칙이 통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세상에 결사적으로 붙어 있으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대를 역행하는 행위다. 오늘날의 시대가 공무원의 시대고 보수적 삶의 시대던가? 오늘날은 진보적 창의성을 갖춘 창업자의 시대가 아니던가? 규칙이 통하는 시스템은 인공지능이 발달하면서 점점 더 기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곳이다. 평생직장의 시대는 이미 끝났다. 규칙이 통하는 시스템에만 매달리면 그 시스템이 붕괴할 때 같이 죽을 수 있다. 


때로는 최고의 교육을 시키고 아이들을 최고로 위하는 마음이 아이들을 망치기도 한다. 오늘날의 교육현장을 보면 그 생각이 많이 난다. 엄청복잡하고 엄청 규칙이 많고 아이들은 자율을 배울 공간이 없다. 항상 어른의 감시아래에 있다. 엄청 많은 투자가 이뤄지지만 거기서 키워지는 아이들은  그저 타이틀만 있을 뿐 자기 생각은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되기 쉬워 보인다. 우리는 뭔가 중요한 것을 언젠가 부터 완전히 잊어버렸다. 그에 대한 고민은 아마도 우리가 어떤 공간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가에 대한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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