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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글모음/인공지능에 대한 글

인간의 언어는 낡은 미디어 일까?

by 격암(강국진) 2025. 5. 22.

나는 지금 도서관 순례 여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도서관에 앉아서 책들을 보다보니 문득 지금의 인간언어라는 것은 이제 낡은 미디어가 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집트의 그림문자가 새겨진 돌판을 볼 때 느끼는 것처럼 뭔가 필요없이 쓰기 어려운 미디어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것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것은 적어도 멀티미디어를 생각하면 분명하다. 사람들은 이제 라디오를 듣고 티비를 보는 것을 넘어 유튜브 동영상으로 정보를 얻는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도 많은 것을 아는 시대이며 문해력이 떨어지는 시대이다. 전처럼 책이 오락거리가 많이 되고 정보의 주요 출처가 되는 시대가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멀티미디어에만 있지는 않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인간 언어의 주체와 추상성에 있다. 먼저 인간 언어의 주체가 누구인가하는 문제부터 생각해 보자. 한때 문자는 인간만이 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컴퓨터는 여러가지 정보를 저장한다. 그리고 그 정보도 문자로 저장된다. 즉 이제 문자 정보는 컴퓨터에 의해서 대량으로 생산되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언어모델 AI가 최근에 발달하면서 더 분명해지게 되었다. AI가 인간과 문자로 소통하고, 에세이도 대신 써준다. 더 이상 인간언어는 인간만 쓰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블로그나 기사를 AI가 쓴다며 신기해 하지만 인터넷이 AI가 생성한 텍스트로 채워지는 시대에 인간언어의 주체가 인간이라고만 생각하는 것은 무리다. 이제까지는 AI가 인간의 언어데이터를 학습했지만 어쩌면 미래에는 언어의 몸통은 AI가 차지할 지도 모른다. 인간과 AI가 소통이 증가하고 더 많은 텍스트들이 AI에 의해서 생성될 때 표준어의 무게중심이 AI쪽으로 쏠릴 수 있다. 구술언어이건 문자언어이건 말이다. 언어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당연히 중요하다. 고대 그리스나 조선시대처럼 글을 전체의 소수의 사람들만이 쓸 때 인간언어의 주체는 인간 전체가 아니었다. 그건 노예를 부리는 귀족이고, 한자를 공부할 시간이 있는 부자 양반이었다. 이걸 생각하면 AI가 인간보다 훨씬 더 많은 텍스트를 생산하는 시대를 불안한 눈으로 보게 된다. 인간이 기계의 노예가 되는 것일까, 기계가 인간의 노예가 되는 것일까? 

 

이같은 예측은 터무니 없는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인간이 하는 일을 어떤 다른 기계나 시스템이 대체할 때 인간은 그것에 적응해 왔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간을 위해 시스템을 만들지만 나중에는 시스템이 표준이 되고 인간이 그것에 맞추는 경향이 더 커진다. 대표적인 것이 법이다. 사안이 벌을 줘야할 것인지 상을 줘야 할 것인지는 본래 권력자의 마음대로였다. 하지만 법이 만들어지자 법은 일종의 판단기계로 작동한다. 이제 권력자가 없는 곳에서도 사람들은 어떤 일이 불법인지 합법인지를 판단할 수 있다. 심지어 권력자도 법을 무시하기 어렵다. 인간 사회가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자동화가 이전보다 훨씬 더 빠른 판단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이다.  법치주의 국가에 살고 있는 우리가 알고 있듯이 법은 개인의 감정이나 판단보다 사회의 중심 질서에 대한 더 강한 기준이 된다. 이런 걸 생각하면 어쩌면 미래에는 한국의 표준어란 AI 23호가 하는 말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정의될 수도 있는 것이다. AI란 사실 데이터를 가지고 만드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사전같은 것이라서 이게 그렇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법치국가에서 살면서 우리는 우리를 법의 노예라고 비하하지 않는다. 

 

이미 인간의 언어는 현 시대의 복잡성을 다루는 일에서 한계를 들어내고 있다. 책을 생각해 보라. 책은 세상에 너무 많다. 일단 고전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수 많은 새로운 책들이 쏟아져서 누적된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누구도 도서관에 있는 책을 전부 읽을 수  없다. 그러나 사실 백년 이백년전으로 가면 상황은 달랐다. 지금보다 책도 정보도 희박했던 그 시절에는 지식인들은 모든 책을 읽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물리학자는 출간된 논문을 전부 읽고 교양인은 출판된 책을 전부 읽으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출판되는 책이 많아지면서 상황은 당연히 그게 불가능해지는 방향으로 변했는데 우리는 그런 변화의 끝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같은 사실을 자명한 것으로 여기지만 생각해 보면 이건 정보 매체로서 문자 언어가 한계를 들어낸 것이다. 이제 인간이 인간의 언어로 정보를 기록하고 그걸 읽기에는 정보가 너무 많다. 오늘날 책이란 정보를 모아 두려고 하는 데이터 베이스의 용도로 쓰는 게 아니다.  사람이 읽을 필요가 있을 때만 만드는 것이다. 컴퓨터 데이터 베이스는 책보다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으며 그걸 전부 프린트해서 책으로 만드는 것은 돈낭비다. 검색도 안되는 종이 책은 엄청난 양의 정보가 있을 때는 별로 도움이 안된다. 다시 말해 우리는 모든 걸 책으로 만들지 않는다. 날마다 쏟아지는 기사들을 모아서 매일같이 책을 내자고 하는 사람은 없다. 이렇듯 인간의 문자언어로 뭔가를 기록해서 책으로 만드는 일은 분명한 한계를 가진다. 

