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를 쓰는 인간 혹은 도구를 쓰는 인간은 전통적으로 인간의 육체를 경계로 해서 인간을 정의하던 인간관을 바꾼다. 예를 들어 브라이도티가 포스트 휴먼이라는 개념으로 이것을 주장한다. 사실 우리가 이전에 주장하던 인본주의란 인간이란 이러저러한 것이다라는 인간에 대한 상식을 주장하면서 역으로 그에서 멀리 있는 사람들을 제대로된 인간이 못되는 것으로 여기게 만드는 면이 있다. 그래서 브라이도티는 인본주의란 유럽의 남성중심주의라고 말했다고 한다. 유럽의 성인남성을 인간이라고 여기면서 보편적 인본주의를 탐구하면 여성이나 어린이 그리고 유색인종의 사람들은 제대로 된 인간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게 되기 쉽다. 인간이란 보편적으로 이러저러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바로 그 유럽의 남성 철학자들이기 때문이다. 자연히 화이트컬러에 비해 육체노동자들도 인본주의의 중심을 차지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기계나 지식이 인간의 정체성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지적했다는 점에서는 이런 포스트 휴먼의 주장이 옳지만 모든 기술과 도구를 하나로 뭉뚱그려버렸다는 점에서 포스트 휴먼의 주장은 오히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들에 관한 논의의 촛점을 흐리게 만드는 면이 있다. 확실히 망치를 든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은 다르다. 그러나 이것과 인터넷을 쓰고 스마트폰을 쓰는 인간과 망치를 든 인간과 차이가 없다고 말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다. 그리고 특히 인류 문명사에서 문자의 역할, 과학의 역할 그리고 인공지능의 역할을 보지 못하게 만든다. 그냥 모든 도구는 다 대단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흐려진 촛점속에서 내려지기 쉬운 결론은 결국은 다시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따뜻한 마음을 가진 인간들의 공동체로 돌아가자는 주장이 되기 쉽다. 이제까지 소외되어온 사람들에게 더 개방된 사회가 되자는 주장이 되기 쉽다. 이건 그런데 별로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세상을 계몽하려고 했던 사람들은 수천년전부터, 산업혁명 이래로, 항상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 복잡한 포스트휴먼의 주장이 별 힘이 없다. 그냥 인간이 꼭 이런거라고 단정짓지 말라고 하는 효과뿐이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의 구분같은 것을 크게 신경쓰지 말라는 페미니즘의 주장이 더 들어가기 쉬운 구조가 되었을 뿐이다. 인간의 육체를 넘어서 기계와 하나된 육체가 인간을 정의하니 인간의 육체에 기반한 정체성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흑인종 황인종 백인종도 아니고 남자와 여자도 아니다. 무한히 많은 기계의 조합과 결합된 무수히 많은 포스트휴먼이 있다. 인간과 기계의 구분도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건 별로 생산적이 아니다. 아니 파괴적이다. 모든 문명적 질서를 전부 억압으로 여기면서 다 무너뜨리고 나면 남는 것은 혼돈뿐일 것이다. 그리고 모든 도구를 든 인간이 하나의 사이보그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은 엄밀히 말해 옳지만 인간이 사이보그라는 점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문자다. 인간은 문자를 쓰게 되면서 전혀 다른 생명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인간이 망치를 들었다던가 인간이 자동차나 계산기를쓴다는 것과는 수준의 다른 차이다. 그래서 포스트 휴먼의 주장은 남용되지 말고 문자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리고 AI에 집중되어야 한다. 그럴 때 질서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운 세상이 가능해 진다. 모든 인간이 나는 남들과는 다른 종류의 생물체라고 주장하면 아무 의미가 없다. 10원이나 10억이나 다 돈일 뿐이라고 할 때 자본주의가 가능할까?
생각만 한 것과 그것을 말해서 한 명 이상의 사람들이 듣게 한 것 그리고 그것을 글로 적어서 잠재적으로는 무한한 수의 사람들이 끝없는 미래에도 다시 읽게 한 것은 서로 다르다. 왜냐면 보편성과 객관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 개인의 느낌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느낌은 이름도 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질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을 소리내어 표현하고 그것이 다른 사람의 귀에 들리게 되었을 때 우리는 다수의 인간의 기억력을 이어붙이게 된다. 즉 으악이라는 말은 놀람이나 아픔을 의미한다는 사실이 타인은 물론 나 자신에게도 고정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다음번에 같은 상황에서 같은 것을 표현하려고 할 때 같은 표현으로 말을 할 것이다. 그것이 타인에게는 물론 스스로에게도 보다 명확한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같은 관행이 바로 구술언어다.
