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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국가란 무엇인가

국민의 지능과 패러다임의 전환

by 격암(강국진) 2024. 4. 13.

세상에 대한 많은 진실이 그렇지만 우리는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거부한다. 그런 좋은 예는 바로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작은 세계에서 산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누구나 유한하고 각자는 자신이 보고 듣고 이해할 수 있는 것들로 이뤄진 세계안에서 산다. 비행기를 타고 아니 우주선을 타고 세상을 돌아다닌다고 해도 한명의 개인이 가지는 정신적 문화적 일상적 세계는 전체 세계보다는 훨씬 훨씬 작다. 

 

우리는 이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지금의 세상은 하나의 잘못된 계몽주의적 이상에 근거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각각의 개인들이 독립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존재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우리가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학교는 학생들에게 모두 같은 것을 가르친다. 객관적 세계는 누구에게나 같기 때문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공부해야 한다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교과서를 보고 옆의 친구와 이야기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객관적 세상에 대한 지식은 교과서 안에 있으며 이 세상의 지식은 한없이 많고 지금 이순간에도 빠르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교육받을 의무와 권리가 있으며 1인 1표의 선거를 믿는다. 모든 인간들이 독립적이고 이성적인 판단을 할 때 집단의 판단은 가장 이성적이라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몽주의적 이상은 비현실적이 된지 오래다. 이 세상에는 이미 너무 많은 지식이 있다. 그래서 전문화가 진행된 것도 이미 백년이 넘었다. 대학에 전문화가 일어나기 전에는 교육받은 인간이란 모든 분야를 다 공부하는 전인적인 인격을 가진 존재였지만 지식이 너무 많아지자 우리는 그걸 전문화했고 그 결과 지식의 양은 더욱 늘어나서 이 전문화는 극한으로 추구되고 있다. 

 

이 상황에서 우리는 한가지 혼동을 곧잘 일으킨다. 그것은 인간과 나라는 말을 혼동하는 것이다. 집단으로서의 인간은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한 개인은 그것의 아주 작은 부분밖에는 모른다. 예를 들어 양자역학이란 이미 나온지 백년이 된 물리학 이론으로 '인간'에게 새로울 것이 없는 물리 이론이다. 하지만 양자역학을 정말로 공부한 사람은 물론 아주 소수다. 즉 인간이 아는 것과 개인으로서의 내가 아는 것은 큰 격차가 있다. 현대인들은 인간과 개인을 착각하여 조선시대 사람보다 자신이 더 똑똑하다고 믿지만 시장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현대인은 실상 조선시대사람보다 단순하게 살고 아는 것도 할 줄 아는 것도 작다. 그저 특정 분야에 대해서만 전문적일 뿐이다. 

 

그래서 뭐. 이런 건 당연한게 아니냐고? 그런데 이런 현실에서 독립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인 인간의 이상이란게 말이 될까? 말이 안된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민주주의를 외치지만 사실 전문 분야에서의 판단과 일반 적인 판단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양자역학 문제의 답이 뭔지를 국민투표에 붙인다면 국민 대부분은 그 답을 모를 것이다. 빵을 만들거나 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대해서도 우리는 그것을 국민투표에 붙이지는 않는다. 그런 일들은 그 분야를 잘 아는 전문가가 답해야 할 일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그런데 뭐가 전문 분야고 뭐가 일반 분야라는 말인가? 일반분야라는게 있기는 한가?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가 일반 분야에 속하는 질문의 대표적인 경우라면 정말 그럴까? 대통령이 지금 이 순간 대한민국을 위해 뭘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사람들이 가지는 이해가 정말 같을 수가 있을까? 사람들은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당이나 인물이 선거에서 이기면 분통을 터뜨린다. 왜 이런 선택이 엉터리라는 것을 모르는지 정말 국민이 개돼지처럼 바보가 아닌지 답답하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말하면서 왜 자신의 말이 옳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까?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 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양자역학 문제의 답처럼 전문적인 질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람들이 전혀 그 답을 알지 못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이제까지 말한 지식의 무한함과 전문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라. 국민중 상당수가 바보같은 것은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걸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내가 말하는 것처럼 직설적으로 그 부분을 지적하지 않는 것은 대안이 없는 한 이런 지적은 민주주의의 부정으로 해석되며 따라서 금기시 되는 것이라고 교육받았기 때문이다. 즉 우리의 현재 시스템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해도 우리는 그걸 직면하기를 금기시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대안이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인간의 이성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해서 그 결론이 민주주의의 부정이나 엘리트주의가 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런 걸 말하는 것이 두렵지 않다. 

