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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학교, AI 환경

서구는 왜 기계인간에 불안해 하는가?

by 격암(강국진) 2025. 11. 14.

21세기 현재에는 동양도 근대화 서구화되었다. 따라서 서구와 동양의 차이를 흑백론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동양인으로서 우리는 서구를 볼 때 그들이 기계 인간에 대해 지나치게 불안해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이러한 불안에는 역사적 철학적 이유가 존재한다.

 

기계 인간의 불안에 대한 뿌리에는 이 세상의 것들은 접촉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처럼 설명되어질 수 있다는 서구의 기계철학이 존재한다. 이에 따르면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혹은 거의 모든 것들은 기계다. 그러나 서구에서도 이 기계철학을 완전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는데 그렇다면 자유의지같은 것은 설명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문에 데카르트는 기계가 아닌 마음과 기계적인 육체로 인간이 이뤄져 있다는 심신이원론을 주장하면서 종교와 윤리가 기계철학의 대상에서 예외가 된다고 해야 했던 것이다.

 

심신이원론은 오늘날에도 고민의 대상이 되는 주제이지만 노암 촘스키에 따르면 그것은 이미 뉴턴 물리학에 의해서 파산한 것이다. 뉴턴 물리학에서 말하는 물질은 중력을 가지는데 중력은 접촉에 의해서 움직이는 기계 현상이 아니라 원격 작용이기 때문이다. 즉 거리가 떨어져 있는 물질들이 마법처럼 중력의 영향을 받는다. 이때문에 다른 과학자들은 뉴턴 물리학을 신비주의로 공격했고 뉴턴 스스로도 원격작용은 믿기 힘든 것이라는 점을 인정했다. 하지만 실험결과는 뉴턴물리학을 받아들이게 했다. 원격에서 작동하는 중력이 가지는 철학적 의미는 물질조차 기계철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때문에 마음은 물론 물질도 기계철학적으로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이 뉴턴 물리학의 주장이 되었고 심신이원론은 진작에 파산되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계철학의 힘은 서구에서 여전했다. 서구 사람의 눈에 아는 것은 힘이고 모르는 것은 악이다. 따라서 무지는 극복되어야 하고 실패의 결과로 이해된다. 발전이란 아는 것의 경계를 넓혀서 무지한 세계를 좁아지게 만들었다가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근대는 기계철학적 구조물을 인간이 세우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점점 더 높은 구조물을 세워서 이 우주를 남김없이 정복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기계다. 그리고 인간이 기계라면 인간보다 더 뛰어난 기계도 있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기계 인간은 존재가능한 것이고 공포스러운 것이 된다.

 

이에 비하면 동양은 정의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이 세상의 필수적 요소로 보아 왔다. 그래서 기니 도니 불성이니 하는 정의되지 않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해 온 것이다. 이에 따르면 인위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으로 어떤 것의 완전한 복제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세상의 모든 것에는 설명불가능한 도가 있으며 인위적이고 계산적인 생각으로 복제한 것은 그 도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계 인형은 절대로 인간을 완전히 대체할 수 없다. 이 말이 어떤 특정한 기능에서 기계가 인간을 능가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자동차는 인간보다 빠르게 달리고 계산기는 인간보다 계산이 빠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을 완전히 능가하고 대체하지는 않는다.

 

동양의 이같은 태도는 서구의 현대 철학에서도 어느 정도 반복되는 것이다.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쓴 리처드 로티는 듀이, 비트겐슈타인 그리고 하이데거같은 철학자들을 나열하면서 그들은 모두 초기에는 이 세상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만들려고 노력했지만 후기에는 그것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그같은 주장으로부터 사람들을 치유시키는 노력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몇 철학자의 주장과 대중문화는 같지 않다. 기계철학의 뿌리를 가진 서구와 도교와 불교의 뿌리를 가진 동양은 기계 인간에 대해서 가지는 입장이 서로 다르다. 이것이 서구의 미디어가 기계인간에 대한 공포로 가득 채워진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옳을까? 서양인가 동양인가?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하건 그 답자체보다 그 답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인간이 기계라고 말할 때 우리가 말하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우리의 무지란 뭘 말하는 것일까? 인공지능이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지능의 보편적인 정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생명의 보편적인 정의도 없다. 이걸 생각하면 단정적으로 이게 옳다 저게 옳다고 말하는 것은 허무한 것이다. 어떤 명제를 긍정하거나 부정하든 우리는 단어의 뜻 자체를 넘어서는 영역으로 쉽게 진입하기 때문이다. 기계 인간은 위험한가 위험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무런 결론도 없고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다는 것이 이 글의 결론은 아니다. 우리는 결국 한발 한발 나아간다. 나아가야만 한다. 정의도 정확히 모르는 단어에 휘둘려서 공포에 빠지는 것은 오히려 비극을 만든다. 기계 인간이 짠하고 내 PC안에 생겨날 것처럼 상상하는 사람은 너무 호들갑을 떨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앞으로 더 많은 정보를 가지게 될 것이고 그에 따라 새로운 인공지능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인간과 생명이 무엇인가하는 것에 대한 것까지 많은 것을 다시 정의하고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걸 출발점으로 해서 우리는 또 다시 한걸음씩 더 미래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선사시대의 수렵채집인이 21세기를 상상할 수 없었듯이 우리가 어디로 가게 될지는 미리 알 수 없다. 그러나 미래가 두렵다고 해서 완벽한 정답을 찾기 전까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태도는 옳지 않다. 선택의 순간은 이유가 있어서 오는 것이다. 근대 문명이 그 모순이 누적되고 극대화되면서 이대로 우리의 진행방향이 계속 유지되면 비극이 생기니까 돌파구를 찾게 되는 것이다. 기계인간에 대한 공포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선택이다. 아마도 가장 비극적일 수 있는 선택일 것이다. 현실을 이대로 유지하는 선택이 아니라 오히려 현실을 어느 순간 가장 극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선택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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