 

이 주체와 인간언어의 한계를 생각하면 우리는 인간언어의 추상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이 쓰는 언어는 정보가 폭증하는 세상에서 점점 컴퓨터에서의 기계어같은 것이 되어가는 것은 아닐까? 컴퓨터 언어는 층층의 구조를 가진다. 다시 말해 컴퓨터 하드웨어에서 직접 작동하는 기계어가 있는가 하면 포트란이나 C같은 하이레벨 컴퓨터 언어가 있고 더욱 더 일상용어에 가까운 모습을 가진 더 상위레벨언어인 스크립트 언어가 있다. 컴파일러는 우리가 매트랩이나 R같은 상위 언어로 코딩을 하면 그걸 컴퓨터 하드웨어가 이해하는 언어로 번역한다. 하지만 컴퓨터를 쓰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계어를 모른다. 사실 파워포인트같은 소프트웨어를 쓰는 사람은 종종 아무런 컴퓨터 언어도 모른다. 하부 구조는 점점 더 위에 상부구조를 가지고 상부구조에만 관여하는 사람은 하부구조를 모르는 것이다. 원도우에서 우리가 마우스로 파일을 이 창에서 저 창으로 옮길 때 그러한 행동은 OS에 의해서 컴퓨터가 실행해야 할 언어로 번역되고 실행된다. 

 

인간이 쓰는 문자언어가 기계어 같은 것으로 보인다는 말은 우리가 더 많은 정보를 처리하기 위해 보다 더 효율적인 상부구조를 담당하는 언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한다. 이걸 위해 책을 하나의 수학적 증명 같은 것으로 여기는 태도에 대해 말해 보자. 이 태도에 따르면 저자는 전달하거나 주장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으면 그걸 증명하기 위해서 단계 단계별로 글을 쓰고 각각의 것에 대해서 여러가지 인용을 달고 증거를 제시한다. 이같은 태도는 오늘날 책을 쓰는 사람들이라면 어느 정도 당연시 하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글이나 책은 증명에 관한 것이다.

 

그런데 사실 수학이나 물리학에 나오는 것처럼 엄밀하게 뭘 증명할 수 있는 건 현실 사회에서는 없다. 예를 들어 초등교육이나 복지정책이나 한일관계에 대한 책을 쓴다고 하자. 그 책을 통해서 작가는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을 만든다. 그리고 그 시스템 안에서는 그 작가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가 당연하게 보여지게 된다. 이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과 같다. 누군가가 유클리드 기하학을 소개하고 그 다음에 그 시스템 안에서 왜 삼각형의 내각의 합이 180도 인지를 설명하면 작가의 주장은 자명하고 반박할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수학이나 이론 물리학에서와는 달리 사회 분야에서는 제 아무리 길게 써도 그 시스템이 수학에서 나오는 형식적 시스템에서 처럼 분명하게 정의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일관성조차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니까 마르크스의 자본론처럼 읽기 힘든 긴 책을 쓴다고 해도 그것이 물리학에서처럼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게 아니다.

 

이것은 인간 지성의 한계이고 인간언어의 한계다. 책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을 위한 것이지만 사실 종종 인간 능력의 한계를 시험한다. 책을 읽으면서 앞에서 읽은 것을 한자도 빼지 않고 기억하거나 그 논리적 전개를 하나도 빼지 않고 이해하고 기억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심지어 책을 쓰는 저자도 자신이 쓴 것에 대해 그렇게 하기 힘들다. 사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인간은 구술언어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글로 쓴 것은 다시 읽어 볼 수가 있다. 그래서 작가도 자기가 쓴 것을 계속 읽으면서 수정하고 심지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 지를 자기 글을 읽으면서 알게 되기도 한다. 책을 읽을 때는 그냥 읽는게 아니라 노트를 쓰면서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노트를 다시 봐야 책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따라갈 수 있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책의 내용은 그저 내 머리를 스쳐지나갈 뿐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책은 앞에서 말한대로 기계어를 연상시킨다. 길고 길게 써져 있는 컴퓨터 코드가 뭘 의미하는지, 틀린데는 없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은데 두꺼운 책도 비슷하다. 

