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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육의 본질적 문제

by 격암(강국진) 2019. 7. 29.

한국 교육에 대한 논의의 대부분은 본질적으로 중요한 문제는 피하면서 대증적인 처방에만 집중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자사고가 있어야 하는가 아닌가라던가 대학입시 개선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야간 자율학습을 허용해야 하는가 같은 문제는 사람들이 많은 관심을 가지는 문제지만 그것들은 근원적이지 않다. 물론 현실에 대한 대증적 대처도 필요하겠지만 이런 대증적 처방은 애초에 정답이 없다. 야간자율학습을 해도 교육은 망쳐질 수 있고 야간 자율학습을 안해도 교육은 망쳐질 수 있다.  자사고가 없어도 있어도 교육은 좋을 수도 엉망일 수도 있다. 교육은 부품들의 조합처럼 분석적으로 이해 할 수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교육의 현실을 보다 넓고 전일한 시야로 조망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 교육의 발목을 잡고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학교와 사회의 분리를 계속 유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다시 말하면 이렇게 된다.   


한국교육은 우리를 둘러싼 한국 사회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가상공간에서 일어나고 있으며 그 교육의 목적도 학생을 어딘가 여기의 현실이 아닌 어떤 다른 곳으로 보내는 것에 있다.


우리는 교육을 종종 계몽주의적으로 이해한다. 다시 말해 학교는 학생이 모르는 어떤 미지의 세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며 학생은 그 지식을 배움으로써 그 새로운 세계로 옮겨 갈 수 있게 되거나 그런 세계를 한국에 만들어 내게 된다는 것이다.


아주 좋은 예가 바로 후진국에 선진국의 학문을 소개하는 사람들이 세우는 학교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현실에 존재하는 이상향을 알고 있다. 바로 선진국이다. 그러니까 후진국사람들에게 이런 저런 선진국의 시스템을 설명해서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만드는 것을 교육이라고 부르게 된다. 


이런 경우 교육의 공간이 가상공간이 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왜냐면 학교는 결국 학교 담장밖에 있는 현실 세계에 대한 것이 아니고 그것과는 거리가 먼 어떤 이상향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에 갈 아이들을 한국에서 키우는 학교는 세종이나 서울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아이들에게 조지 워싱턴이나 뉴욕에 대한 것을 가르친다. 후진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어야 할 학생들은 불완전한 현실에 대해 배우기 보다는 그들이 지향해야 할 선진국에 대해서 배운다. 따지고 보면 학교 담장바깥에 있는 현실 세계는 앞으로 사라져야 할 세상이며 일단 극복되고나면 별로 기억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계몽주의적 교육에 대한 인식에 너무나 익숙한 나머지 학교는 원래 이렇게 학생들에게 비전과 미래를 제시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후진국에서나 합리화될 수 있거나 가능한 것이다. 어떤 사회가 선진국의 수준에 도달하고 세상에 지식이 넘쳐나면 누구도 그 사회가 혹은 개개인이 뭘 지향해야 할지에 대해서 정답을 알지 못하게 된다. 정답이 없을 때 학교가 가르치는 지식은 점차로 공허해 진다. 가르치는 사람도 자기가 뭘 가르치는지 잘 모르게 되고 배우는 사람은 바깥 세상은 이런 가르침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가르침에 진정한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다. 그저 평가나 잘받고 졸업장이나 따면 그만이지 학교내부의 가르침은 어차피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이나 아무도 안믿는 어떤 것이 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은 문맹이 넘쳐나고 학교가 국민을 계몽해야 하는 곳이 아니다. 선생님들도 미래와 답을 모른다. 우리는 더이상 일본이나 미국이나 프랑스나 독일을 말하면서 우리도 저런 나라처럼 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라서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선진국들은 어떤 면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모든 나라는 다 나름의 문제가 있고 나름의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 대단한 나라들도 그 나라의 문제만 모아서 들으면 모두 아주 심각한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교육제도를 본뜬다던가 핀란드의 회사문화를 본뜬다고 하는 일이 반드시 한국에서도 성공하리라는 보장은 없는 것이다. 계몽의 시대, 팔로워의 시대는 끝났다. 우리는 여전히 남들의 상황을 참조해야 하지만 기본적으로 우리는 이제 우리 눈으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우리의 의지와 선택대로 한발한발 사회를 전진시켜 나갈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시대에 학교는 어딘가에 있는 가상의 이상향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로 학교를 둘러싼 현실 사회에 대한 것이 되어야 한다. 학교가 계몽적 망상에 빠져서 바깥과는 전혀 다른 가상공간이 되고 그러인해 학생들이 사회에 적응하는 것을 오히려 막아서는 곤란하다. 학생들은 학교를 졸업하기를 전에도 산학협동이나 지역사회와의 교류를 통해 그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의 현실을 느끼고 그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빨리 찾아야 한다. 