 

그 대안의 첫번째 지적은 이렇다. 인간은 유한하다. 그래서 우리는 결국 외부와의 연결을 통해 불확실성과 싸운다. 예를 들어 앞에서 말한 누구를 대통령으로 뽑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생각해 보자. 계몽주의적 이상에서는 각각의 개인이 객관적인 정보들을 읽고 이해해서는 한 명을 선택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렇다. 우리는 그냥 우리가 아는 정보의 원천들을 믿고 그걸 조합해서는 결론을 내린다.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예를 들자면 그냥 내 주변의 이웃들 세 명이 윤석열이 좋다고 하니까 윤석열을 찍은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윤석열의 장점과 그의 경쟁자였던 이재명에 대한 비판이 옳을 거라고 믿은 것이다. 

 

우리는 이걸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정보 원천들을 믿고 그걸 조합해서 복잡한 문제의 답을 도출하지 질문과 관련된 사실들을 과학적이고 객관적으로 엄밀하게 분석해서 결론을 내는게 아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요즘에는 누구나 이렇다. 그리고 그 판단의 옳음은 당연히 상당부분 우리의 이 연결에서 온다. 즉 우리가 누구와 이야기하고 누구를 믿는가에 따라 우리의 판단이 달라진다.  

 

이걸 대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것이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이성적인 인간이라는 모델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 너무나 복잡한 세계에서는 더 효율적인 것이라 이미 모두가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모델이기 때문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이것은 확률론적 모델이나 베이지안 모델이라고 불러야 한다. 우리는 분석적 환원주의적 해석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냥 데이터에 기반해서 우리의 믿음을 개선한다. 우리가 누구를 믿는가가 우리의 판단을 결정한다. 실제로 이번 선거후 국회의원이 당선된 모습을 보면 지역에 따라 동서로 완전히 나눠어 있다. 사람들이 주변 사람들의 강력한 영향을 받는다는 증거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걸 많은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그걸 부정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런 행동을 인간의 오류라고 여기고 극복하고 고쳐야 할 점으로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이 점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서 이것을 지능의 핵심으로 여기는 관점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내가 계몽주의적 이상이라고 하는 관점을 부정하고 지능의 본질이나 핵심이 사회적 연결이나 개인적으로 획득하는 정보의 분석에 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계몽주의적 이상은 이 세상이 지극히 단순했던 과거 시대의 유산이다. 그때는 말하자면 지식인이라면 세상에 출판되는 책을 모두 읽던 그런 시대였다. 전문화따위는 없었다. 알 것도 별로 없었다. 예를 들어 노예제가 있던 고대 아테네 시절의 민주주의가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더 민주화되어 모든 사람들이 사회적 판단에 참여한다. 그리고 누구도 세상일을 다 알지 못한다. 그러기는 커녕 아주 극히 일부만 안다. 

 

결국 개인의 판단이란 상당부분이 그 개인이 형성하고 있는 신뢰의 망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다. 그 망으로부터의 정보에 간단한 개인적 판단을 더해서 다시 망으로 되돌려 주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지적 판단이다. 그리고 그 판단이 다시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영향을 준다. 우리는 이것을 인간의 오류나 한계로 보지 말고 이 점을 인정하고 직면해야 한다. 

 

예를 들어 객관적 사실이면 국민 모두의 생각이 바뀔거라는 생각을 해서는 안된다. 신뢰가 없으면 진짜 뉴스는 가짜 뉴스에게 진다. 확률적 관점에서는 사회속의 모두는 그냥 자기 정신의 집에 산다. 모두가 주관적인 세계에 산다. 확률적 관점에 따르면 누군가가 지능이 떨어지는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가 사회적으로 외롭게 고립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개인은 지능이 떨어지는 판단내지 이기적인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렇다고 할 때 그 개인의 판단에 대해서 그 개인만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전체 사회의 판단이 더 지능적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는 더욱 더 많이 서로 서로 연결되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적 판단이 어리석게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리석은 판단이나 집단적 지능을 사회적 비용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더 많은 사회적 관심을 통해 더 많은 소통을 해야 했을 텐데 누군가들을 버려두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만의 주관적 세계로 빠져들었다. 우리는 누구도 외롭게 둬서는 안된다. 일베니 극렬 페미니스트니 하는 사람들은 정신병을 가진 사람들처럼 보일 때가 있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도 태극기 부대에 참여하는 사람도 그럴 때가 있다.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기 전에 그들의 고립을 고민해야 하고 어느 정도는 사회 모두의 책임이고 어느 정도는 피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할 필요가 있다. 사회가 그들을 버렸기에 사이비교주같은 사람들이 그들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정신을 망친 것이다. 우리는 잘못된 판단에 대해서 누군가를 비난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판단을 내렸건 책임은 모두에게 어느 정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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