 

그런데 우리는 오늘날 인간에 비하면 무한대의 기억력을 가진 AI를 가지게 되었다. 400페이지짜리 책을 읽으라고 하면 순식간에 그 책을 읽는다. 인간이라면 속력도 속력이지만 그 책안에 등장하는 사실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일이 너무나 오래걸릴 일이지만 AI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고 점점 더 잘해내고 있다. 그래서 책을 주고 그 책에대해 토론을 하는 notebookLM같은 AI를 쓰면 AI의 견해가 인간보다 뛰어나지는 않다고 하더라도 그 속력에 있어서 만큼은 비교가 되지 않으며 AI의 견해도 상당히 뛰어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나는 특정한 철학자의 철학에 대해서도 AI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예를 들어 이러저러한 주장은 하이데거의 철학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를 묻는 식으로 하이데거의 철학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하이데거의 책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이런 대화는 엄청난 양의 철학텍스트로 옳고 그른 걸 따지기 전에 접근을 불허하는 철학자가 접근 가능한 존재가 되었다고 느끼게 만든다. 인간이라면 만들 수 없는 엄청난 길이의 수학증명도 AI는 할수 있다. 이 말은 인간이라면 쓸 수 없는 천권짜리 책도 AI는 쓸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런 시대에 인간의 책이나 언어란 다른 역할과 의미를 가져야 한다. 이미 가능한 것이 아니라면 머지않아 논리적 줄거리만 제시하면 거기에 예들을 붙이고 논증을 붙여서 그걸 하나의 책으로 만들어 내는 일을 AI가 잘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은 보다 큰 그림에 집중하고 그 큰 그림의 하부적인 세부사항을 채우는 것은 AI가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마치 기업의 CEO가 어떤 프로젝트를 하기로 결정하면 그 기업의 직원들이 그에 필요한 세부사항들을 더 잘해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과 같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운전자는 엔진의 원리를 몰라도 악셀을 밟으면 차의 속력이 빨라지는 것을 안다. 마찬가지로 점점 더 인간은 세부사항이 아니라 상부구조에 관여해야 할 것이다. 왜냐면 세부사항을 처리하는 것은 AI가 인간보다 훨씬 더 빠를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세상에는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의 층층의 구조들이 있다. 컴퓨터 언어가 그 예다. 그리고 이 상부구조와 하부구조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면서 또 서로 독립적이기도 하다. 파도와 생명은 물질로 이뤄져 있지만 파도가 물질이고 생명이 물질은 아니다. 모짜르트의 음악이 악보는 아니다. 컴퓨터 프로그램과 컴퓨터 하드웨어는 서로 다른 것이다. 하부구조는 중요하다. 철근콘크리트라는 재료는 어떤 모양의 집이 지어질 수 있는가하는 한계를 결정한다. 그러나 집의 설계가 철근콘트리트라는 하부구조에 의해서 완전히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AI가 이제까지 인간만이 할 수 있었던 일을 대신하고 더 빠르게 하게 되면 인간은 이제까지의 많은 일들을 일종의 하부구조로 하는 새로운 상부구조를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할 때 인간은 지금의 복잡한 세상을 다룰 수 있게 될 것이다. 산업혁명이후 농업은 상업의 하부구조를 이루는 산업이 되었다. 그래서 선진국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농사를 짓는다. 농업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2차, 3차 산업은 어느 정도 1차 산업과는 독립적인 상부구조를 이룬다. 그래서 우리는 쌀이나 당근이 어떻게 우리 식탁에 오르는 지를 고민하지 않고 음식의 레시피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다. 

 

이같은 것은 인간의 언어가 지금보다 추상적인 것으로 진화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AI가 점점 더 많은 일을 대체할 때 인간들은 점점 더 작은 관심을 하부구조에 쏟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될 때 AI의 언어와 인간의 언어가 마치 하이레벨 컴퓨터 언어와 로우레벨 컴퓨터 언어의 차이처럼 다른 정체성과 역할을 가지는 언어로 잘 구분될 것이다. 하이레벨 언어는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에 보다 특화된 것으로 미래에도 AI가 잘 다룰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의 언어와 인간의 사고는 이제 달라져야 하는 것이다. 

 

이같은 것을 나는 경영자와 말단 노동자의 차이로 말하고는 한다. 말단 노동자는 그냥 돈을 받고 위에서 시키는 일을 한다. 하지만 경영자는 투자나 미래전망, 위험도나 가치평가등 훨씬 더 확률적이고 추상적인 사고를 해야 한다. 지금의 학교는 노동자를 키우는 일에 특화되어져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시대에 맞지 않는 교육일 것이다. 우리는 새로운 사고방식, 새로운 언어를 배울 필요가 있다. 모두가 농부가 되지 않는 시대에 농업만 모두에게 가르치는 것은 옳지 않다. 

 

지금 시대의 인간이 쓰는 언어는 그 주체에 있어서나 추상성에 있어서 AI의 발달에 따라 하부구조의 언어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상부구조의 언어를 개발해야 한다. 그 일이 완성되고 나면 도서관을 가득 채운 책들의 의미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프린트한다면 엄청난 길이가 될 기계어 프로그램을 보고 프로그래머는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기계어 프로그램은 컴파일러라는 인간의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AI는 인간이 문명시대에 생산한 모든 텍스트를 이미 학습했다. 그걸 앞으로는 보다 더 잘 소화해낼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인간의 한계때문에 신비한 것으로 여겨지던 이제까지의 인간문명은 보다 단순한 하부구조로 여겨질 수 있다. 인간에게 남은 것은 그것을 하부구조로해서 만들어 낼 미래의 문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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