한국에 우주선이 없는데 우주선조종사가되는 교육을 한다던가, 신경과학과도 없는 것이 한국의 현실인데 아이들에게 뇌과학자의 꿈을 꾸게하는 것이 반드시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니다. 전주에 태어난 학생은 반드시 전주에서 평생 살아야 하고, 한국의 학생은 한국에서 직장을 잡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먼저 주변을 둘러보고 주변에 적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무조건 어딘가 먼 곳으로 비약하려고 하는 것은 위험하다. 우리는 먼저 주변 사회의 요구에 대해 알아야 한다. 사회와 학교가 단절되어서 사회의 요구와는 상관없는 공부로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는 상황은 피해야 한다. 


우리는 21세기에도 아주 깊게 학교는 분명한 답이 있는 문제만을 다뤄야 한다는 편견에 빠져 있다. 많은 사람들은 학교는 학생들을 혼란에 빠뜨려서는 안되고 선생님은 학생에게 자신이 답을 모르는 질문을 가르치기 보다는 정답이 알려진 질문의 답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다뤄야 하는 것을 다루지 않고 혹은 정답이 아닌 것을 확실한 정답처럼 가르치려고 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래서 우리는 학생의 질문을 거부하고 학생들을 오히려 더욱 바보로 만든다. 그런 질문은 아직 너무 이르며 나중에 자격이 생기면 그때 던지라는 것이다.   


학교가 정답에 관한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학생과 기성세대의 문제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즉 기성세대가 혹은 사회가 여러 패거리로 나뉘어 싸우고 다투는 문제가 학생들에게 비밀로 여겨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그런 질문들은 경제적 지적 기회를 사람들에게 제공한다. 지금의 사회가 바로 그 문제를 가지고 싸우고 있다는 것은 그 문제가 바로 지금 풀어야 할 문제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 답이 명백한 질문의 답은 꼭 서둘러 알지 않아도 좋다. 왜냐면 필요할 때 찾아보면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아무도 답을 모르는 질문은 사실 어떤 사람이 아무리 고민하고 풀어도 전혀 진전을 보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반면에 토론이 뜨거운 질문, 아직 정답은 없지만 이런 저런 주장들이 있는 경우야 말로 그것은 새로운 세대가 뛰어들어야 할 기회를 가진 경우가 된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렇게 말한다. 학교는 사상과 철학과 논리를 가르쳐야 하지만 그것은 불온한 것이 되어서는 안되고 지금 세상에서 논쟁되는 것에 대한 것이 되면 안된다고. 학생들은 사회의 현실에서 눈을 돌리고 논쟁이 심한 분야는 피해서 깨끗한 답이 써있는 교과서에만 눈을 고정시켜야 한다고. 


물론 현실적으로 학교와 사회의 구분에 대해서 흑백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은 정도의 문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유치원생에게 여전히 산타와 요정에 대해 말할지 모른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대해 어른들도 안믿는 신화를 아이들에게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할런지도 모른다. 그들은 현실을 현실 그대로 보기에는 너무 준비가 안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까지 학생들을 현실로부터 격리시켜야 할까? 어느 수준까지 그렇게 해야 할까? 내가 말하는 것은 한국 사회가 학생들을 현실로부터 격리시키는 정도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21세기와 어울리지 않는다. 이미 선진국이 된 한국의 교육도 될 수가 없다. 이 문제는 학생들을 더 무능하게 만들고 무엇보다 그들의 창의력과 주체성을 뺏았는다.  


