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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생활에 대하여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by 격암(강국진) 2025. 4. 12.

어쩌다 중년의 정체성 고민에 대한 글을 쓰다보니 자아를 찾는다는 말에 대해서 생각할 계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 말은 많이 하고 많이 듣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 뜻이 분명하지 않고 종종 신비주의적으로 이해되어진다. 예를 들어 자아를 찾는다는 일은 불교에서의 득도처럼 이해된다. 따라서 그것은 어느 순간 탁 깨달아 알게 되는 것이거나 어떤 지식들을 오래동안 쌓다보면 생겨나는 것이지만 여전히 어떤 깨달음을 통해 확고하게 얻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진리를 일단 한번 깨닫고 나면 최종적이고 완벽한 상태에 도달한다고 믿는 것처럼 우리는 나의 자아라는 것도 한번에 그리고 최종적으로 찾아지는 것으로 여긴다. 여기서 자아란 마치 길에서 잃어버린 반지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반지를 찾고 나서 주머니에 잘 보관하는 한 다시 잊어버려지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서양의 미디어에서 나타나는 자아실현이나 자아찾기는 일종의 자기 꿈을 실현하고 자기가 있고 싶은 곳을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그것은 어떤 내적인 완벽함을 기하는 것보다 사회적 지위를 얻어서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 내는 일에 가깝다. 내가 꿈꾸던 우주비행사가 된다면 그것이 곧 자아실현이고 자아찾기라는 식이다. 
나는 어떤 말의 뜻에 대해서 최종적으로 확고한 뜻을 따지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같은 것을 자아실현이나 자아찾기라고 부르고 싶다면 그것에 대해서 반박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다만 이와는 조금은 다른 의미의 자아 찾기나 자아 실현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으며 나로서는 그것이 보다 현실적인 의미의 자아실현이 아닌가 생각할 뿐이다. 
나는 우선 우리가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자아에 대해서 너무 신비주의적으로 접근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자아라는 것은 우리의 육체이고, 우리의 정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 정신과 육체가 모두 교육과 연결을 통해서 확장되는 것이라는 점을 알고 있다. 즉 영혼과 자아를 같은 것으로 생각해서 갓난 아기와 그 아기가 어른이 된 사람은 같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자아도 같은 것이라고 여기는 식의 태도는 버려야 한다. 영혼의 뜻은 내가 여기서 논할 바가 아니며 단지 영혼과 자아가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자아는 변화한다. 갓난 아기와 청소년 그리고 성인이 된 사람의 자아는 모두 다른 것이다. 그것은 경험에 의해서 확장되고 육체가 성장함에 따라 달라진다. 
또한 자아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다.  우리는 대개 우리의 육체는 자아의 일부라고 생각하지만 내 자동차는 내 자아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주장은 육체와 자동차가 우리의 행동에 미치는 영향이 지극히 다르다는 점에서 옳지만 나는 육체도 자동차도 모두 서로 다른 강도로 자아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한다. 자동차는 물론 우리의 육체의 일부를 상실해도 우리는 여전히 이전과 같은 사람이라고 할만한 사람이기를 멈추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다소 다른 자아인 것도 사실인 것이다. 
이같은 자아에 대한 설명을 본질론과 관계론이라는 보다 철학적인 용어로 말해보자면 자아를 변하지 않는 본질 같은 것으로 찾아서는 안되며 그것이 우리의 육체라는 물질 안에 있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아를 DNA같은 분자조각으로 환원시키고 만다. 그보다 자아는 훨씬 더 관계론적이다. 즉 그것은 서로 다른 것들의 관계속에서 나타나고 확장된다. 그래서 우리의 지식이나 육체는 물론 우리의 가족이나 우리의 직장, 우리가 사는 사회도 우리의 자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다. 단 그것들이 우리와 가지는 관계의 강도와 형식에 따라서 그것들은 우리의 자아의 핵심이고 중심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같은 관계론적인 자아를 생각해 보았을 때 우리는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이나 실현한다는 것이 대개는 어느 순간 탁하고 일어나며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상당 부분 육체의 성장처럼 책을 읽고 사색하고 정리하고 경험하는 가운데 조금씩 자라나는 것이다. 일년 내내 단 한번도 밭에 신경쓰지 않았다가 어느 순간 밭에 신경을 쓰면 탁 하고 그 안에 잘 자란 야채가 나타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평생동안 우리의 자아를 가꾸는 일을 외면하고 살아왔다면 쑥대밭으로 자라난 자아의 현상태가 어느 순간의 깨달음으로 탁하고 변화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자아를 찾는다는 것은 벽돌 하나 하나를 쌓아서 집을 집듯이  공부를 하는 것이고, 친구와 가족을 만드는 일이며, 직업과 경험을 가지고 어떤 사회공동체에 참여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사람이 정글북에 나오는 소년처럼 짐승들 사이에서 홀로 컸다면 그 사람이 문명 사회의 사람이 아름답고 부러워할만한 하다고 여길 자아를 가지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인간이 인간이 되기위해서는 오랜 시간동안의 교육과 공부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나는 누구나 물리학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는 믿지 않지만 물리학을 전공한 내가 되돌아보면 내가 가진 생각들은 종종 물리학을 공부한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런 공부없이 산속에서 혼자 명상에 잠긴다고 해서 뭔가를 이루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미 성인이 되어버리고만 사람은 변하기 쉽지 않다. 그러니까 머리가 허옇게 되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 성찰하지 않은 사람은 로또를 맞은 것처럼 어느 순간 자신의 마음에 드는 자아를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그런 생각을 버려야 오히려 자아를 발견하는데 있어서 실망하지 않고 실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자신의 문제를 사이비종교나 말도안되는 위험한 투자를 통해서 해결하려는 사람처럼 문제를 해결하는게 아니라 오히려 키우게 될 것이다. 