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를 찾는다는 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자아찾기를 독립적 인간이 되는 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옳은 태도이기는 하지만 또한 전혀 틀린 태도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최근에 나는 폭싹 속았수다라는 드라마를 본 적이 있다. 그 드라마에 나오는 한 엄마는 자식에게 너는 내 자랑이고 내 인생이라고 거듭 말하면서 자식의 인생과 자신의 인생을 구분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덕분에 그 자식은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불행해진다. 이런 모습을 본다면 사람들은 그 자식은 부모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며 그 부모도 그 자식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같은 것을 자아찾기라고 생각하며 나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나도 그같은 사람들을 직접 만난다면 아마도 비슷하게 조언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점을 생각해 보자. 여기에는 흔히 애정이라고 주장되는 감정이 깊숙히 관계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외부에서 판단하여 그런 애정이 해로우며 그런 애정을 포기하라고 하면서 그것을 독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애정이 언제나 외부로 부터 승인을 얻고, 객관적으로 승인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성공할 가능성이 작은 꿈에 매달리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그같은 꿈은 복권당첨을 기다리는 것처럼 도박을 하는 것이고 그것이 해롭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같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의 말을 부정하고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독립일까?
위에서 말하는 그 엄마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람들은 모두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한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나는 세상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아를 가진 인간이 되고 싶지 다른 사람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이쯤되면 내가 말하는 요점이 분명해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아를 찾는 것을 독립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흔히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을 자아를 찾은 사람이라고 말한다. 즉 내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는 것을 막는 것은 억압인데 그것을 무시하고 극복하는 것이 독립하는 것이고 자아를 찾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식이라면 알콜중독자가 자신의 술에 대한 애정을 당연시하고 자기 마음이 가는대로 행동하기 위해 즉 술을 계속 마시기 위해 주변의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는 것도 독립이 되고 자아를 찾는 일이 된다. 결국 자아를 찾았다는 것은 내 맘대로 산다는 뜻이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예들은 억지이며 우리가 말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애정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바람직한 애정이란게 도대체 누구의 눈에 그렇다는 것인가? 게다가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가지는 집착이나 애정을 당연시한다. 즉 자신이 뭔가에 조종당하고 있을 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모르거나 알아도 그걸 당연시 한다. 어리석은 자식에게 휘둘려 그 인생을 망가뜨리는 부모는 아주 많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그럼 자식을 포기해야 하냐면서 그 불행한 관계가 지금과는 달라질 수 있고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부모들은 많다.
이 모든 걸 생각해 보자면 이런 혼란의 뿌리는 자아를 찾는 것을 독립이라고 말하고 독립적 인간이란 내 마음대로 사는 인간이라고 여기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들이 언제나 어떤 애정이나 집착에 빠져 있으며 그것을 대개 당연시 한다는 것을 모른다는 점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아찾기는 독립이나 자기 마음대로 살기 같은 단어들이 아니라 자기를 성찰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성찰하면서 우리는 가장 먼저 나는 이 세상의 수 많은 것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엄밀하게 말하면 세상에는 독립이란게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 수 많은 연결들이 정도의 차는 있지만 모두 나의 일부이다.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자식이 된다는 것은 동시에 그 부모와 나의 인연이 매우 깊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일이 되어야 한다. 다만 나와 세상의 인연은 그 하나가 아니다. 나는 수 많은 연결과 인연들을 가지고 있고 그것들을 두루 살핀 후에 아주 소중하지만 어떤 인연 하나에 지나치게 휘둘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알콜중독자라도 핵심적 질문은 술에 대한 애정이 좋은가 나쁜가가 아니라 그 사람은 다른 연결도 가지고 있고 그 연결들은 중요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부모에게 얽매인 자식이나 그 반대의 경우에도 중요한 질문은 그 연결들이 안중요한가 아닌가가 아니라 그 연결말고 다른 연결들도 세상에 있지 않은가 하는 것이다.
좁디 좁은 우물과 같은 세계안에서의 애정과 승리에 몰두하는 사람에게는 그 세계를 어떤 힘이 지켜주고 있으며 그 세계의 바깥과 나의 관계는 무엇인가가 보이지 않기 마련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은 누구나 어느 정도는 그렇지만 어떤 사람은 자신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무지에 대해서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관계들을 두루 살피는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 후자의 사람이 자아찾기를 독립이니 내 맘대로 하는 것이니 하고 이해하면 그 사람은 자신의 좁은 세계에서 빠져나올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그 세계에 대한 집착을 계속하는 것을 자아찾기라고 주장할 가능성이 크다. 누군가가 그 것을 지적하면 이를 억압으로 여기면서 나도 내 마음대로 살고 싶다, 자아를 가지고 싶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 작은 세계가 지탱하는 것에는 바로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관여되어 있는데 말이다.
