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한국병에 진단과 처방이 없는 게 아니었다.

by 격암(강국진) 2024. 2. 12.

지금 한국이 가진 문제중 가장 많이 거론되는 것들 중의 두 가지는 낮은 출산률과 높은 부동산 가격이다. 그런데 이걸 생각하면 이게 단순히 문제라고 불릴 일인지 알 수 없는 면이 있다. 차라리 그건 우리의 선택이라고 불려야 하는 면이 있다는 생각때문이다. 중국집에 들어가서 짜장면을 주문하고 짜장면이 나왔는데 짜장면이 나온건 문제라고 하는 건 옳지 않지 않은가? 그건 그냥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아닐까? 

 

낮은 출산률과 높은 부동산 가격과 관련해서는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이고 상징적인 선택이 있다. 그 선택이란 바로 노무현 정권 시절에 있었던 세종시로의 수도이전이었다. 그 수도 이전은 결국 경국대전 운운하는 말도 안되는 위헌 판정으로 좌절되었다. 그리고 그 일은 그대로 넘어갔다. 그런 일을 주도했던 사람들이 정치적으로 처벌받고 다시 역사를 되돌리는 일도 없었다. 그일은 그러니까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지고 받아들여진 일이 되었다. 

 

그런데 20여년전에는 왜 수도이전을 고려했을까? 왜냐면 대한민국에 있어서 수도집중현상은 이미 박정희 시절부터 거론되었던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노무현 정권 시절에 이미 전국토의 고른 성장이 있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에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거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이는 바보가 아니라면 알 수 있다. 전 세계 어디를 봐도 경제 교육 정치의 중심이 전부 하나인 나라가 없다. 심지어 일본같은 나라도 1,2위를 다투는 대학이 교토대학이고 지방 국립 대학의 위세가 여전히 높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눈을 돌리면 미국의 수도가 뉴욕도 아니고 교육의 중심이 뉴욕도 아니며 영국의 옥스포트나 캠브리지가 런던에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세종시로의 수도이전을 경국대전 운운하면서 막았던 희대의 엉터리 사건이 일어난 20년 뒤를 살고 있다. 그때는 지금 보다는 그래도 출산률이 높았고 지방에 있어도 국립대는 인정받아서 지잡대라는 말도 없었으며 인구 고령화도 훨씬 덜했다. 나는 세종시로의 수도이전이 한국의 모든 문제를 해결했을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 상징성은 크다고 본다. 그런 식의 좌절은 지방 균형 발전이라는 목표는 적어도 대한민국 국민의 다수가 원하는 일이 아니라는 사회적 판단으로 받아들여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지방 균형 발전이 절박한 일이며 그를 위해서는 어떤 대담한 조치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사회적으로 크게 합의가 일어난 적이 없다. 그냥 야금 야금 세금만 이리저리 소모되고 있었을 뿐이고 그러는 가운데 중앙 집중은 더 강하게 이뤄지고 출산율은 더 떨어졌을 뿐이다.

 

한국의 수도권 집중은 심각한 걸 넘어 엽기적이다. 한국의 평균 출산률이 말도 안되게 낮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겨우 평균을 보고 놀라는 것이다. 노인인구가 높은 지방만의 출산율을 따지면 그 결과가 어떨까? 군단위의 지역에서 한해에 한두명의 아이가 태어나는 경우도 있다. 지금 지방은 빠르게 소멸하고 있다. 나는 일전에 한 발전소 전문가가 한국의 수도권 집중은 너무 심각해서 물리적 한계에 도달했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발전소에서는 고압선으로 전기를 보내는데 이 고압선은 서로 가까우면 안되기 때문에 전기를 수도권에 보내는 것이 이미 한계 상황이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우리는 수도권 교통체증을 해결하고 그래서 강남을 더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려고만 한다. 수도권에 공연장이나 리조트를 더 많이 짓고 싶고, 물론 더 많은 아파트와 고층빌딩을 짓고 싶어한다. 전기공급을 무시하고 이런 일을 추진하면 물론 폐허가 되어 중단된 공사판만을 만들 것이다. 안되면 서울 한가운데에 원전이라도 지을 것인가? 

 

낮은 출산률과 부동산 투기는 지방균형발전과 왜 직접적 관계를 가질까. 그 이유는 직관적으로 당연하지만 내가 여기서 거론하고 싶은 한가지 이유를 포함한다. 그것은 지방 착취가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닌 참혹한 모델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낮은 출산률과 부동산 투기는 그 부작용이다. 한국에서는 고향에서 태어나서 고향에서 산다는 개념이 수도권 사람이 아니면 없다. 사실상 모든 젊은 사람들은 어쩔 수 없어서 소수가 지방에 남을 뿐 모두가 수도권으로 가서 산다. 그래서 나는 종종 지금의 한국을 수도권이 자신의 번영을 위해 지방을 식민지로 착취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방의 정치인은 말하자면 식민지 총독 비슷한 존재다. 수도권이 지방의 인력을 착취하고 수도권의 자금이 지방을 경제적으로 착취한다. 마치 일제 강점기때 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 땅을 다 차지하던 과거가 연상된다. 그 일이 20년전에 좀 멈췄으면 좋았을텐데 이런 착취가 계속되니 이제 지방이 소멸하고 더 착취할 인력도 없다. 이렇다면 식민지 착취로 번영하던 수도권은 계속 번영할 수 있을까? 이게 지속가능한 성장모델인가? 이런데 지방이 착취된 식민지가 아닌가?