뒤에 말하겠지만 자아발견이 완전히 집짓는 것처럼 따분하게 벽돌 한장 한장을 쌓아올리는 과정만은 아니다. 사실은 그보다 더 힘들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건 그런 오랜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외국어를 배우고, 이해하기 어려운 책을 읽고, 날마다 명상하고 글을 쓰며 좋은 이야기를 듣고 고민하는 등의 마치 입시공부하는 것같은 식의 공부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자아를 발견한다던가 하는 표현은 불가능한 표현이며 어느 순간의 깨달음으로 우리가 자신에 대한 생각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대로 있어도 우리가 그것과 가지는 관계는 하나의 생각만 바뀌어도 크게 흔들릴 수 있다. 우리가 자아를 발견한다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경험하고 간접 체험하며 얻은 많은 정보들을 단지 누적만 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것안에 어떤 질서를 발견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런 것이 없어서는 우리가 자아를 발견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경험이 없어서는 아무 것도 안되지만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인간의 타고난 기억력이나 이해력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으므로 우리가 어떤 도구를 사용하고 법칙을 발견하는 일없이는, 어떤 일반화를 이룩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그저 침팬지와 그다지 다르지 않은 동물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깨달음의 순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의 정신적 패러다임은 비약하고 세상은 다른 것처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더이상 세상과 지금까지와 같은 관계를 가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하나의 작은 예를 들어보자면 작은 골목에서 골목대장이 되고 싶어하던 소년이 그 작은 골목은 훨씬 더 큰 세계안의 작은 세계일 뿐이며 그 작은 골목안에서의 평가는 절대적인 것도 대단한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골목이 그 소년에게 가지는 의미는 크게 변화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은 어쩌면 명상이라던가 국토도보순례같은 수도승이 할 것같은 고행의 순간에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몸과 마음을 괴롭게 하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깨달음은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때문에 방해받기도 하지만 교통체증으로 느리게 가는 차를 운전하는 가운데도 올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순간의 행운을 요구하는 것이는 하지만 결국 그 사람이 오랜간 쌓아온 내적인 정보들이 있기에 존재하는 것이다. 단순히 숨참기를 지독하게 하고 명상으로 정신을 어지러게 해봐야 그런 짜내기로 될 리가 없다. 
인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어떤 깨달음도 최종적이고 절대적이지 않다. 어떤 자아도 절대적으로 더 좋다던가하고 말할 수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결코 최종적으로 완벽한 자아를 한번에 발견하게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이 모든 자아찾기는 소용없는 것일까? 지금도 미래에도 유한한 존재로 남을 우리는 자아찾기를 뭘하러 하는가?
우선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있다. 우리안에는 무시하고 싶지만 우리를 괴롭히는 기억들이 있다. 어쩌면 그것은 기억이 아니라 사라진 손같이 육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자아찾기는 결국 우리가 가진 기억들을 최대한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성장의 과정이다. 우리의 불안을 몰아내고 우리로 하여금 되도록 세상과 편안한 관계를 가지게 하고 무엇보다 우리의 선택과 행동을 후회하지 않게 해준다. 물론 결국 완벽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세상은 계속 변화하고 우리의 자아찾기는 완벽할 수가 없다. 말했듯 우리의 자식도 우리의 자아의 중요한 부분인데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불행으로 그 자식이 사고를 당할 수도 있다. 이럴 때도 전혀 슬퍼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자아찾기라면 나는 그런 의미의 자아찾기는 알지 못한다. 결국 인간은 사고를 당하고 슬퍼하고 파괴될 수 있다. 다만 가능성이 작아질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자아를 잘 정돈했을 때 우리는 비로소 더 큰 세계를 볼 수가 있다. 공부하고 성장하는게 가능하다. 앞에서 말한 작은 골목과 더 큰 세계의 예로 돌아가 보자면 작은 골목에서의 일에만 너무 몰두하는 사람은 더 큰 세계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식들을 무시하게 된다. 작은 자아는 우리의 눈과 귀를 멀게 한다. 결국 우리는 작은 자아를 더 키울 수가 없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가 자아찾기를 꾸준히 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일지 모른다. 우리가 어떤 하나의 세계에만 몰두하는 것은 우리의 성장을 막고 우리의 공부를 방해한다. 그래서 우리가 수십년을 그것에만 몰두한 후에 어느날 뒤를 돌아보면 우리는 우리의 그 모든 시간이 낭비된 것처럽 보일 수 있다. 마치 중년이 되어서야 아직까지도 초등학교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을 깨달은 사람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정리하자면 우리는 세계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위해 그리고 더 큰 세계와의 관계를 깨닫기 위해 자아찾기를 하는 것이다. 자아를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다가 하나의 생각으로 순식간에 이뤄지는 일도 아니고 탁하고 깨달으면 최종적이고 절대적으로 도달하는 경지도 아니다. 단지 길은 영원히 계속될테지만 지나온 길을 돌아볼 여유가 있고 스스로가 새로운 길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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