극명한 예는 부모의 도움으로 크고 살고 있는 아이가 부모에게 내 맘대로 살겠다면서 나도 독립하고 자아를 가지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이제까지 그리고 현재 부모에게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가를 고민하고 이해하지 못한 아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은 독립도 자아찾기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채무자가 채권자를 모른 척하는 것을 독립으로 부르는 것과 같은 뻔뻔한 일이 되어 그 아이가 그 부모에 대한 착취를 당연시 하는 말이 될 수 있다. 부모의 말은 부당한 말일 수도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자식과 부모가 함께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말일 수도 있다. 왼팔이 오른팔에게 나도 자아를 찾고 싶고 독립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자신이 얼마나 깊게 오른팔에 연결되어 있는지를 모르며 그 말이 오른팔에게 죽으라고 하는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말일 수 있다.
자아찾기는 결국 자신과 세상을 두루 살피고 매우 자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나와 세상의 많은 연결들을 말한다고 해서 내가 누구를 위해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 연결이 곧 나라는 것을 알고 그 연결들 하나 하나에 대해서 자상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나의 딸이나 아들의 아버지라는 것은 나의 중요한 일부이다. 나는 그 관계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나를 이루는 유일한 연결은 아니다. 예를 들어 나를 여기까지 키워낸 다른 사람은 물론, 한국이란 사회, 지구라는 이 환경과 나와의 관계도 중요한 연결이다. 그런 연결들은 서로 충돌할 때도 있고 유한한 나로서는 그 모든 연결들을 다 살필 수도 없다. 하지만 그 모든 연결들이 나이다. 나를 찾는다는 것은 이 연결들을 인식하고 보살피는 일이다.
그런데 무슨 독립이고 내 마음대로 산다는 것인가? 오른 손이 가렵다고 왼 발을 자르는 것이 내 마음대로 사는 일이고 독립인가? 나는 이 세상 덕분에 존재하는데 뭐가 독립이고 뭐가 내 마음대로라는 것인가. 첫째 아이가 귀엽다고 그 아이에만 주목하면 그런 나의 행동이 둘째 아이에게 상처가 되는 일이 있다. 그걸 지적하는 사람에게 그런 억압은 필요없으며 나는 내 마음대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 자아를 찾는 일인가? 둘째 아이도 내 자아의 일부이므로 난 결국 자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를 찾은 사람이 상대적으로 자유로워 지는 것은 이 모든 관계들을 고민하고 정리한 결과 이 세상과 나 자신에게 최소한의 상처만 주면서 살아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유한한 인간에게는 최소한이란 말은 적당하지 않다. 그냥 상대적으로 덜 그렇다는 정도로 해야 한다. 인간은 숨쉬는 것 자체가 주변 사람과 이 지구에 해를 끼치는 일이다.
눈감고 좁은 세상에 갇힌 채 주변에 칼을 휘두르고 독한 말을 하면서 나도 독립하고 싶고 마음대로 살고 싶다. 나도 자아를 가지고 싶다는 말을 하는 것은 자아찾기를 오해하는 것이다. 유명해지고 높은 지위를 얻으며 부자되는 것을 자아찾기로 생각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아찾기란 오히려 내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거대한 연결을 인식하고 그것에 감사하며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 연결의 인식은 어떤 면에서 나를 속박하는 억압의 인식일 수 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큰 억압인가. 그런데 과연 나를 키워준 나라에 대해 애정을 가지는 것이 자아를 지키는 일일까 나라를 팔아먹어도 상관없다는 독립성을 가지는 것이 자아를 지키는 일일까.
자아를 찾는 일이란 넓게 보고 그 모든 연결에 자상한 마음을 가지며 그 연결들이 서로 충돌하는 것을 조금씩 풀어나가는 일이다. 내 오른 손을 위해 내 왼발이 피를 흘리는 것은 가슴아프지만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내 오른손의 사소한 문제로 인해 내 왼발을 잘라내야 한다면 그것은 심각한 자아의 손상이다. 장기적으로는 나를 시들게 할 것이다. 자아를 찾는 사람은 그런 걸 피하고 싶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자아를 찾는 일이란 내 맘대로 한다던가 어떤 억압에서 벗어난다는 것 이상으로 더 큰 세계로 나가는 일이고 나를 정돈하는 일이다. 그러한 모습은 누군가에게는 매정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우리 가족만 생각하는 사람의 눈에는 식민지 시절에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신을 돌봐주지 않는 남편이나 아내나 자식이 매정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은 애정이 넘치니까 하는 것이다. 좁은 세상에서 자기 연민에 넘치는 사람이 스스로를 애정에 넘치는 사람으로 여기는 것은 착각이다. 그 사람은 애정이 부족하다.
자아를 찾은 사람이 내 마음대로 살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한편으로는 옳은 말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을 잘 살핀 사람이기 때문에 희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을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해 보다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다른 사람들이 하는대로 생각없이 따라하면서 자신감없는 태도를 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독립이나 내 마음대로 사는 거라니. 자아를 찾은 사람은 애정이 넘치는 사람이다. 그런 건 없다. 말했듯이 그런 말은 진실의 일부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동시에 크게 틀린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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