 

전국민을 대상으로 인구분포를 보고 젊은이가 중장년세대보다 작다고 하는 것은 진실의 절반이다. 나머지 절반은 지방의 젊은이들을 수도권이 그야말로 엽기적으로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대충 전국평균낸 그래프가 보여주는것보다 훨씬 더 말이다. 자기 고향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거기서 늙는다는 것은 생활에 있어서 아주 많은 문제를 해결해 준다. 이는 지방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수도권에 가서 경제적으로 착취당하는 외국인 노동자처럼 쓰지 않아도 될 비용을 쓰고 불편함을 참으면서 살지 않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왜 어쩔 수 없었는가? 왜냐면 자기 고향에서는 일자리가 없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누가 이걸 유지하고 있는가? 집단적으로 말하면 한국인이다. 경국대전 재판은 상징적이었다. 그런 말도 안되는 재판에도 나라가 뒤집어 지지 않고 사회가 그걸 받아들였다는 것은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도권과 지방의 구도에 대해서 혁명적이라고 할 조치는 없었다는 것은 결국 한국인이 수도권이 지방을 착취하는 구도를 계속하기로 판단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런데도 지방이 죽는 것이 문제인가? 그건 그냥 우리의 선택이 아닌가. 지방을 부동산 가격 지킨다고 죽이면서 왜 부동산 가격이 높냐고? 지방이 죽는데 출산률이 높을 수 있는가? 

 

물론 이것도 더 자세히 말하자면 보수 정치인과 그들의 지지자들이다. 부산대같은 지방대학도 지잡대로 불리는 지금의 현실에 대해 부산 사람들이 분노하지 않고, 전국에서 평균적으로 가장 가난한 도시가 대구고 그 다음이 부산인데도 여전히 세종시 수도이전을 반대한 지금의 보수 정치인들을 지지한다. 나는 이런 경상도민들을 보면 깨어나지 못한 식민지 시민들과 총독부를 떠올릴 수 밖에 없다. 그들은 일제시대에서 수도권 제국의 시대로 갈아탄 것뿐일 수 있다. 

 

지방소멸은 계속될 수 없는 수도권의 지방착취일 뿐만 아니라 심각한 한국병을 또 하나 만든다. 그건 바로 다양성 소멸이다. 사람들이 다양하게 사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다른 환경에서 다른 주체성을 가지고 자신의 삶을 꾸며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국을 수도권이라는 단일 중심이 빨아들이니 한국에서 삶의 다양성이 커질 수가 없다.

 

지금의 한국이 있었던 것은 1980년대의 민주화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화란 결국 더 자유롭게 주체적으로 살고 싶다는 주장이다. 그 주장이 좌절되었다면 한국의 인재는 다양하게 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하던대로 관행대로 살면서 북한처럼 가난해져 갔을 것이다. 80년대 민주화 운동이 만든 힘이 지금의 한국 문화 수출의 가장 큰 기초가 되어 준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한국을 보면 그런 저항도 없고, 특히 젊은 세대에게서 대안적 삶을 주장하는 태도도 보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기성세대가 수도권이라는 감옥을 만들고 대안적 삶이 있을 구멍을 철저히 막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국은 지금 빠르게 시대를 역행하고 있다. 지금 시대는 공무원이나 대학졸업하면 취직해서 평생 그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을 시대에 뒤진 사람들로 만드는 시대인데 모든 학생들이 오히려 전보다 더 보수적으로 그길을 걷고 있다. 그 이유도 하나는 아니지만 나는 가장 큰 이유가 지방 소멸에 있다고 믿는다. 왜냐면 대안적이고 남들과는 다른 삶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주도가 붐을 이뤘을 때 제주도로 그걸 찾아 떠났지만 지금의 한국에서 그것이 성공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식민지 근성이 없어지고 있질 않기 때문이다. 제주도가 과잉개발로 스스로의 미래를 갉아먹는 일을 하는 걸 보면 한탕하고 제주도를 떠날 사람들이 제주도를 장악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니 어떻게 제주도가 대안적 삶의 공간이 될 수 있겠는가. 

 

제주도와 전라도와 경상도와 충청도와 강원도가 모두 서울과 다를 때 세상에는 더 많은 숨쉴 공간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찾아서 떠날 젊은이들도 있고 따라서 수도권집중으로 인한 착취도 줄어들 것이다. 다양성이 없어지고 대안적 삶이 없는 나라는 위험하다. 모두가 하나에 투기한 셈이니 그런 삶이 경쟁력이 없어지면 수 많은 무능력자만 양산될 것이다. 

 

그러나 어쨌건 20년전에 우리는 지방균형발전이란 수도권 집값을 떨어뜨리는 것을 포함해서 수도권 사람들의 이익에 반하므로 옳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다. 그 판단은 마치 온 국민이 말도 안되게 높은 고층 아파트 하나에 다 살 수 있다면 그래야 한다는 판단처럼도 보인다. 대한민국에서 경국대전 운운하는 재판이 합리적이라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 그렇다면 한국법원은 왜 칠거지악이나 삼종지도를 거론하지 않는가. 

 

과거에 그렇게 판단을 내려놓고 이제와서 왜 한국의 평균 출산율이 낮으며 왜 이렇게 부동산 거품이 높냐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짜장면을 주문했으니 짜장면이 나온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그 판단을 제대로 뒤집은 적도 없다. 이런 생각을 계속한다면 20년후에 한국이 망하더라도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주문해 놓고 왜냐고 물을 수는 없다. 한국병에 진단과 처방이 없는 게 아니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우리의 선택이 있을 뿐이다. 약을 계속 안먹으면서 아픈게 문제고 죽을 것같은게 문제라는 주장은 옳지 않다. 약을 안먹는 선택은 죽기로한 선택이니 처방에 따른 결과가 있을 뿐이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