언어는 집단을 하나의 집단 지성으로 작동시키기 시작한다. 그들의 경험은 공유될 수 있고 그래서 기억들은 복제된다. 그래서 집단의 정보처리 능력은 크게 높아진다. 문자가 없어도 그들은 노래를 만들어서 아주 긴 신화를 이야기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걸 누군가가 부분적으로 잊어버린다고 해도 여러명이 기억할 때 오류는 수정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결국 하루를 살고 한달을 살던 인간이 조상을 기억하고 자기 집앞만 알던 인간이 훨씬 넓은 영역에 대한 기억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문자는 이같은 보편성과 객관성을 전혀 다른 차원까지 끌어올린다. 글로 기록된 것은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고 개인의 기억력에 의존하는 구술언어와는 달리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멸망한 문명이 남긴 글도 후세의 사람들이 읽을 수 있다. 자유롭다는 느낌과 자유라고 말하는 것과 자유라고 쓴 것은 전혀 다른 보편성과 객관성을 가진다. 이론적으로 문자로 기록된 것은 무한한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플라톤이나 공자의 책을 몇명이나 읽었을까? 성경을 몇명이나 읽었을까? 우리는 그것들을 얼마나 오랜동안 읽고 있는가? 우리는 문자에 익숙하므로 그 숫자에 놀라지 않고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인류역사에 있어서 최초의 탈인간적 변화라고 할만하다. 이건 땅위에서 꾸물거리면서 살던 생명체가 갑자기 하늘로 날아올라 지구를 한바퀴 도는 것같은 엄청난 변화다. 문자가 나온 이래 인간이 바라볼 수 있는 시공간의 넓이와 추상적 상상 공간의 폭은 어마어마하게 확장되었다. 스스로를 그 공간속을 살아가는 존재로 여기는 인간은 자연히 자기를 이전과는 전혀 다른 존재로 파악한다. 제일 극적인 예는 아마도 프로게이머같이 문명적 발명에 의존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의 정체성일 것이다. 그게 뭔지를 선사시대 사람들이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 놀라움은 지금도 우리 안에 철학적 전통으로 남아있다. 그것이 진리나 본질같은 것에 대한 주장이다.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라던가 마음이라는 생각은 결국 인간을 글자로 적은 순간 만들어진 놀라움이 만들어 낸 것이다. 기록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과 기록된 그 뭔가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혼동되기 쉽다. 그렇다면 변하지 않는 그것은 무엇일까? 국가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 보편과 특수의 관계는 어떠하며 우리는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가? 그 답은 엉뚱한 곳에 있다. 국가란 다른 무엇보다 먼저 문자다. 글자로 적은 것이다. 인간이나 진리도 마찬가지다. 글로 적혀진 뭔가와 그러기 전의 뭔가의 차이를 우리는 종종 잊고 그것을 동일시 하지만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차이에 주목하고 괴로워한다. 그건 마치 잘 기억나지 않는 유년시절을 기억하려고 하는 세속화된 어른들의 모습과 같다. 자신이 이미 변하여 뭔가 다른 것이 되었는데 뭘 잃어버린 것인지를 좀처럼 알 수 없는 어른들 말이다.
문자가 나온 이래 지식이란 곧 글로 적혀진 정보였다. 우리는 물론 말을 안하면서도 생각할 수 있고, 글을 쓰지 않고 말만 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압도적으로 문자로 만들어진 존재인가를 잊는다. 실은 현대인들의 생각이나 구술언어는 전부 문자의 결과물이다. 그것들은 문자없이는 만들어 질 수 없는 사회속에서 만들어져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문자로 지식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변화시킨 인간을 사이보그 1이라고 부른다. 많은 발명이 인간을 변화시켰고 그 발명이나 도구들은 서로 서로 연결되어져 있지만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문자만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것은 없다. 불이나 바퀴나 농업기술도 인간을 바꿧지만 그 모든 것은 문자라는 것의 발명없이는 현대인의 정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만들 수는 없다. 인간의 등에 날개가 생겨서 하늘을 난다던가 인간이 돌을 먹을 수 있게 되어 먹을 것걱정이 없어진다고 해도 그 변화는 문자가 만들어 낸 변화에 비하면 하찮은 것이다. 문자의 발명은 정신의 발명과 거의 같다. 복잡하고 변화하는 세상에서 육체는 변화하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을 정신적으로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문자의 발명은 인간의 발명과도 거의 같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의 변화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사이보그 1과 선사시대의 원시인은 엄청나게 다르다. 우리는 그것을 플라톤이나 공자같은 수천년전의 사람들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들은 수천년전 사람이지만 이미 현대인보다 더 지능적인면이 있을 정도로 변화된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문자가 잘보여주듯이 도구가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인간을 사이보그로 파악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변화를 이에 비하면 손색이 있는 다른 모든 발명들과 비슷한 수준에 놓아서는 안된다. 그러니까 문자와 자동차의 발명을 같은 높이에 놓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자동차도 인간의 정신을 확실히 크게 바꾼다. 그러나 문자가 바꾼 폭과 비교하면 변화가 없다고 해도 좋다. 결국 크고 작음은 상대적인 것이다.
