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번 올레길은 본래 제주항일 기념관에서 시작해서 김녕항까지 이어지는 19.4km나 되는 긴 길이다. 하지만 우리는 동복포구를 잠깐 들린 후 북촌포구에서 함덕해수욕장까지만 역방향으로 올레길을 걸었다. 오늘은 짧은 거리지만 뜻하지 않은 이벤트 덕분에 원하지 않는 스릴과 감동을 맛본 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일단 먼저 점심을 먹기 위해 우리는 함덕해수욕장에서 멀지 않은 선이네밥집에 들렸다. 착한가격업소이기도 한 가게에 들어서니 친근하게 말을 걸어주시는 할머니가 다른거 먹지 말고 정식을 먹으라고 권해주신다. 세련된 가게는 아니지만 분명 싸고 푸짐한 집이기는 하다. 만원짜리 정식이 상을 가득 채운다. 이 집은 벽 가득히 방문한 사람들이 쓴 포스트잇 메모가 걸려있다. 유명할만한 곳이며 제주 식사는 비싸다는 생각을 버리게 해줄 만한 집이다. 사교적인 할머니는 웃으면서 나에게 2만원대신 20만원 결제하면 안되겠냐고 농담도 하셨는데 둔한 나는 제대로 반응을 못했다. 죄송하다. 내가 농담을 잘 못한다.

동복포구는 올레길의 일부가 아닌 포구로 약간 쓸쓸한 곳이었다. 동복포구에서부터 걷기를 하기 위해 잠시들렸지만 길에 인도가 협소해서 잠시 들려서 사진만 찍었다. 관광객이 많이 모이는 곳은 그 나름의 장점이 있지만 호젓한 항구도 나름의 정취가 있다.

우리의 산책은 북촌포구에서 시작되었다. 우리는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했다. 올레길을 순방향대로 걸으면 함덕해수욕장에서 이 북촌포구까지 걷게 되는데 그래서 일까 그렇게 눈에 띨만한 것은 없는 경치인데도 늘어서 있는 몇개의 카페가 모두 사람으로 가득하다. 이곳은 아마 사람들이 많이 쉬어가는 곳인가 보다.
북촌포구를 지나 올레길을 따라 걸어서 해동포구를 넘어서면 서모봉 일제동굴진지라는 곳이 나온다. 우리는 평탄한 길을 따라 걸을 수도 있고 일제동굴진지로 갈 수도 있다 (아니 있을 것처럼 보인다. 본래는 진입금지가 되어있어야 하는 곳인데 그게 없다.) 나쁜 의미로 말하면 이 길이 오늘의 하일라이트였다.
이 길은 먼 옛날에 길이었던 곳으로 들어가보면 생각보다 좁고 긴 길이며 사람이 안 다니다 보니 큰 거미가 거미줄을 군데 군데 쳐놓은 길이다. 길 자체는 대부분 나무로 된 동굴같은 길이라 어두운데 그나마 중간에 그 나무가 없어진 부분은 절벽끝에서 아슬아슬하게 걸어야 하는 길이었다. 나무가 없으니 길위에 풀이 많이 자라서 길이 잘 안보인다. 우리는 거의 밀림을 헤치듯 그 길을 걸었는데 바로 옆에 절벽이라서 나도 그랬지만 아내가 매우 무서워했다. 바닥의 풀을 밟는데 그 풀밑이 사실은 허공일 수 있으며 그렇다면 절벽으로 떨어질 느낌으로 몇백미터인가를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번 가본 사람은 못갈 길은 아니지만 그 길이 언제 끝나는 지를 잘 모르는 우리 부부는 이대로 좀 더 상황이 안좋아지면 조난 신고를 해야할 것같은 길이었다. 그러나 길은 결국 끝나고 다시 우리는 본래의 올레길에 합류하게 되었다. 도착하고 보니 우리가 걸은 부분에는 크게 진입금지라고 써있다. 우리는 좀 어이가 없었다. 그 진입금지 길로 들어가려는 부부가 있어서 우리는 적극 만류했다.




고진감래라고 했던가. 이 조난길 같은 길이 끝나면 -올레길대로 걸어도 보게 되는 풍경이지만- 멋진 풍경이 펼쳐진다. 우리 앞에 펼쳐지는 평화로운 초원의 풍경이며 함덕해수욕장을 내려다 보는 풍경은 그때까지의 고생과 대비되어 유독 깊은 감동을 줬다. 고생이 감동을 깊게 한다니 좀 슬프다.
이미 몇개인가의 제주도 해수욕장을 다녔지만 함덕해수욕장은 제주도의 해수욕장중 가장 관광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다운 사진을 찍을 수 있고 멋진 카페들이 있다. 해변에는 많은 중국인 아가씨들이 드레스를 입고 모델처럼 사진을 찍고 있다. 발목을 지나서까지 떨어지는 드레스가 바닷물과 모래에 닿을 정도다. 프로 모델은 아닌 것같지만 사진찍으려는 열정은 프로다.
함덕 해수욕장근처에는 알고보니 우리와 같이 비슷하게 조난길을 걸었던 분이 있어서 한참 그 분과 이야기를 나눴다. 제주에 3월에 내려왔다고 하시니 이미 7개월은 제주 생활을 하신 분이다. 본래 삼성에 다니시던 분인데 은퇴한 후 알바도 해가며 제주에 머문다고 하신다. 선한 인상을 가지신 분인데 퇴직금을 친한 친구에게 사기당하는 가슴아픈 일이 있으셨다고 하신다. 제주가 치유의 섬은 맞나 보다. 아무쪼록 제주에서 아픈 상처를 치유하고 가시기를 기원해 드리며 오늘의 뜻밖의 만남은 끝났다. 그분은 우리에게 빵집이나 횟집을 추천해 주시기도 했다.
조난길에 고생한 우리는 본래 항일기념관까지 가기로 했던 일정을 접었다. 사실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그게 아니라도 더이상의 산책은 무리였다. 아까 추천받은 오드랑 베이커리에 가서 마늘빵을 먹고 커피를 마셨다. 아내에게 조난당하니 남편이 든든하지 않냐고 자랑도 좀 하고, 함덕 해수욕장이 참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했다.
차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면서 내일은 좀 쉬기로 결심했다. 다리도 아프고 책도 좀 더 읽고 싶다. 글도 좀 더 쓰고 싶다. 게으른 날도 있어야 아름다움에 대한 감동도 배가되는 거 아닐까. 아니 어느 쪽이 게으른 날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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