한국에서 사회와 학생들을 단절시키고 있는 것은 권위적 문화고 보수적 시스템이며 나는 정답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기성세대이고 부패한 정치다. 여전히 아주 많은 한국 사람들은 자신이 정답을 알고 있어서 학생들을 계몽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르치고 유도하겠다는 것이다. 그런 관점속에서 학생들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장래를 선택해 가는 사람들이 아니다. 


한국에 자동차 관련 기술자가 부족하면 공무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자동차 관련 학과의 정원을 늘리고 고등학생들에게 홍보를 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쪽 전공을 가지도록 유도하려고 한다. 이것은 한국에서 너무 흔한 일이기때문에 자연스럽게 보이지만 이런 태도는 일단 학생들을 무슨 철이나 석탄같은 자원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즉 공장에 재료가 부족하면 자원을 투자한다는 식이다. 철이나 석탄은 사고를 하지 않는다. 홍보라고 하지만 기성세대는 대놓고 일종의 사기를 치려고 한다. 좋은 이야기만 늘어놓거나 아예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그리로 이끌려고한다. 이런식으로 사고하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이유는 어린 학생들은 답을 모르고 자신은 답을 아니까 혹은 이것은 국가를 위해서 하는 일이니까라고 자신에게 변명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들은 점점 사회로부터 격리된다. 교과서 안의 세계는 현실과 너무 다르다. 세상 경험을 한 기성세대는 어느 정도 진실을 알지만 고의적으로 위선적 태도를 유지한다. 어린 세대가, 신입사원이 너무 많이 알면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국민에 의해서 당선된 정치인들도 이런 상황을 종종 유지시키려고 한다. 그것이 자본을 가진 세력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기성세대가 교육을 한다고 말하면서 그들은 실은 산타이야기같은 신화만 잔뜩 말해주는 것이다. 


교육에 대해 이야기하는 순간 사상이나 정치로부터 거리를 두어야 하며 그런 것을 언급하는 사람들은 교육에 대해 이야기할 자격이 없다는 식의 금기가 한국에는 있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금기를 만날 때마다 우리는 우리가 바로 학생들을 가상공간안에 가두는 벽을 만나고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현실과 학교교육을 분리하는 이 벽은 정치적 사상적 중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사상적 편협을 위한 것이며 두가지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하나는 현실에서는 살 수 없는 비창의적이고 순종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특히 학교생활이 길어질 수록, 그리고 그 학교 시스템안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우등생이었을 수록 더 그렇게 된다. 이때문에 불행하게도 한국에서 엘리트라고 여겨지는 학생들은 이때문에 결함을 가진 것으로 검증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또다른 파괴적 결과는 현실과 학교에서의 가르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눈치채고 모든 상식을 무시하는 반사회적인 인간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어차피 모든 가르침이 위선인데 왜 사회적 미덕을 실천해야 하는가. 폭력은 좋은 것이고, 욕망은 무제한적으로 추구되어야 하며 그렇지 않는 것은 위선이 아닌가? 


이 두개의 파괴적 결과는 심지어 한 인간에게서 동시에 일어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명문대를 졸업한 엘리트이면서 동시에 성격파탄자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양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세상을 보면 그런 사람을 쉽게 보지 않는가?


이 격리의 문제를 외면한 채 대학입시 출제경향을 따지고, 야간 자율학습이 있어야 하는가 없어야 하는가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성세대가 학생들이 진짜로 성장하기를 바란다면 가장 먼저 해야 하는 일은 그들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답을 주려고하지말고 어른들의 질문을 공유하는 것이다. 권위주의의 벽뒤에 숨어서 완벽하고 전능한 인간인척 하지 말고 기성세대의 고민을 나누는 것이다. 질문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성장할 것이다. 아니면 적어도 현실에 적응할 준비를 좀더 잘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이런 해방이 없다면 학생들을 돕겠다는 뜻이 아무리 확고하다고 해도 그 결과는 그다지 좋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21세기를 살고 있으며 제 아무리 선의를 가졌다고 해도 그런 교육은 결국 현실과는 다른 감옥공간을 만들려는 노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들중의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백년이나 이백년은 뒤진 낡은 국민계몽운동같은 것을 교육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한국의 교육현장에서 모순은 계속 누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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