이렇게 문자를 강조하게 되는 이유는 AI를 제대로 평가하기 위해서다. AI를 그저 또다른 하나의 발명으로 여겨서는 안된다. 4차산업혁명이 온다고들 하는데 우리는 벌써 3번의 혁명을 겪었고 그렇다면 4번째도 대단하기는 해도 뭐 이미 겪은 것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AI는 자동화를 완성한다. 이미 많은 센서들이 정보를 자동적으로 수집하고 있다. 나를 포함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서 어떤 정보들을 입력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정보들을 자동적으로 분석할 능력이 기계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제 아무리 21세기 인간이 자신의 문명을 자랑한다고 해도 사회적 변화는 어딘가에서 지루해 하고 멍청한 표정을 짓는 관료들의 능력에 의해서 제한되게 되어 있다. 현대 사회는 엄청난 양의 정보를 생산하는 복잡하고 빨리 변하는 것인데 그걸 감당하기에는 인간의 능력이 부족하다. 이건 전화가 발명되었는데 자동교환기가 없어서 전화의 보급이 안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다르게 말하면 인간을 전혀 다른 수준의 생명체로 변화시킨 문자의 힘, 문자 지능이 한계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문자에 기반하여 학습한 인간의 판단능력과 속력으로는 지구촌이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다룰 수가 없다. 우리는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인간을 최고로 훈련시켜서 중요한 자리에 보낼 수 있지만 그게 성공한다고 해도 그들은 역부족이고 그 일이 너무 힘들어서 그들은 그걸 오랜동안 잘할 수 없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인간교환수를 잘 훈련시켜서 수백만이 전화를 쓰는 도시를 유지하자는 말이나 마찬가지다.
현대문명은 몰락의 길에 들어섰다. 교육은 점점 더 크게 실패하고 있다. 사람들은 점점 더 멍청하고 무력해지고 있다. 그 이유는 현대사회가 점점 더 빠르게 변하고 복잡한 곳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제 단어들은 의미를 잃어버리기 시작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뭔지 우리는 말하기 힘들다. 캐나다같은 곳에서는 그래서 성별을 묻는 난이 5-6개나 된다고 한다. 자유는 뭐가 평등은 뭐고 정의는 무엇인가? 대학은 세속화되어 취업준비 학교처럼 되었지만 그렇게 되면 될 수록 오히려 대중과 거리가 멀어진다. 이제 대학교수들의 말에는 권위가 없다. 그들도 이 빠르게 변하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고 어떤 면에서는 대학바깥에 있는 사람들보다 더 그렇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치 별로 인기가 없어진 종교의 신자들처럼 보인다.
이게 다 정보적체때문이다. 교육이 보편화된 것보다 세상이 더 많이 복잡해졌고 빨리 변하게 되었기 때문에 세상살기가 더 어려워졌다. 2백년전이라면 작은 동네에서 농사꾼의 자식으로 태어난 아이는 열살만 되어도 모르는게 없었을 것이다. 그 마을사람도 다 알고, 농사짓는 법도 대충 다 배웟을 것이다. 지금은 16년간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한 사람도 아무 것도 모르는 멍청이처럼 느껴진다. 교육의 효과가 이렇게 떨어지는데 교육이 안 실패하고 사람들이 멍청하고 무력해지지 않는다는 것이 오히려 놀라운 일일 것이다.
AI는 새로운 문자고 새로운 언어다. 지금으로서는 이 정보적체 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법이고 현대문명의 몰락을 막을 유일한 수단이다. 인간은 과거 문자와 일체화하여 사이보그1이 되었듯이 AI를 받아들이고 사이보그2가 되어야 한다. 그러지 못할 때 우리는 대재앙을 보게 될 것이다. 아니 이미 보고 있다. 전세계 정부들은 엄청난 적자를 내고 연금은 다 고갈되었다. 계속해서 극단적 인물들이 정치가로 성공하는 모습을 우리는 본다. 언론이 무력해지고 돈이 휴지가 되고 나면 세상은 그제서야 문명의 몰락을 이야기할 지 모르지만 오늘날의 세계는 위기다. 인간 멸종을 이야기할 정도의 기후위기가 닥쳐와도 힘을 합치지 못하고 쓸데없는 전쟁도 막지 못한다. 고작 전염병 하나 번지면 세계가 멈춰선다.
포스트휴먼은 뭐가 인간인지를 애매하게 만든다. 하지만 사이보그2는 뭐가 인간인지를 분명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가 새로운 인간이 되기에 실패할 때 아주 비극적인 미래가 올거라는 예측을 기반으로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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